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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탈자 못 견뎌 했던 고집 센 아이, 하늘서도 책 매만질 것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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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2호 22면

고 박종만 ‘까치글방’ 대표 영전에

박종만

박종만

박종만이 세상을 떠났다. 두 주일 전만 해도 휴대전화 너머로 체온이 담긴 목소리를 들려주었었다. 코로나19라는 장애물이 걷히면 곧바로 만날 수 있을 것처럼 두 사람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60년 전 부산서 중2 때 첫 인연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 알려줘 #고교 거쳐 대학 땐 취중 언쟁도 #내 제안대로 ‘까치’ 출판사 작명 #‘뿌리깊은나무’ 출신답게 완벽 추구 #천국서도 고치려들 그, 구경 가고파

우리는 부산에서 살았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알았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자주 어울렸다. 머릿속에 든 것이 많은 친구였다. 어느 날은 니체를 얘기했고, 다른 날은 사르트르를 얘기했다. 기억에 가장 오래 남는 것이 비스마르크이다. 나는 니체나 사르트르는 이름 정도는 알았지만 비스마르크는 처음이었다. ‘철혈재상’이라는 수식어가 상당한 거부감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비스마르크를 존경한다고 했다. 나는 그가 나보다 확실히 세상을 깊고 넓게 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도 같이 다녔다. 우리는 여전히 머릿속에 방금 도착한 덜 익은 지식들을 가지고 얘기했고, 얘기는 쉽게 논쟁으로 번졌다. 지식과 언변이 앞섰던 그가 언제나 나를 이겼다. 어쩌다 내가 승복을 못 하고 버티면 논쟁이 언쟁이 되었다. 누군들 지고 싶으랴만 그는 지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우리는 대학도 부산에서 같은 학교에 다녔다. 전공은 달랐지만 여전히 어울려 지냈다. 1964년의 6·3항쟁을 고비로 한일회담이 마무리된 뒤 1966년부터의 일이다. 이때의 논쟁 혹은 언쟁은 주로 술집에서 막걸리를 앞에 놓고 이루어졌다. 술이 들어가다 보니, 드물었지만 언쟁이 폭거로 이어지기도 했다. 둘이 결투를 한 번 했고, 합세해서 동석한 선배를 패준 비열한 행위도 있었다.

박종만은 1977년 출판사를 시작했다. ‘까치’라는 이름은 내가 제안했다.

출판사를 시작하기 전에 잡지 ‘뿌리깊은나무’에서 한 해 반 남짓 나와 같이 일했다. 그 무렵 내가 발행인에게 불만이 있어 쟁투 같은 것을 하는 사이 그도 내 불만에 동참하여 회사를 그만둔 것이 출판으로 옮겨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한동안은 힘들어했으나 두어 해 지나자 출판 일에 정을 완전히 붙였다. 그러구러 벌써 마흔 해가 넘게 지났다.

까치 출판사 주요 출간 도서

까치 출판사 주요 출간 도서

2020년 6월 22일, 내가 이름을 아는 대한민국의 모든 신문이 출판인 박종만이 세상 궂긴 기사를 내보낸 날이다. 한결같이 그가 남긴 업적을 평가하며 애석한 마음을 바탕에 깔았다.

“고인이 까치글방을 시작한 것은 유신 독재 막바지였던 1977년 (…) 학술서를 많이 펴내 지성계를 이끌겠다는 그의 포부는 점차 국내 저자만 아니라 세계적인 고전과 동시대 석학들의 역작을 폭넓게 소개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고인은 『풍속의 역사』에 공동 번역자로도 참여했다.”(중앙일보 6월 22일자)

“많은 독자와 출판계 인사들이 국내에 주옥같은 책을 소개해온 고인에 대한 추모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고인은 (…) 번역이 까다롭고, 수고를 들여 출판해도 많이 읽히지 않을 것 같은 어려운 인문학·사회과학·자연과학 서적도 ‘꼭 필요한 책’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출판했습니다.”(경향신문 같은 날짜)

경향신문은 이어서 그가 출판한 책들 중에서 12권을 골라 사진까지 곁들인 소개글들로 지면을 채웠다.

김형윤

김형윤

박종만은 편집자 출신 출판인이다. 잡지 편집자 출신이다. 잡지사에 머문 기간이 짧아 딱히 배운 바가 많지 않다고 할 수 있지만, ‘글 다루기’ 하나만큼은 제대로 익혔다.

잡지 ‘뿌리깊은나무’ 편집자들은 글 손질이란 것을 가장 중요한 업으로 삼았다. 한글전용 매체로는 대한민국 처음이었던 이 잡지는 ‘글 손질’이라는 것도 이 땅에서는 처음 시작하였다. 여기서의 글 손질은 흔히 하는 교열과는 차이가 있다. 필자가 쓴 글을 재료로 보고 이를 제품으로 만드는 과정을 편집으로 보았다. 편집자는 맞춤법과 띄어쓰기만이 아니라 어법을 따졌고, 필요하면 문장의 구조까지 바꾸었다. 불필요한 부분을 들어내고 모자라는 부분을 찾아서 메꾸었다. 글의 제목과 소제목을 비롯한 장식들도 새롭게 했다.

까치서당은 내용이 좀 무거운 책들을 500권 넘게 만들었다. 그 책을 모조리 읽은 독자를 찾는다면 한 사람은 분명하다. 박종만이다. 물론 나의 짐작이지만, 그는 그가 내놓을 책의 원고들을 고치고 다듬는 데 평생의 3분의 2를 원없이 바쳤다. 나는 까치 책을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그 책들이 모두 ‘잘 읽히는 문장’들로 이루어졌음은 안다.

박종만은 그가 만든 책이 오자나 탈자, 또는 오역 때문에 독자의 지적을 받는 일을 참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그런 일로 책잡히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남은 삶이 길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뒤 그가 말했다.

“나는 일도 할 만큼 했고, 자식들도 잘 자랐고, 세상 떠나도 후회할 게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일찍이 ‘프란치스코님’이 된 그는 지금 천국에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중학생 때 나는 착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나를 신의 존재를 증명해보라며 구박했다. 그때는 그가 신을 믿지 않았다. 나는 머리가 굵어진 뒤로 천국에 가는 일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너무 따분하고 심심한 장소일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죽더라도 그를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고치려고 들 것이다. 구경하러 가고 싶기는 하다.

김형윤 ‘뿌리깊은나무’ 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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