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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북한 요원의 통곡, 김정은 향한 문재인의 쓴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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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주필

이하경 주필

북한은 외부 세계를 너무 모른다. 그것이 한반도 현대사의 비극을 초래한 알파이자 오메가다. 대한민국 자산인 개성의 남북한 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고, ‘남북 평화의 요정’ 김여정이 맹수로 표변해 독설 폭탄을 날린 건 국제 규범을 무시한 악행이다.

트럼프는 속여도 미국은 못 속여 #볼턴과 아베 하노이 노딜 ‘동지’ #한국민 모욕감…대북 불신 심각 #핵무기 쥐고는 배고픔 해결 안 돼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기적과 같은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우리 한국민은 마음을 다해 기원할 것”이라고 했다. ‘네오콘’인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회고록에서 통화 내용을 들은 느낌을 “죽음에 가까운 경험”이라고 표현했다. 평화주의자의 선의가 매파에게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석만이 존재한다”고 한 니체의 아포리즘이 뼈아프다.

문 대통령은 국내외 보수의 저항과 조롱을 묵묵히 감내해 왔다. 그런데도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철면피한 궤변’ ‘비굴함과 굴종의 표출’이라고 북이 비난한 것은 윤리를 거역한다. 예고된 군사행동은 김정은이 보류시켰다. 감읍(感泣)이라도 하란 말인가.

지난해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난 뒤 베이징의 대북 채널을 관리하는 책임자는 “현지 북한 요원이 통곡했다”고 알려줬다. 북한은 감정을 내려놓고 일이 왜 이렇게 꼬였는지 복기해야 한다. “김정은이 트럼프를 거의 속일 뻔했지만 미국은 속일 수 없었다”는 것이 ‘전쟁광’ 볼턴의 해석이다.

볼턴은 하노이로 가는 길에 펜스 부통령과 백악관 참모들에게 연락해 스티븐 비건이 만든 합의문을 채택하지 못하도록 손을 썼다. 트럼프에게 1986년 아이슬랜드의 레이캬비크에서 열린 고르바초프와의 정상회담을 결렬시키고 걸어나오는 레이건 대통령의 영상을 틀어주기까지 했다. 아베 일본 총리도 “북한에 과도하게 양보하지 말라”고 제동을 걸었다. 볼턴과 아베는 ‘동지’로 판명됐다. 한반도 평화를 자축하는 샴페인을 터뜨리려 한 남북한은 순진했다.

북한은 한국이 미국과의 동맹 대오에서 빠져나와 제재를 푸는 데 앞장서 달라는 강력한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거친 방식은 역효과를 불러왔다. 국민 절대다수는 선의가 모욕받았다고 생각한다. 90%가 북한의 비핵화 약속을 믿지 않는다. 90%는 한·미 동맹이, 85%는 주한미군 주둔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난주  발표된 통일연구원 조사 결과다. 북한의 ‘난동’은 온건파의 입지를 극도로 축소시키는 자해행위가 됐다.

공동연락사무소 폭파로 174억원의 혈세가 허공에 날아갔는데 이 정부의 누구도 북의 책임을 추궁하지 않고 있다. 국민의 모욕감은 대북 화해 정책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남북기본합의서,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으로 평화의 전기를 마련한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는 탈냉전 한국 외교의 성공 모델이었다. 한국은 중국·소련을 포함한 북방 공산권 10개국과 수교했다. 한발 더 나아가 북한이 미국·일본과 국교를 맺도록 도왔으면 어땠을까. 서구 자본주의 세상과의 상호의존성은 북한체제를 훨씬 유연하고 상식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를 총괄한 김종휘 전 외교안보수석이 지난주에 모처럼 입을 열었다. “노 대통령은 북한의 미국·일본과의 대화를 철저히 차단했다. 남북대화에 저해요소가 되기 때문이었다. (중략) 가네마루 신 전 자민당 부총재가 (1990년) 외무성 관료들과 함께 북·일 수교를 위해 북한을 방문한 뒤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대통령은 아주 단호한 어조로 북·일 대화에 반대했다. 가네마루는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했다”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인 김대중이 최초로 제기하고,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의 6·23선언에 담겼던 ‘남북한 교차승인에 의한 항구적 평화의 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한국과 수교한 중·소에 배신감을 느끼고 미·일 접근도 어렵게 되자 북한은 이후 30년간 핵개발에 매달렸다. ‘북방정책 성공의 역설’이다. 한반도 평화가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 새삼 절감하게 된다.

아직 기회의 창은 열려 있다. 북한은 지금부터라도 미국과 솔직한 대화를 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도 동맹인 미국과 더 긴밀해져야 한다. 한반도 문제는 미중 패권경쟁의 하위 변수여서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0년 6·15 정상회담 전에 가졌던 예비회담을 미국에 설명하도록 박지원 당시 문광부장관에게 지시하면서 “숨소리까지 사실대로 알려주라”고 했다.

볼턴이 하노이 ‘노딜’을 위해 소환한 레이캬비크 회담은 외교사에서 가장 실패한 정상회담이다. 그러나 이 실패를 기초로 미·소 정상은 1년 뒤 군축 합의를 이뤄내 냉전 종식의 전기를 마련했다. 레이건을 수행했던 켄 아델만 전 유엔대사는 “지금 북·미에 필요한 것은 기초작업”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김정은에게 “핵을 포기하지 않으면 미국을 움직일 수 없고, 배고픔을 해결할 수 없다”고 얘기해야 한다. 남북 모두 진실의 순간을 직면해야 문제가 풀린다. 지구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하경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