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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100년 골목길에 꽃핀 예술, 젊은이들이 다시 찾아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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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대전 근대화의 상징, 소제동 관사촌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낡은 보도블록이 깔린 마당에 초록의 향연이 펼쳐졌다. 생명을 향한 자연의 합창이 우렁차다. 좁은 공간에 풀과 나무가 제멋대로 자란 것 같지만 알고 보니 박선민 작가가 세심하게 골라 심은 것들이다. 작품명 ‘소제도감’이다. 마당 자체가 설치미술로 탈바꿈했다. 대전광역시 동구 소제동의 한 주택가 풍경이다.

일제강점기 생긴 철도원들 숙소 #현대작가 14팀이 다채롭게 꾸며 #전시와 공연, 퍼포먼스 한자리에 #도시재생의 새로운 모델이 될까

원래 이곳엔 생활 쓰레기가 쌓여 있었다. 지난 3월까지 그랬다. 박선민 작가는 ‘소제동 아트벨트’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받은 즉시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마을 곳곳에 있는 오동나무·모과나무·두충나무 등을 주목했다. 대전역 옆 동네, 도심에 가까운 곳임에도 오래된 나무가 많이 남아 있었다. 그는 나무에서 소제동에 쌓인 시간을 읽었다. 식물학자 서정남 박사의 도움을 받아 동네 주변의 나무와 풀 76가지를 조사했고, 이후 석 달가량 해당 식물을 이곳 마당에 정성껏 심었다. 전시를 총괄한 신수진씨와 함께 ‘마당집’이란 이름도 붙였다.

박 작가의 설명은 이렇다. “담장 너머 크게 자란 나무들이 이 동네의 역사입니다. 일제강점기 때의 나무도 있어요. 나무의 시선으로 소제동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전시 디렉터 신씨가 추임새를 넣었다. “나무와 잡초가 함께 자랍니다. 시간의 지도인 셈이죠. 100년 풍상을 품은 집과 새로 심은 식물이 친구처럼 어울립니다.”

초록빛 정원으로 되살아난 쓰레기장

100년 세월을 품은 대전시 소제동 관사촌이 예술로 다시 일어서고 있다. 박선민 작가의 ‘모든 떨리는 것들에 대한 3’이 상영 중인 마당집 내부.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100년 세월을 품은 대전시 소제동 관사촌이 예술로 다시 일어서고 있다. 박선민 작가의 ‘모든 떨리는 것들에 대한 3’이 상영 중인 마당집 내부.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마당집 안으로 들어갔다. 1920년대 지은 집을 새로 단장했다. 원형을 최대한 유지한 채 번듯한 전시장으로 꾸몄다. 마당 쪽으로 낸 통유리 두 개 너머로 보이는 초록 정원이 시원하기만 하다. 실내에선 박선민 작가의 영상물 ‘모든 떨리는 것들에 대한 3’이 상영되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풀, 마을 주변의 공사 소리, 저 멀리 대전역서 기차 떠나는 소리 등이 뒤섞였다. 자연과 인간의 대립과 갈등을 은유하는 듯하다.

전시장 화장실 내부도 이채롭다. 노래방 사이키 조명 미러볼을 설치했다. 마당집의 예스런 풍경과 불협화음을 이룬다. 신수진 디렉터는 “주말마다 공연과 워크숍을 열 예정이다. 신나는 놀이 공간이 될 것”이라며 웃었다.

대전은 철도의 도시다. 1905년 경부선, 1914년 호남선이 잇달아 개통하면서 한적한 마을 ‘한밭’은 남한의 교통 심장으로 급부상했다. 옛 유행가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 열차, 대전발 0시 50분’은 지금도 대전을 대표하는 노래로 종종 불린다. 대전역 동광장에 2015년 건립된 ‘기적을 울리는 사람들’ 조형물이 눈에 띈다.  2020년 한국전쟁 70주년을 생각하게 한다. 6·25 당시 군인 및 전쟁물자 수송 작전 과정에서 산화한 287명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있다.

소제동에 있는 76가지 식물을 심은 마당집 정원.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소제동에 있는 76가지 식물을 심은 마당집 정원.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대전역 동쪽의 소제동은 철도 도시 대전의 어제와 오늘을 대변한다. 일제강점기 철도 기술자·역무원 등이 거주한 관사촌(官舍村)이 살아 있다. 광복 이후에는 대전 시민의 살림터가 됐다. 1920~30년대 100여 채가 있었으나 6·25 때 상당수가 폭격으로 사라졌고, 현재 40채가 조금 안 되게 남아 있다. 특히 최근 도시재개발 사업이 추진되면서 대전 근대화의 상징인 관사촌 일대가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그런 소제동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도시 재생과 뉴트로(New+Retro, 새로운 복고) 열풍을 타고 소제동 100년 발자국을 보존하려는 작업이 한창이다. 골목길 곳곳에 맛집·카페가 20개 가까이 들어서며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핫 플레이스’가 됐다. 문화유산이 상대적으로 적은 대전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를 태세다. 관사촌을 전시·공연장으로 활용하는 ‘소제동 아트벨트’도 열매를 맺었다. 지난달 12일 시작된 ‘오늘 꾸는 꿈’(8월 23일까지)은 예술로 되살아나려는 소제동의 재기 선언과 같다.

만화방·사진관을 갖춘 두충나무집. [사진 소제동 아트벨트]

만화방·사진관을 갖춘 두충나무집. [사진 소제동 아트벨트]

‘오늘 꾸는 꿈’에는 최근 왕성히 활동하는 국내외 아티스트 14개팀 32명이 참여한다. 최근까지도 사람이 직접 살던 관사 네 채를 매입해 마당집·핑크집·두충나무집 등 재미난 이름을 붙였다. 살림집 자체를 문화공간으로 꾸민 아이디어가 새롭다. 전시·비디오·설치·연극·퍼포먼스 등이 두루 섞이는 예술장터가 탄생했다.

전시는 ‘관사 16호’에서 시작한다. 1939년 건립된 집으로, 지붕 하나에 두 가구가 사는 쌍둥이 연립주택이다. 일본의 다다미방이 한국의 구들장 문화로 변화해온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한반도 기후에 맞게 개조된 대전의 근대가옥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오스트리아 출신의 비주얼 아티스트 자스민 샤이틀의 ‘현재/현존’ 영상이 관객을 맞는다. 작가는 유리창에 입김을 불어 넣고, 거기에 ‘NOW(지금)’라는 글자를 써넣었다. 하지만 ‘NOW’는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지고 만다. 무한한 시간 속에 놓인 오늘의 가치를 살피게 한다.

보존과 개발 사이, 당신이 꾸는 꿈은?

대전시 소제동에는 정겨운 골목길이 30개 넘게 남아 있다. 대나무 사이에 펼쳐진 골목길이 시원스럽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대전시 소제동에는 정겨운 골목길이 30개 넘게 남아 있다. 대나무 사이에 펼쳐진 골목길이 시원스럽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관객들은 이후 마당집을 거쳐 핑크집에 도착한다. 핑크색을 유난히 사랑했던 전 주민의 취향을 100% 살렸다. 다양한 색조의 분홍빛이 동화 같은 느낌을 자아내지만 막상 집안에는 괴이한 공기가 흐른다. 심래정 작가의 설치영상물 ‘바스(Bath) 하우스’다. 암 투병 중인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인 “목욕을 하고 싶다”를 가슴에 품어온 심 작가가 요양병원 공중목욕탕 풍경을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위태롭게 풀어놓았다. 생과 사의 갈림길, 오늘 당신의 마지막 소망을 묻고 있다. 1920년대 일본 목조주택 양식을 간직한 마지막 전시장 두충나무집에선 펜화가 안충기의 익살스러운 글과 그림을 아이패드로 감상할 수 있다.

소제동 아트벨트는 대전의 도시가스 업체인 CNCITY에서 후원했다. 서울 출신의 이 회사 황인규 대표는 “대전의 정체성을 간직한 문화와 장소를 찾다가 소제동 관사촌을 만났다”며 “카페·식당만으로는 공공성을 살릴 수 없어 작가들과 젊은이들이 함께 호흡하는 예술마을을 조성했다. 오는 9월에 열릴 제 2회 대전비엔날레 연계 행사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소제동의 주인공은 근대가옥과 골목길이다. 대도시에선 보기 어려운 골목길이 30여 개 있다. 보물찾기하듯 골목 골목을 거니는 재미가 쏠쏠하다. 건축가 유현준 교수(홍익대)는 “근대 주거양식을 보여주는 집도 집이지만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골목길은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며 “인근 대덕연구단지의 연구 기능이 접목되면 소제동은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처럼 예술과 과학이 융합된 멋진 공간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개성 없는 아파트 단지를 하나 추가한다고 대전의 역사성·독자성이 살아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향후 소제동의 최종 선택에 관심이 몰리는 이유다.

“구도심 활용, 카페·맛집이 다는 아니다”

신수진

신수진

“이제 변화의 시작입니다. 소제동 일대가 앞으로 100년, 아니 200년 동안 어떻게 달라질지 흥미롭습니다. 저는 100년을 살지 못하겠지만 소제동은 분명 새로운 미래를 여는 장소가 될 수 있어요. 최소 5년, 장기 프로젝트로 추진할 계획입니다.”

전시 디렉터 신수진(52·사진)씨는 일회성이 아니 지속성에 방점을 찍었다. 손님 끌기용 단기성 기획이 아닌 두고두고 일상과 함께하는 예술을 일구겠다는 것이다. “과거 유산을 보존하자는 게 아니라 잘 쓰고, 잘 활용하자는 뜻입니다. 미래를 향한 투자라고 할까요. 다양한 층위를 지닌 도시는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 그런 것 아닐까요.”

사진심리학을 전공한 신씨의 모토는 ‘생활 속의 예술’이다. 문화역서울 284 예술감독, 동강국제사진제 예술감독 등 여러 직책을 거치며 지금까지 130여 차례 전시 및 공연을 꾸려왔다. 요즘에는 예술과 과학의 융합에도 관심이 커 암호화폐 기술을 활용한 온라인 예술품 거래 플랫폼 구축도 추진 중이다.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서울 익선동 주변이 최근 지루해진 건 카페·식당·상점만 있기 때문입니다. 일상과 동떨어진 상업시설은 오래가기가 어려워요. 그런 면에서 소제동은 가능성이 큽니다. 온종일 산책하고 다녀도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어요. 시민들이 예술을 통해 활력을 찾는 곳으로 성장해간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