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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의 모더니티, 발코니와 만국박람회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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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2호 18면

바우하우스 이야기 〈38〉

‘원근법적 시선’을 극적으로 구체화해 만들어낸 프랑스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 [사진 윤광준]

‘원근법적 시선’을 극적으로 구체화해 만들어낸 프랑스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 [사진 윤광준]

‘베란다’라고 불렀다. 이름만큼이나 참으로 애매한 공간이었다. 한옥 마당을 그리워하던 우리 어머니들은 아파트의 베란다를 빨래를 말리거나 작은 장독대를 두는 공간으로 썼다. 지금은 죄다 없애고 거실로 확장해서 쓴다. 한국식 건축규제가 낳은 기현상이다(주거공간과 자연을 연결하는 ‘베란다’, ‘발코니’, ‘테라스’는 미묘한 차이를 갖는 개념들이지만, 여기서는 ‘발코니’로 통일해서 쓴다).

나를 중심으로 시야가 펼쳐지다 #유럽 ‘발코니’에 담긴 권력 미학 #바우하우스 ‘주거기계’ 개념 이후 #노동자·농민도 발코니 갖게 돼

왕궁이나 귀족용 저택에서 장식적 기능을 했던 발코니가 주거 공간과 외부의 자연을 연결하는 기능을 가진 주택의 필수공간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창을 통한 ‘시선’이 보다 적극적인 형태로 몸을 드러낸 것이다.

프랑스 화가 구스타브 카유보트의 그림 ‘발코니’(1880).

프랑스 화가 구스타브 카유보트의 그림 ‘발코니’(1880).

원래 발코니는 외부의 공간이 수렴되는 ‘원근법적 시선’의 권력이 확인되는 곳이었다. 프랑스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은 ‘원근법적 시선’을 가장 극적으로 구체화한 곳이다. 왕의 시선이 위치한 궁전의 발코니를 중심으로 여의도 넓이의 정원이 기하학적 규칙에 따라 꾸며졌다. 사실 베르사유 궁전의 원형은 보르비꽁트 성이다. 루이 14세의 재정을 담당했던 니콜라 푸케의 소유였다. 완공 축하파티에 참석한 루이 14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소실점이 하나뿐인 ‘원근법적 시선’의 소유자가 자신의 신하라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푸케는 갖가지 이유로 체포되어 종신형에 처해졌다.

루이 14세는 보르비꽁트성을 설계한 르 노트르를 데려갔다. 그리고 보르비꽁트성과 같은 기하학적 구조를 갖지만 규모는 몇 배나 더 큰 베르사유 궁전을 짓게했다. 베르사유 궁전 이후 유럽의 모든 군주는 원근법적 시선에 익숙한 프랑스 정원 설계사들을 초청해 유사한 정원을 지었다. 원근법적 시선의 권력에 매료된 것이다. 빈의 쇤부른 포츠담 상수시 궁전 등등이 죄다 거기서 거기인 이유다.

‘발코니’의 원근법적 시선에 깃든 권력

근대 부르주아들도 열광적으로 발코니를 설치했다. 왕과 귀족들의 시선을 소유할 수 있는 발코니는 자신들의 신분상승을 가장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베르사유 궁전 같은 것을 직접 지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오스만 남작이 건설한 파리가 있었다. 기하학적 원리에 의해 구조화된 파리의 거리는 도로변 어느 건물의 발코니에서든 ‘원근법적 시선’을 가능케 했다. 대로 양편에 심은 가로수는 원근법적 시선을 더욱 과장했다(오스만 남작의 파리 개조가 시위대의 바리케이드를 사전에 방지하려는 것이었다는 이야기는 너무 진부하다).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파리의 인상파 화가들은 신흥 부르주아들의 감격을 화폭에 옮겼다. 특히 카유보트는 권력 공간으로서의 발코니를 가장 극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발코니에서 파리의 오스만 대로를 내려다보는 부르주아들의 표정을 아주 다양하게 그려냈다. 사실 유리로 된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볼 수 있게 된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유리 사용이 일반화되기 전까지 ‘창문’은 빛이 내려오는 통로였다. ‘스테인드글라스’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의 거룩하고 엄숙한 기능을 극대화한 예술이었다.

15세기 이후 유리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창문은 비로소 밖을 내다보는 기능을 하게 된다. 이후 등장한 안경, 망원경, 현미경은 ‘보다’의 모더니티를 가능케 했다. 특히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보급되면서 안경의 수요는 엄청나게 늘어났다. 책과 창문을 통해 일어난 ‘보다’의 모더니티는 결국 죄다 유리를 매개로 이뤄졌다는 이야기다.

창문은 갖게 되었지만, 부르주아들이 소유한 발코니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노동자나 농민을 위한 주거시설에 ‘발코니’가 포함된 것은 바우하우스의 ‘주거기계(Wohnmaschine)’ 개념 이후의 일이다.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대중을 위한 ‘보다’의 모더니티는 엉뚱한 곳에서 펼쳐졌다. 이 또한 ‘유리’를 매개로 한 것이었다.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의 ‘수정궁’이다.

산업 진흥을 위한 박람회는 프랑스가 제일 먼저 시작했다. 1789년 혁명 이후, 프랑스는 산업진흥을 위한 공업제품 전시회를 1798년 파리에서 개최했다. 박람회라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대규모 행사가 탄생한 것이다. 단순한 상품전시에서 벗어나 다양한 문화장치를 도입한 대규모 행사였다.

파리의 산업박람회가 성공하자, 오스트리아·독일·벨기에 같은 이웃 나라들도 앞다투어 박람회를 열었다. 그러나 모두 국내용 행사였다. 당시 유럽 대륙에는 국제 박람회를 자신있게 열 수 있는 나라가 없었다. 이웃 섬나라 영국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당시 공업 제품의 양과 질에 있어 영국에 대항할 수 있는 나라는 없었다. 당연히 첫 번째 만국박람회는 영국의 몫이었다.

런던만국박람회의 ‘수정궁’

런던만국박람회의 ‘수정궁’

1851년, 드디어 런던에서 첫 번째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공식명칭은 ‘1851년 세계 산업생산품 대박람회(The Great Exhibition of the Works of Industry of All Nations of 1851)’였다. 5월 1일부터 10월 15일까지 개최된 이 행사에는 명칭에 걸맞게 28개국이 참여했고, 총 관람자는 600만 명이 넘었다. 하루 평균 4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몰려들었다는 이야기다. 지방 곳곳에서 런던으로 관람객을 싣고 나를 수 있는 당시 최고의 철도망을 갖춘 영국이었기에 가능했다.

런던 만국박람회의 최고 전시상품은 아이러니하게도 ‘수정궁(Crystal Palace)’이라 불렸던 전시공간이었다. 벽돌 한 장 사용하지 않고, 엄청난 양의 철골과 유리로 지어진 수정궁은 길이 563m, 너비 124m, 높이 33m의 거대한 건물이었다. 건물 안에는 세 그루의 커다란 느릅나무가 있었고, 이 살아있는 나무들 때문에 반원형의 커다란 지붕이 만들어졌다. 이 건물을 설계한 이는 정원사이자 온실 설계자였던 조셉 팩스턴(Joseph Paxton, 1801~1865)이다. 정원사가 전시관을 지은 일은 우연이 아니었다. 수정궁은 온실로 된 식물원의 확장판이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식물원은 16세기 대항해시대 이후 생겨났다. 남미와 아프리카, 아시아의 식민지로부터 대량의 낯선 식물들이 유럽으로 들어오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지난 호에서 설명한 린네의 탁소노미도 바로 이 식물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만국박람회, 대중들의 ‘발코니’가 되다

열대 식물들이 유입되면서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유리로 된 온실이 발명되었다. 열대 식물이 늘어나자 보다 큰 온실의 건설이 필요해졌다. 때마침 영국에는 철도와 다리 건설을 위한 철골 구조물이 증가하고 있었다. 온실 설계자들은 철골과 유리를 편집했다. 철골과 유리를 이용한 대형온실 건축은 아주 효율적으로 진행되었다. 유리와 철골로 이뤄진 대형 온실과 세계 곳곳의 식민지에서 들여온 다양한 식물을 체계적으로 분류한 식물원은 유럽의 세계지배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보다’의 모더니티는 대형 온실로 인해 또 다른 차원으로 발전한다. 분류학과 결합하면서 절대 왕조의 발코니가 갖고 있던 권력의 ‘원근법적 시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의 ‘박물학적 시선’이 가능해진 것이다. 런던 만국박람회의 수정궁은 식민지에서 들여온 식물을 대상으로 실험한 ‘박물학적 시선’을 세계 각국의 문화와 산업 생산품을 대상으로 확대한 것이었다. 전 세계 모든 물품을 분류하는 ‘박물학적 시선’은 메타권력적이었다.

유리로 된 건축물의 문화사적 의미를 독일 역사학자 볼프강 쉬벨부쉬는 ‘증발됨’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벽돌이나 돌로 된 건물의 경우 창을 통해 유입되는 빛으로 인해 밝음과 어두움의 대조가 형성된다. 공간 지각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모든 대상이 그대로 드러나는 유리로 된 건물에서 사람들은 전혀 다른 감각 경험을 하게 된다. 모두 증발된다는 것이다. 거리감도 없어지고, 방향감각도 상실된다. 당연히 한 곳으로 수렴되는 원근법적 대비도 사라진다. 일관된 밝기의 빛으로 비춰지는 유리 건물 안의 모든 대상은 구체성을 상실한 추상적 대상이 되어버린다.

일직선으로, 그리고 규칙적인 속도로 달리는 열차 안의 파노라마적 풍경이 구체적 공간에서 분리된 추상적 운동으로 경험되는 것처럼, 유리 건물 안의 풍경은 추상적인 빛의 공간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혼란을 바로잡기 위한 인위적이고 체계적인 분류가 긴급하게 요구된다. 분류와 편집을 위한 메타인지가 작동해야 하는 순간이다. 온실로 된 식물원에서 시작된 ‘박물학적 시선’은 수정궁 안의 대상들을 분류하면서 메타권력으로 체계화된다.

런던 만국박람회의 수정궁 내부는 원재료·기계·공업제품·조각 및 조형미술의 네 가지로 분류됐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는 보다 체계화되었다. 미술·학술·가구·섬유품·기계·원재료·농업·연예·축산·특별 전시라는 10개 부문으로 확대됐다. 아울러 출품 물품에 대한 등급제도 실시됐다. 전 세계의 모든 물건을 추상적 체계로 분류하고, 이를 다시 등급에 따라 나눴다(문제는 도대체 누가 분류하고, 누가 등급을 매기는가다. 이 숨겨진 메타적 시선에 대한 저항이 바로 ‘제체시온’이었다). 전시는 참가국에 따라 방사형으로 펼쳐졌다. 이처럼 이중, 삼중의 분류체계가 투명한 공간 안에 편집되었던 것이다.

분류의 ‘박물학적 시선’은 이제 한 가지 과제만 남겨두고 있다. ‘발전’과 ‘진화’라는 역사주의적 분류의 도입이다. 서구 모더니티는 이를 ‘박물관’을 통해 구체화했다. 국수주의의 인큐베이터였던 일본의 박물관과는 양상이 많이 달랐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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