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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전투기 조종사 출신 천라드, 중국 공군의 날개 활짝 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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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2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32〉

1943년 10월 29일, 중국 항공위원들과 중국 공군기지를 시찰하는 천라드. 앞줄 오른쪽 첫째는 국민당 군 총 참모장 바이충시(白崇禧). 뒷줄 왼쪽 첫째가 천청(陳誠). 대만 천도후 국민당 부총재와 부총통을 역임했다. [사진 김명호]

1943년 10월 29일, 중국 항공위원들과 중국 공군기지를 시찰하는 천라드. 앞줄 오른쪽 첫째는 국민당 군 총 참모장 바이충시(白崇禧). 뒷줄 왼쪽 첫째가 천청(陳誠). 대만 천도후 국민당 부총재와 부총통을 역임했다. [사진 김명호]

1931년 9월, 동북(만주)을 점령한 일본 관동군은 소련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소·만 국경에서 소련 극동변방군과 충돌이 그치지 않았다. 1935년은 100여 차례, 이듬해는 새해 벽두부터 3개월간 22차례 서로 총질을 했다. 1937년 7월 중국 국민당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항일전쟁을 선포했다. 스탈린은 국·공 합작으로 일본과 전쟁 중인 중국을 지지했다. 1937년부터 38년까지 1000여 대의 항공기와 조종사들을 중국에 파견했다. 1939년 10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일본 외무상이 스탈린과 5년간 시한부로 정전협정을 체결하자 소련은 중국에 나가 있던 공군병력을 귀국시켰다.

장제스, 제대로 된 공군 건설에 박차 #강골 퇴역 장교 천라드에 도움 요청 #쑹메이링, 공군 고문에 천라드 임명 #조종사 모집 때 한국인 여성도 자원 #미 대통령 루즈벨트는 전투기 지원 #항일전투 끝날 무렵엔 공군력 막강

일본 공군 맹폭에 다급해진 장제스

30여년 전 한국에서 공중전을 벌인 미 공군 참모총장 가브리엘과 함께 공군 연습을 참관하는 중국 공군사령관 왕하이(王海). 1985년 10월 베이징. [사진 김명호]

30여년 전 한국에서 공중전을 벌인 미 공군 참모총장 가브리엘과 함께 공군 연습을 참관하는 중국 공군사령관 왕하이(王海). 1985년 10월 베이징. [사진 김명호]

소련 공군이 자취를 감추자 일본 공군은 전시수도 충칭(重慶)과 구이린(桂林) 같은 도시를 연일 맹폭했다. 당시 중국 전투기 조종사들도 용감한 것 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었다. 떴다 하면 불기둥과 검은 연기 뿜으며 강이나 산에 추락하기 일쑤였다.

장제스는 제대로 된 공군 건설이 시급했다. 소련 공군보다 한발 앞서 중국에 온 미국인이 있었다. 중국인들에겐 천라드(陳納德·진납덕)라는 중국 이름이 더 익숙한 미 공군 퇴역 장교 시놀트였다. 천라드는 자신의 전술에 자부심이 강한 전투기 조종사였다. 상관에게 대드는 바람에 군직을 박탈당한 강골이었다. 중국과의 인연은 이탈리아 여행 중 중국 중앙항공학교 부교장 마오방추(毛邦初·모방초)를 만나면서 시작됐다.

마오방추는 장징궈(蔣經國·장경국)의 생모 마오푸메이(毛福梅·모복매)의 친정 조카였다. 황푸군관학교 생도 시절, 교장 장제스의 총애를 받으며 훗날 6·25전쟁 중국지원군 부사령관을 역임하는 동기생 천껑(陳賡·진갱)과 함께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

모스크바 유학을 마친 후 중앙군관학교 항공반 비행 조장을 맡았다. 중앙항공학교 부교장까지 승진했지만 공군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천라드를 보자 머리에 전깃불이 반짝했다. 명승지 항저우(杭州) 여행을 권했다. 천라드는 구미가 당겼다. 보직도 없는 군복을 벗어 던졌다. 마오방추가 보낸 초청장 들고 미국을 떠났다.

1945년 4월 14일, 버마(미얀마) 전선에서 중·미 합동으로 열린 루즈벨트 추도식. [사진 김명호]

1945년 4월 14일, 버마(미얀마) 전선에서 중·미 합동으로 열린 루즈벨트 추도식. [사진 김명호]

마오방추는 천라드에게 중앙항공학교 비행 교관직을 권했다. 당시 중국 공군사령관은 퍼스트레이디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이었다. 하루는 가슴에 공군 휘장 달고 항공학교 시찰 나온 쑹을천라드가 안내했다. 쑹은 천라드의 설명에 입이 벌어졌다. 며칠 후 천라드에게 ‘중화민국공군 고문’ 임명장을 줬다. 중국 공군 창설이 임무였다.

천라드는 중국 공군부대를 샅샅이 훑었다. 국민당 최고국방회의에 참석하고, 공군 작전계획 제정에도 참여했다. 모든 활동은 하나부터 열까지 비공개로 진행됐다. 소련이 중국에 주둔하던 공군을 귀국시키자 천라드는 모습을 드러냈다. 광시(廣西)성 류저우(柳州)에 항공훈련학교를 세우고 조종사를 양성했다. 여성 전투기 조종사도 모집했다. 일본 침략자 박살 내겠다며 지원하는 한국 여성들이 있었다. 1987년 여름, 중국의 항일전쟁과 한국의 6·25전쟁을 종군했다는 중국 언론인이 사석에서 이런 말을 했다. “천라드에게 교육받은 한국의 꽃다운 젊은 여인들이, 남의 나라 하늘에서 전투기 조정간 잡았던 모습 상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한국인들은 식민지 백성을 운명으로 치부하거나 동족상잔에 열 올릴 사람들이 아니다.”

6·25 전쟁 시절 중국지원군 공군은 단둥(丹東)에서 출격했다. 1950년 12월 21일, 단둥의 랑두(浪斗) 공군기지. [사진 김명호]

6·25 전쟁 시절 중국지원군 공군은 단둥(丹東)에서 출격했다. 1950년 12월 21일, 단둥의 랑두(浪斗) 공군기지. [사진 김명호]

장제스는 소련 공군이 철수하자 미국에 희망을 걸었다. 대통령 루즈벨트는 일본의 동북 점령 2년 후인 1933년에 취임했다. 일본의 영토 확장이 못마땅했지만 막을 방법이 없었다. 1940년 겨울 중국 주재 미국 대사가 본국에 중국 지원을 건의했다. “중국인들이 어쩔 수 없이 일본과 공산주의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해서는 안 된다. 출병을 제외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구체적인 내용까지는 제시하지 않았다.

장제스는 천라드와 마오방추를 미국에 보냈다. “작전용 항공기와 비행에 필요한 인원을 모집해라.” 루즈벨트에게 중국, 미국, 영국의 3국 합작을 호소하는 서신도 보냈다. 루즈벨트는 3국 합작은 거절했지만, 전투기 100대와 공군 지원병 모집은 동의했다. 장제스의 요구는 계속됐다. “미국 지원군으로 조성된 중국 공군 특별비행단을 만들고 싶다. 폭격기 200대와 수송기 300대를 파견해 주기 바란다.” 미국은 공군 장군 두 명을 정부 대표 자격으로 중국에 보냈다. 귀국한 장군들이 루즈벨트에게 건의했다. “필리핀에 중국 공군 훈련기관을 만들 필요가 있다. 미국 폭격기와 전투기 운용에 편리하다.”

“필리핀에 중국 공군 훈련기관 필요”

미국이 지원한 전투기 100대와 천라드가 모집한 조종사와 정비사들은 버마(미얀마)를 거쳐 중국에 도착했다. 중국은 ‘중국 공군 미국지원대’를 편성하고 천라드에게 지휘를 맡겼다. 루즈벨트는 경험이 풍부한 정치가였다. 국민당과 내전을 끝낸 중공의 동향도 좌시하지 않았다. 자신의 경호원이었던 해병대 대위 칼슨을 중공의 무장부대 8로군에 파견했다. 칼슨과 8로군 지휘부는 서로를 구워삶았다. 결국은 칼슨이 넘어갔다. “훗날 행세하려면 하늘을 장악해야 한다”며 국민당의 공군 양성을 흘렸다.

항일전쟁이 끝날 무렵 중국의 공군력은 막강했다. 장제스는 대만으로 천도할 때 공군부터 챙겼다. 항일전쟁 승리 후 중공이 조종사 교육에 열중하고, 6·25전쟁 지원군에 공군 투입이 가능했던 이유는 칼슨의 조언을 흘려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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