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양심 없는 괴물은 물러터진 당신을 노린다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692호 20면

신준봉 전문기자의 이번 주 이 책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마사 스타우트 지음
이원천 옮김
사계절

하버드 상담 전문가가 쓴 #소시오패스 식별·대처법 #실제 사례 활용 강렬하게 읽혀 #소시오패스는 피하는 게 답

당신에게 양심이라고는 없다. 무슨 짓을 해도 죄책감이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게다가 타인의 일이라면 그게 누구의 일이든 털끝만큼의 관심도 없다. 책임감이란 잘 속아 넘어가는 바보들이나 짊어지는 짐덩어리일 뿐이다. 그런데 당신은 이런 내면을 감쪽같이 감추는 능력까지 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당신 혈관에 흐르는 차가운 피를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누구에 대한 묘사일까. 책의 본문(들어가는 말) 첫 페이지를 요약한 것이다. 묘사는 이어진다.

당신은 매력적이고 똑똑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당신이 하지 못할 일은 없다. 빼어난 IQ와 추진력을 무기로 사업가가 되거나 정치·법률·금융·국제개발 등의 분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위에 오를 수도 있다. 필요하다면 회계를 조작하고 증거를 인멸할 수도, 거래 상대방이나 지역구 주민들을 얼마든지 속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당신에게 폭력적인 성향까지 주어진다면? 누군가를 직접 죽이거나 다른 사람을 사주해 그 누군가를 죽이게 할 수도 있다. 성가신 사람은 누구든, 전부 다 말이다.

성격 유형을 판별하는 심리극이 갑자기 피가 튀는 잔혹극으로 뒤바뀌는 느낌이다. 이제 누군지 짐작이 가시나. 반사회적 인격장애, 소시오패스에 대한 묘사다. 잠깐, 소시오패스? 그러니까 사이코패스에 대한 설명은 아니라는 거지? 이런 궁금증은 잠시 접어두자.

똑똑하고 일 잘하는 나의 동료, 당신의 직장 상사, 우리의 정치적 열망을 대변한다는 정치 지도자가 실은 선량한 탈을 쓴 괴물일 수 있다는 게 저자의 강조점이다. 2005년 미국에서 출간된 원서 제목 ‘The Sociopath Next Door’와는 다른 느낌의 한국판 제목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가 내비치는 것처럼 말이다.

전 남편과 의붓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 고유정. 최악의 소시오패스와 경계선 인격장애라는 진단이 엇갈린다. [연합뉴스]

전 남편과 의붓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 고유정. 최악의 소시오패스와 경계선 인격장애라는 진단이 엇갈린다. [연합뉴스]

소시오패스든 사이코패스든, 또라이라면 우리는 할 말이 꽤 있다. 굳이 먼 데서 찾을 필요가 있을까. 마음속에 파란 분노의 불꽃을 일게 하는 성격파탄자를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만난 적이 있다. 당연히 책이 그런 부류를 문제 삼는 건 아니다. 말하자면 극단적인 성격파탄자, 신문이나 TV에 나오는 흉악 범죄의 주인공인 소시오패스들을 주로 문제 삼는다. 이들은 언제나 골칫거리 혹은 어떻게 해도 함께 살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친근으로 가장한 그들의 가면을 벗겨낸 다음 행복해지는 길 혹은 생존의 길을 찾아보자는 거다.

저자 마사 스타우트(67)는 심리상담 전문가다. 하버드 의대 등에서 일하며 소시오패스 생존자, 그러니까 소시오패스로부터 해코지를 당한 피해자들을 25년 넘게 상담했다고 한다. 자신의 전문 분야에 관한 책을 쓰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겠다. 그러나 미국의 2001년 9·11 테러가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고 한다. 늘 긍정적이고 자신감 넘쳤던 동료가 상상을 초월하는 대재앙 앞에 의기소침해져 내뱉은 다음과 같은 발언이 결정적이었다.

“가끔 나는 궁금해져. 우린 왜 양심을 가지고 있는 걸까? 양심 때문에 질 게 뻔한데….” (34쪽)

요컨대 자살 테러 공격을 감행한 테러리스트는 양심 없고 잔혹한 소시오패스, 그들에게 항상 당하는 건 양심이라는 게 있는 우리, 그렇다면 양심이 무슨 필요란 말인가. 이런 인식이다. 그래서 책은 단순히 소시오패스를 적발·퇴치하자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전체 분량의 3분의 1가량을 ‘양심 찬양’에 할애했다. 이기적인 유전자와 비교하면 생명의 유지·존속에 전혀 도움 되지 않을 텐데도 양심 유전자가 인간에게 탑재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화론의 논의를 살피고(9장 ‘양심은 어디에서 왔는가’), 무양심 소시오패스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 같아도 결국 승리하는 건 양심, 이런 정신 승리 같은 주장도 편다(10장 ‘왜 양심이 더 훌륭한가’). 마지막 12장(‘가장 순수한 양심’)은 티베트 불교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까지 등장시켜 종교적이고 우화적인 양심 예찬론으로 맺는다.

이런 전개 구조 혹은 여정의 첫 단계는 역시 식별. 그런데 소시오패스가 생각보다 미끌미끌한 개념이라는 게 문제다. 실제로 국내 정신과 전문의, 범죄심리학 전문가에게 확인해 보면 소시오패스는 공인된 의학 용어는 아니다. 의학계에서는 사이코패스조차 정식 의학 용어로 인정하지 않는다(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정석훈 교수). 두 용어 대신 앞서 언급한 반사회적 인격장애라는 용어를 쓴다. 진단 과정 자체도 산수처럼 딱 떨어지는 게 아닌 모양이다. 미국정신의학협의회(APA)에서 만든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DSM-5)』에서 규정한 7가지 특징 가운데 3가지 이상을 가졌을 때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의심한다. 저자 마사 스타우트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자가 전 인구의 4%, 25명당 1명꼴로 존재한다고 책에 소개했다. 범죄심리학에서는 이 비율에 동의하는 듯하지만 아산병원 정석훈 교수는 “특정 지역의 조사 결과일 뿐”이라고 했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전체 인구를 조사할 수는 없었을 테니 당연한 말이다. 자신의 전남편을 끔찍하게 살해한 고유정은 역대 최악의 소시오패스, 미국 실리콘 밸리 CEO들의 몇 퍼센트가 소시오패스, 이런 통설들도 섣부르거나 엄밀한 의학적 관점에서는 맞지 않는 얘기라는 것이다.

노련한 저자는 이런 곳에서 무리수를 두지는 않는다. 소시오패스·사이코패스에는 여러 개념이 뒤섞여 있어 논쟁의 소지가 많다며, 명확하게 정의해야 하는 부담을 슬쩍 피한다. 책에서 소시오패스와 사이코패스를 구분하지 않고 혼용해 논의를 단순화했다. 상담 경험을 살린 다큐라고 생각하니 어떤 소설보다도 박진감 넘치게 읽히는 게 책의 미덕 중 하나다. 소시오패스 실제 사례를 풍부하게 소개해(물론 개인 신상 정보를 모두 변경해 누군지 알아볼 수 없게 했다고 한다) 책의 흡인력을, 기자의 독서 경험에 비춰,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인구의 4%인 소시오패스, 양심이 있는 96% 정상인 사이의 선악 구도가 너무 뚜렷해 불편하고, 그래서 책의 모든 내용을 오류없는 의학 지식으로 받아들이기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지만(이런 점이 심리학 대중서의 한계일 수 있겠다) 소시오패스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악의 심연 또 그 반대편의 선의 뿌리에 대한 철학적·과학적 논의를 간결하게 소개해 읽을거리가 풍부하다.

저자에 따르면 소시오패스는 카리스마 있는 매력 덩어리인 경우가 많다. 속은 괴물이지만. 그런 사람이 겉으로 선량함을 가장할 때 멀쩡한 보통 사람은 어차피 속을 가능성이 크겠지만 양심을 갖춘 96%의 모질지 못함도 문제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누구에게나 보통 때는 잘 드러나지 않는 어두운 면이 있다는 식으로 온정적으로 대하다 당한다는 얘기다. 그림자 이론이다. 일상에서의 소시오패스 대처법으로 소개한 13가지 중에는(250~258쪽) 피하는 게 가장 좋고 어떤 종류의 접촉이나 연락도 거부해야 한다는 항목도 있다.

책은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다. 2008년 『당신 옆의 소시오패스』(산눈)로 출간됐다. 당시 때를 잘못 만났다는 판단한 사계절 출판사가 번역을 새로 해 재출간했다. 마사 스타우트는 후속작 『Out smarting the Sociopath Next Door』를 지난 4월 출간했다. ‘이웃집 소시오패스 따돌리기’쯤 된다. 내용이 짐작된다. 사계절은 이 책도 출간한다.

신준봉 전문기자 infor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