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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적인 사람이 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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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최인철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최인철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내성적인 사람이 살 만한 세상이 왔다. 외향성의 제국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야 했던 그들에게 마침내 해방의 날이 왔다. “제가 좀 내성적이라서요…”라며 늘 둘러대야 했던 구차함이 사라지고 있다.

팬데믹은 내성적 사람에 호조건 #사회적 거리두기는 그들의 특기 #외향성에 대한 열등감 없앨 기회

외향적인 사람은 내성적인 사람의 고통을 모른다. 침묵이 무능으로 오해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그들의 마음을 알 턱이 없다. 모여서 과제를 해야 하는 팀 프로젝트 때문에 내성적인 대학생들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모른다. 활동 중심의 수업을 해야만 하는 내성적 교사들의 고통은 또 어떤가. 인문학 공부 모임에 참여하기를 요청받는 내성적 CEO들의 고충은 또 어떤가. 인문학 열풍에 편승해 생겨난 각종 조찬 모임은 새벽 댓바람부터 내성적인 사람을 괴롭힌다. 사회생활이 외향적인 사람에게 축제라면 내성적인 사람에게는 시험일 뿐이다.

내성적인 사람의 고통은 이뿐만이 아니다. 시간 낭비에 불과한 회의를 남발하는 리더에 대한 불만, 수업 자료를 하나도 읽지 않았으면서 마치 다 읽은 것처럼 떠들어대는 동료 학생에 대한 분노, 생각하지 않고 말부터 하는 그들 때문에 결국 뒷수습은 자신들의 몫이라는 점을 깨달았을 때의 허망함.

세상은 어쩌다 외향성의 천국이 됐을까

외향성의 제국을 난공불락으로 만든 결정적 주범은 심리학이다. 외향성이 행복에 유리하다는 연구들을 쏟아내면서 그렇지 않아도 높았던 외향성의 지위를 한층 더 높여 놓았다. 내성적인 사람은 행복하기도 어렵단 말인가. 내성적인 사람이 외향적인 사람으로 갑자기 변신할 수는 없어도 외향적인 행동을 꾸준히 연습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연구가 위로의 차원에서 제시됐지만, 내성적인 사람의 절망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외향적인 사람과 어울리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조언도 오히려 상처가 될 뿐 큰 위로는 되지 못했다. 이로써 외향성은 사회생활뿐 아니라 개인의 행복 영역에서 가장 높은 권좌에 올랐고, 마침내 외향적인 사람은 금수저가 되고 내성적인 사람은 흙수저가 되는 강고한 외향성의 제국이 완성되었다.

외향성의 제국은 내성적인 사람에게는 심각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칼 융(Carl Jung)이 처음 제안한 내향성-외향성 개념에 따르면, 내향성이란 자기의 내면세계만으로도 충분한 자극을 받는 성향이다. 반면에 외향성이란 내면의 자극만으로는 충분한 각성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외부 세계로부터의 자극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성향이다. 따라서 내성적인 사람은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싫어한다. 웬만해선 갈등도 회피한다. 갈등 자체보다 갈등이 만들어내는 자극의 과잉이 싫기 때문이다.

내성적인 사람은 주장과 주장이 맞서는 웅변의 영역보다는 숫자와 글, 또는 기술로 승패가 갈리는 사고의 영역에 삶의 터전을 잡는다. 외향성의 제국에서 자신들이 살아남으려면, 언변이나 사교가 중요하지 않은 영역에서 기술적 전문성을 극대화하는 길밖에 없다는 점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불편하지 않아

난공불락으로 보이던 이 외향성의 제국에 바이러스로 인한 붕괴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성적인 사람에게 최적의 환경이 만들어진 셈이다. 그들의 전매 특허인 ‘사회적 거리 두기’가 새로운 게임의 규칙으로 등장하고, 사회적 거리 좁히기라는 외향성의 룰이 사라진 것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외향적인 사람에게 형벌이라면 내성적인 사람에게는 취미이자 특기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중 외향적인 사람과 내성적인 사람의 행복감 변화를 분석한 서울대 행복연구센터의 연구에서도 외향적인 사람의 행복감이 더 크게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운동장은 이제 반대로 기울고 있다. 내성적인 사람이 외향적인 사람인 척 연기할 이유가 사라졌다. 타고난 성격을 아쉬워해야 할 이유도 사라졌다. 그동안은 “제가 좀 내성적이라서요…” 하면서 미안함과 죄의식을 느끼며 모임에 빠졌다면, 이제는 외향적인 사람이 “제가 좀 외향적이라서요…”라고 멋쩍어하며 모임을 열어야 한다.

이제 해명은 그들의 몫이 되었다. 삶의 모든 순간이 해명일 때 그 삶은 얼마나 비루했던가?

내성적인 동지들이여. 외향적인 사람의 역습을 경계하라. 사람 사는 재미란 서로 부대끼는 것이라며 또다시 회식과 회의를 꺼내 들 때, 사람 사는 재미란 ‘꼭’ 필요한 사람과 부대끼며 지내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맞서라.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해야만 했던 우리의 비루한 삶은 이제 끝났다.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