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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윤설영의 일본속으로

“집세 비싼 도쿄 살 이유 있나” 시골 빈 집 찾는 일본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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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윤설영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여기가 오늘부터 지낼 집입니다. 낮에는 지도를 보면서 동네 구경도 하고 맛집도 알아뒀어요”

'애프터 코로나' 원격근무 확산 #워라밸 중시, 지방으로 눈 돌려 #일본 정부 '지방 살리기' 기회로

지난 26일 영상회의 시스템인 줌(ZOOM)을 통해 기자에게 나가노(長野)현 이나(伊奈)시에 있는 집의 내부를 보여준 혼마 히데키(本間英範·26)씨의 얼굴엔 벌써 설렘이 가득했다.

지난 26일 혼마 히데키(26)씨가 영상회의 시스템인 '줌'을 이용해 나가노현 이나시에 있는 집에서 취재에 응하고 있다. [윤설영 특파원]

지난 26일 혼마 히데키(26)씨가 영상회의 시스템인 '줌'을 이용해 나가노현 이나시에 있는 집에서 취재에 응하고 있다. [윤설영 특파원]

도쿄의 광고회사에서 영업직을 맡고 있는 그는 아침 7시 도쿄에서 버스를 타고 4시간을 달려 이곳으로 왔다. 업무 때문도 휴가를 낸 것도 아니었다. 살러 온 것이다. 도쿄에서 약 270㎞ 떨어진 이곳에서 당분간 일도 하고 등산도 하며 지낼 생각이다.

전국의 빈집을 개조해 사무실로 제공하는 ‘어드레스’라는 서비스를 이용했다. 이 집은 6번째 집이다. 도쿄에서 가까운 가마쿠라(鎌倉), 오다와라(小田原), 즈시(逗子) 등 중소 도시에서 살아봤다. 한 번에 2~3일씩, 길게는 열흘씩 지내본 곳도 있다.

가나가와(神奈川)현에 있는 부모님 집에서 살 때와 비교하면 교통비 등 생활비는 더 들어가지만, 삶의 질은 훨씬 높아졌다. 혼마씨는 “일을 하다가 고개를 들면 눈앞에 아름다운 바다가 펼쳐진다. 언제든 리프레시가 가능해서, 정신적으로 굉장히 마음이 상쾌하다”고 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원격근무가 확산되면서 가능해진 일이다.

일본에서 코로나19 이후 일하는 방식에 큰 변화가 생겨나고 있다. 대도시에 살면서 만원 전철을 타고 사무실로 매일 출퇴근을 하는 방식에서, 원하는 곳에서 살면서 일도 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직장인의 평균 출퇴근 시간은 100분(내각부 경제사회종합연구소 조사, 2010년)으로 세계적으로도 악명이 높다.

더구나 도쿄, 오사카 등 대도시가 코로나19 같은 감염증에 취약하다는 점이 확인됐다. 수도직하지진 등 대형 재해 가능성까지 제기되면서 ‘도시 리스크’가 커졌다. 더 이상 비싼 집값을 내면서까지 대도시에 살 이유가 사라진 셈이다. 매일 출퇴근 지옥에 시달리느니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갖춘 환경을 찾아 대도시에서 지방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이 같은 변화는 코로나19를 계기로 원격근무를 경험하면서 속도가 붙었다. 일본 내각부가 지난 21일 발표한 ‘코로나로 인한 생활의식 변화’에 관한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34.6%가 원격근무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도쿄 23개구(區)에선 55.5%가 원격근무를 경험한 것으로 조사됐는데, 이 가운데 약 90%가 “원격근무를 계속하고 싶다”도 답했다. 64.2%는 “일보다 생활을 중시하게 됐다”, 24.6%는 “지방 이주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답한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월 4만엔(약 45만원)을 내면 전국 60여곳의 집을 일터로 쓸 수 있는 ‘어드레스’는 코로나 이전인 1·2월과 비교해 최근 3개월간 회원 수가 4배 가까이 늘었다.

코로나19로 원격근무가 확산되면서 빈 집을 사무실 겸 숙소로 제공하는 서비스도 생겨났다. [일본 어드레스]

코로나19로 원격근무가 확산되면서 빈 집을 사무실 겸 숙소로 제공하는 서비스도 생겨났다. [일본 어드레스]

사쿠라이 사토코(桜井里子) 어드레스 이사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지방에서 살 수 있다는 점에 관심이 상당히 높아졌다. 무리해서 비싼 월세를 내고 도심에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면서 “이용자는 20·30대와 40·50대의 비율이 반반 정도고, 자녀와 함께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소개했다.

‘워케이션’이라는 개념도 확대 중이다. 일(work)과 휴가(vacation)를 동시에 한다는 개념으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여행지나 휴가지에서도 일하는 방식이다.

직원은 휴가지에서 회사 컴퓨터로 업무를 처리하면 정상근무로 간주하고 급여도 똑같이 지급한다. 일본의 대형 부동산개발 회사 미쓰비시지쇼(三菱地所)가 와카야마(和歌山)현, 미에(三重)현 등과 손잡고 자사 빌딩 입주기업 직원들을 대상으로 워케이션을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이 같은 근무 방식의 변화를 ‘지역경제 살리기’의 기회로 보고 있다. 그동안 아베 정부가 ‘일, 사람, 일자리 살리기’를 앞세워 도쿄 수도권 집중 현상을 해소하려 했지만, 성과를 내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니시무라 야스토시(西村康稔) 경제재생담당 장관은 “지금까지 추진돼왔던 지방 살리기와 수도권 집중 해소, 저출산 대책, 일하는 방식 개혁, 디지털화 등을 한 번에 추진할 찬스”라고 밝혔다.

특히 외국인 관광객 의존도가 높았던 지방은 코로나19가 직격탄이었다. 향후 일하러 오는 인구를 늘림으로써 지역민과 교류도 늘리고 경제 효과도 생겨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일본 종합연구소 다카하시 스스무(高橋進) 명예회장은 니혼게이자이 신문 인터뷰에서 “젊은이들의 지방 이주를 촉진하고, 도시와 지방의 교류가 깊어지면 지방 살리기의 계기가 될 것은 틀림이 없다”고 분석했다.

일본 정부는 올해 2차 추경예산에 광회선 등 인터넷 환경 정비에 501억6천만엔(약 5632억원)을 책정했다. 이미 투입한 본예산 52억7천만엔(약 592억원)의 10배, 1차 추경예산 30억3천만엔(약 340억원)의 17배에 이르는 대규모 예산으로 이참에 정비를 가속화시키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환경성은 30억엔(약 337억원)을 전국 34개 국립공원과 80개 온천지의 워케이션 사업에 지원한다.

닛세이기초연구소 김명중 주임연구원은 “그동안 미국, 유럽에 비교해 원격근무 보급률이 낮았지만, 향후 원격근무가 널리 보급되고 워라밸 실현이 가능해지면 지금까지 육아나 병수발 등의 이유로 노동시장에 참가하지 못했던 여성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일을 시작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