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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갱년기 불면증을 이기는 나만의 방법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히데코의 음식이 삶이다(6)

요즘 새벽 2~3시에 부엌에 들어서는 일이 잦아졌다. 냉장고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는 재료들을 사부작사부작 꺼내서는 한 시간 정도 마음 가는 대로 만들어본다. 몇 시간 뒤 먹을 아침밥일 때도 있고, 과일 콤포트나 처트니, 조림이나 절임 등 평소에는 시간이 없어 만들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게 꽤 즐겁다. 부엌 천장 조명은 켜지 않고, 플로어 스탠드의 주황색 불만 켜둔다. 나는 번쩍번쩍 밝은 조명보다 간접 조명 아래서 차분해지는 사람이라 저녁에 어둑한 부엌에서 감자 껍질 등을 벗기느라 온 신경을 집중했을 때, 친절하게 ‘탁’ 하고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켜는 남편이 얄밉게 느껴진다. 하지만 새벽에는 그럴 걱정이 없다.

요컨대 나도 불면증에 걸리고 만 것 같다. TV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엄마가 한밤중에 잠들지 못하고, 홀로 소파에 앉아 부채를 팔랑팔랑 부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때는 그게 오십 대가 되면 생기는 갱년기 증상이라는 것을 몰랐다.

이게 바로 그 불면증이란 녀석인가. 처음 증상이 나타났을 때는 다음 날 일에 지장이 생길까 봐 걱정되어, 잠이 오지 않는데도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 잠이 오길 기다렸다. [사진 Pxhere]

이게 바로 그 불면증이란 녀석인가. 처음 증상이 나타났을 때는 다음 날 일에 지장이 생길까 봐 걱정되어, 잠이 오지 않는데도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 잠이 오길 기다렸다. [사진 Pxhere]

사십 대 때, 매년 받는 건강 검진에서 ‘심각한 빈혈입니다. 철결핍성 빈혈이라 치료가 필요합니다’라는 말을 들었고, 그 원인이 자궁근종과 자궁내막증에 의한 과다월경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귀도 뚫어본 적 없던지라 배에 구멍을 내거나 자궁 적출 수술로 내 자궁을 들어내야 하는 것에 큰 저항감을 느꼈다. 대학병원 산부인과에서 검사를 받은 뒤, 사십 대 후반의 남자 의사에게 ‘이제 출산할 일도 없으니까 깔끔하게 적출하세요. 나온 배도 들어가고, 빈혈도 나으니까 인생도 밝아질 거예요’라는 무신경한 설명을 듣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나는 화가 나면 구사할 수 있는 외국어의 어떤 말이든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다.

“선생님, 만약 남자 성기를 적출하면 어떤 기분인가요?”
“아, 음경은 여성의 질에 해당하므로 얘기가 다릅니다. 자궁은 출산이 끝나면 크게 필요 없으니까요.”

더욱더 화가 났지만 여우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수술은 조금 더 생각해보자며 진찰실을 나왔다. 결국 15년 넘게 다니고 있는 한의원 원장께 소개를 받아, 다른 대학병원의 사십 대 여자 의사를 찾아갔다. 그녀도 전형적인 대학병원 의사에게서 볼 수 있는 쌀쌀맞은 이미지였으나, 말투는 아주 부드러웠다.

“자궁 적출 수술은 원치 않는다면 약으로 폐경 시기를 당기죠. 연령으로 봤을 때 폐경 시기니까요.”

의사는 늘 하던 부인과 검사를 마치자 그렇게 말했다. 그 약은 인위적으로 폐경 후의 호르몬 상태와 비슷하게 만드는 치료법으로, 아랫배에 두꺼운 주삿바늘을 푹 찌른다. 그렇게 하면 폐경과 엇비슷한 수준으로 여성 호르몬(에스트로겐)이 줄어, 월경이 멈추는 동시에 자궁 내막증의 병변이 위축되기 시작한다. 당시 내 건강과 체형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요리교실 수강생들이 왜 그렇게 배가 나왔냐며 놀랄 만큼, 아랫배는 근종과 내막증으로 튀어나올 듯 부푼 상태였다. 그렇게 불룩했던 아랫배도 주사를 맞고 나서는 이상할 정도로 쑥 들어갔다.

“단, GnRH 아고니스트(위폐경요법)는 골다공증 위험이 있어서 소량의 에스트로겐 제약을 복용하셔야 해요. 매일 밤 자기 전에 하나씩 드세요. 3개월 후에 재검진받으러 오시고요.”

골다공증이라니. 그러니까 넘어지면 바로 뼈가 부러지거나 하는, 그 병이라니. 내 뼈가 너덜너덜해지다니. 비타민약이고 한방약이고 꾸준히 복용하는 법이 없는 칠칠치 못한 나지만, 그날 밤부터는 대학병원 근처 약국에서 처음 처방받은 에스트로겐제를 꼬박꼬박 챙겨 먹으려고 노력했다. 마침 요리교실 겨울방학과 엄청난 속도로 퍼지던 코로나가 겹치던 시기였다. 수업이 없어 몸을 움직이지 못한 탓인지 날이 갈수록 뒤룩뒤룩 살이 찌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애써 들어간 배가 다시, 나왔다. 얼굴도 붓기 시작했다. 늘 임신 8개월 상태로, 위가 압박받는 느낌이었다. 자궁에 문제가 없었다면 내 몸에 아무 일도 안 일어나지 않았을까. 6개월 동안은 GnRH 아고니스트 부작용에 의한 갱년기 증상과 그것을 완화하는 에스트로겐 복용으로, 코로나 걱정보다 골다공증과 유방암에 대한 불안과 내 몸의 변화에 당혹스러워하며 농락당한 기분이다.

“선생님, 얼굴에 뭐 넣었어요? 얼굴이 동글동글해졌네.”

또다시 수강생들. 최근 신간 요리책이 출간되어 몇몇 매체에 내 얼굴이 노출됐다. 코로나 여파로 요리교실을 쉬면서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유튜브 채널까지 개설해, 점점 내 얼굴이 자주 드러나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찐 게 분명하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얼굴이나 손이 실은 약 때문에 부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오랜 시간 알고 지낸 한의원 원장의 한마디 덕분이었다. 일단 에스트로겐 복용을 중단했다. 그랬더니 소위 말하는 갱년기 증상이 나날이 심해졌다. 홍조, 열감부터 머리에 열이 오르는 증상까지. 불안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골다공증은 십 년 후쯤부터 나타난다고 적혀 있었다. 한밤중엔 온몸에 열이 올라 목과 등에 땀이 배어 나오기도 한다. 더운 것이 아니라 뜨겁다. ‘아아, 왜 이렇게 뜨겁지’ 하며 꿈속에서 낑낑거리다 눈이 떠진다. 시계를 보면 누운 지 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땀을 닦고 다시 자려고 노력하지만 좀처럼 잠들지 못한다. 어쩌다 잠이 들어도 다시 깨고 만다.

불면증의 특효약이 나에겐 요리라니, 어쩌면 요리사가 내 천직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요리가 일이고, 취미고,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다. [사진 Pixabay]

불면증의 특효약이 나에겐 요리라니, 어쩌면 요리사가 내 천직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요리가 일이고, 취미고,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다. [사진 Pixabay]

이게 바로 그 불면증이란 녀석인가. 처음 증상이 나타났을 때는 다음 날 일에 지장이 생길까 봐 걱정되어, 잠이 오지 않는데도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 잠이 오길 기다렸다. ‘아아아, 잠이 온다, 잠이 온다’ 싶을 때쯤 다시, 슬그머니 등에 땀이 배어 나와 뜨겁다. 눈이 떠진다. 창에는 동틀 녘의 하얀 빛이 들어온다. 다음 날 일어나면 기력을 짜내 일을 해치우지만, 원고를 쓰는 일 같은 것은 도저히 할 수가 없다. 그런 날이 이어져 수면 부족으로 온몸에 피로가 쌓인 밤에는 그럭저럭 푹 잔다. 호르몬제로 인한 갱년기 증상인지, 정말 갱년기를 맞은 건지 어쨌든 이대로는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아 주변의 동년배나 수강생들에게 물어봤다.

“어차피 못 자니까 깨어 있어요.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그렇구나. 자려고 하지 않으면 된다. 그날 밤, 역시나 한밤중에 열감 때문에 깨버려서 에잇, 하며 침대를 벗어났다. 책을 읽거나 휴대전화를 보고 있으면 정신이 피로해져서, 내 경우에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모처럼 한밤중에 깨어 있으니 마감 기한을 넘긴 원고라도 쓸까 싶어 책상 앞에 앉았는데, 머리가 그렇게까지 맑은 상태는 아니다. 그렇지, 부엌이다. 부엌으로 이어지는 작은 공간의 방에 놓인 플로어 스탠드를 켜고 냉장고를 열었다. 전날 수업에서 죽순을 사용한 요리를 가르쳤는데, 삶아둔 죽순이 두 개 있었다. 초여름에 채취한 지리산의 길쭉한 죽순은 봄에 채취한 것보다 부드럽고 달다. 일본에서 죽순은 봄날 제철 식재료로 밥, 국, 조림, 구이 등 다양한 조리 방법을 통해 즐겨 먹는다.

몇 시간 뒤에 일어나 출근할 남편의 아침이라도 차려보자. 죽순밥과 죽순긴피라(*채 썬 야채를 볶아 설탕, 미림, 간장 등으로 맛을 낸 일본식 야채 조림), 여기에 된장국과 달걀프라이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새벽 3시, 외부 소음도 들리지 않는다. 쥐 죽은 듯 조용한 부엌에서 쌀부터 씻는다. 그러고 나서 도마와 칼을 꺼내, 죽순을 긴피라용과 밥용으로 나눠 잘라둔다. 된장국은 말린 멸치로 육수를 내고, 냉장고에 있던 숙주와 햇양파를 넣어 끓인다. 일 년 전 집에서 담근 일본 된장 두 큰술을 넣는다. 토기 냄비에 씻은 쌀과 죽순, 다시마, 조미료를 넣고 가스레인지에 올린다. 한쪽에는 프라이팬을 올려 죽순을 볶는다. 술, 간장, 미림으로 조리길 1분. 순식간에 완성되는 반찬이다. 다음으로 밥을 짓기만 하면 눈 깜짝할 새에 아침밥 준비 완료. 달걀프라이는 남편이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할 때 만들면 된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새벽 3시 40분이었다. 잠이 오려나, 불안해하며 침대로 돌아갔다. 몇 시간 후 눈을 떠보니 남편은 죽순밥, 죽순긴피라, 된장국만 먹고 출근한 뒤였다. 그랬다. 불과 네 시간이었지만, 푹 잠들었다.

갱년기라는 것은 여성의 일생에서 중요한 마디다. 나이 먹어 간다는 것이 불행하고 슬픈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모색하기 위한 시간. 남편도 아들도,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뭐죠?”

밤에 잠들지 못해 앞서 말한 한의원 원장님을 찾아갔을 때, 그녀는 침을 푹 찌르며 나에게 물었다. 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라. 그때는 몰랐다. 침을 맞으면서 내 취미는 뭘까 계속 생각해봤다. 그렇지. 죽순을 삶아 요리에 따라 나눠 자르고, 된장국 육수를 맛있게 낼 때 나는 정말 즐겁다. 일도 취미도 같다는 말을 들으면 ‘그건 아니지 않나’ 의아해했지만, 불면증의 특효약이 나에겐 요리라니, 어쩌면 요리사가 내 천직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요리가 일이고, 취미고,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다.

죽순 킨피라 레시피

죽순 킨피라. [사진 히데코]

죽순 킨피라. [사진 히데코]


재료
삶은 죽순 200g, 산초잎
식용유
양념: 진간장 1큰술, 설탕 1/2큰술, 미림 1/2큰술, 소금

만들기
1. 죽순 중간에서 아랫부분을 곁 반대로 3x1cm로 먹기 좋게 자른다.
2. 팬에 식용유를 달군 다음 중간불로 2분 정도 죽순을 볶는다. 양념 재료를 넣고 처음에 강불로, 그리고 국물이 없어질 때까지 조린다.

키친 크리에이터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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