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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미군 살해 사주 알고도 놔뒀다" 트럼프 또 '러 스캔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2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아프간에서 숨진 미군 운구 행렬을 향해 경례를 하고 있다.[AP=연합뉴스]

지난 2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아프간에서 숨진 미군 운구 행렬을 향해 경례를 하고 있다.[AP=연합뉴스]

갈 길 급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제2의 러시아 스캔들' 의혹에 휩싸였다. 이번 무대는 아프가니스탄이다. 러시아가 무장 단체 탈레반에 아프간 주둔 미군 살해를 사주한 걸 알고도 트럼프 대통령이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다. 뉴욕타임스(NYT)는 28일(현지시간) 익명의 정부 소식통을 인용, 이같은 의혹을 보도했다.

NYT "미 정보당국이 보고, 적절한 대처 안해" #트럼프 "누구도 보고받은 적 없어, 가짜뉴스"

NYT에 따르면 미 정보당국은 러시아가 탈레반 측에 미군의 살해를 사주하고 포상금까지 지급했다는 사실을 파악해 트럼프에게 보고했고, 3월 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도 이를 논의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대 러시아 제재 등에 나서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즉각 보도 내용을 반박하고 나섰다. 그는 "나, 마이크 펜스 부통령, 마크 메도스 비서실장 중 누구도 보고를 받은 적 없다"고 부인했다. 이어 "미군에 대한 공격은 많지 않았고, 어떤 행정부도 우리보다 러시아에 강경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가짜 뉴스 NYT는 익명의 소식통을 밝혀야 한다"면서 "(NYT는) 그렇게 못할 것이다. 이 사람은 아마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 CNN 등 미 주요 언론도 관련 내용을 확인했다며 NYT의 보도를 뒤따라 갔다.

보도가 사실이라면 미군이 위험에 빠진 것을 알면서도 대응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돼 트럼프 대통령은 상당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러시아의 도움을 받았다는 '러시아 스캔들' 의혹으로 곤욕을 치러왔다. 이 때문에 임기 내내 러시아에 상당히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주장도 제기돼왔다.

오는 11월 미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맞붙을 조 바이든 전 부통령도 "사실이라면 충격적인 폭로"라면서 "위험한 곳에 파견한 병력을 보호해야 한다는 국가의 신성한 의무를 배신한 것"이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이어 "트럼프는 터무니없는 국제법 위반에 대해 러시아를 제재하거나 대가를 치르게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블라디미르 푸틴 앞에서 품위를 떨어뜨리는 부끄러운 활동을 계속해왔다"고 비난했다.

러시아와 미국, 아프간의 악연

 2001년 11월 9 일 미국 뉴욕의 월드트레이드센터에 비행기 두 대가 날아와 건물에 충돌하는 테러가 발생했다. 사진은 테러 당시 월드트레이드센터가 무너지기 전 모습. [AP=연합뉴스]

2001년 11월 9 일 미국 뉴욕의 월드트레이드센터에 비행기 두 대가 날아와 건물에 충돌하는 테러가 발생했다. 사진은 테러 당시 월드트레이드센터가 무너지기 전 모습. [AP=연합뉴스]

이번 의혹은 아프가니스탄까지 엮이는 바람에 파장이 더 컸다.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러시아(구소련)와 오랜 기간 경쟁 관계였고, 두 강대국이 간접적이나마 군사적으로 충돌한 지점이 아프간이었다.

이슬람 국가인 아프간은 유럽과 서남아, 중동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 요충지로, 제국들의 숱한 침탈을 당해온 곳이다. 1979년에는 소련이 침공한다. 소련에 맞선 건 무자헤딘(무장한 이슬람 게릴라 조직). 험한 산악 지대에 숨어 점조직으로 맞서는 무자헤딘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이때 미국은 무자헤딘을 뒤에서 지원하며 소련을 견제했다. 당시 미국의 개입은 영화 '람보 3'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소련은 10년간 아프간에서 뼈아픈 타격을 입고 1989년 물러났다.

아프간 분쟁은 또 다른 숱한 분쟁의 불씨를 낳기도 했다. 훗날 미국 본토를 공격한 오사마 빈 라덴을 키운 것도 소련-아프간 전쟁이다. 사우디아라비아 갑부 집안에서 태어난 빈 라덴은 열렬한 무슬림으로서 80년대 중반 아프간 전쟁에 참여했는데, 이 과정에서 생각이 맞는 무자헤딘 일원들과 알카에다를 결성(1988년)했다.

반미로 돌아선 탈레반과 알카에다  

1998년 알카에다의 지도자인 오사마 빈 라덴이 연설 중인 비디오 화면. 그의 옆에 AK-47이 놓여 있다. [AP=연합]

1998년 알카에다의 지도자인 오사마 빈 라덴이 연설 중인 비디오 화면. 그의 옆에 AK-47이 놓여 있다. [AP=연합]

이후 아프간 내 무자헤딘은 탈레반이라는 이름의 무장 단체가 돼 아프간을 점령했다. 탈레반과 국제 테러 조직 알카에다가 같은 뿌리를 가진 셈이다. 알카에다는 소련-아프간 전쟁 이후엔 반미 노선을 띠게 됐다. 1990년 걸프 전쟁 이후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 내 이슬람 메카에 미군을 주둔한 데 대한 반발이 커지면서다.

2001년 알카에다의 9·11테러 이후 미국은 아프간 수도에서 탈레반을 축출했다. 탈레반이 아프간에 숨은 빈 라덴의 신병을 미국에 넘기지 않은 게 계기가 됐다. 아프간에는 친서방 성향의 새 정부가 들어섰지만, 곳곳에 숨은 탈레반과 미군은 충돌을 계속했다. 2002년에는 미국 주도 하의 나토 국제안보지원군이 치안 유지 명목으로 아프간에 주둔하기 시작했다.

미국, 지난 2월 탈레반과 평화협정

지난 3월 2일 아프가니스탄 내 무장세력인 탈레반 조직원들이 미국과 탈레반이 맺은 평화협정을 자축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3월 2일 아프가니스탄 내 무장세력인 탈레반 조직원들이 미국과 탈레반이 맺은 평화협정을 자축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번 NYT 보도가 사실이라면 탈레반은 과거 미국을 배후로 러시아를 공격했듯, 이번엔 러시아를 배후 삼아 미국을 공격한 셈이 된다. 탈레반 측과 러시아는 NYT 보도에 대해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이다. NYT는 익명의 당국자들을 인용해 미 정보당국은 러시아군 정보기관인 정찰총국(GRU) 산하 '29155'라는 조직이 미군 살해를 사주한 것으로 파악했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아프간에서 전투 중 사망한 미군은 20명가량이다.

한편 미국은 지난 2월 탈레반과 평화협정을 맺고 아프간 주둔 미군을 1만2000명에서 8600명으로 감축한 상태다. 대신 탈레반은 아프간에서 미군에 대한 공격을 모의하거나, 수행할 수 없도록 하는 조항에 동의했다.

하지만 반정부 테러가 빈발하면서 아프간의 정정은 여전히 불안한 상황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평화협정 이후 탈레반이 아프간 정부군에 하루 평균 55건의 공격을 하고 있고, 이로 인해 아프간 국민 등 사상자가 2배 이상 늘어났다고 지난 5월 보도했다.

정은혜 기자 jeong.eunhye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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