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미뉴 강 다리에 그어 놓은 국경 밟고 스페인으로

중앙일보

입력 2020.06.26 13:00

[더,오래]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45)

도보순례 25일차, 발렌사(Valenca) - 포리뇨(O Porrino) 21.2km

바지가 없어졌다. 빨아 널은 내 바지는 사라지고, 엉뚱한 바지 하나가 남아있었다. 한쪽 가랑이에 내 다리 두 개쯤은 넣을 수 있을 만큼 엄청 커다랗고 넓게 늘어난 바지. 누군지 이 바지 주인이 내 바지를 입고 갔다는 얘기인데 그 남자 혹은 그 여자는 어떻게 이렇게 큰 치수의 바지와 내 것을 헷갈릴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같은 색깔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지난밤 포르투갈을 떠나기가 아쉽다며 알베르게에 함께 있던 사람들 모두 술을 좀 과하게 마시긴 했다. 발렌사는 스페인 뚜이(Tui)와 미뉴(Minho)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강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 중간지점에서 국경이 나뉜다. 국경도시 발렌사의 요새는 13세기에 처음 세워졌다. 고딕과 바로크 양식이 혼합된 형태의 성벽이 아직 견고하다. 스페인을 향해 미뉴 강 쪽으로 대포를 겨누고 있는 발렌사 요새는 이제 인기 있는 관광지다. 사람들은 미뉴 강 다리 국경을 밟으며 인증샷을 찍고 와인을 마시기 위해 건너와 요새를 점령한다.

고딕과 바로크 양식의 요새로 들어가는 게이트. [사진 박재희]

고딕과 바로크 양식의 요새로 들어가는 게이트. [사진 박재희]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국경 역할을 하는 미뉴강. 스페인 뚜이 성이 보인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국경 역할을 하는 미뉴강. 스페인 뚜이 성이 보인다.

순례자들도 어제 부드러운 조명에 싸인 요새에서 포르투갈을 떠나는 기념으로 와인 세례를 받았다. 누군지 그 사람 역시 숙취로 몽롱한 아침을 맞았을 테고 비몽사몽 간에 내 바지를 걷었을 것이다. 밤새 그의 바지가 쫄쫄이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하며 입고 갔을까? 돌아오지 않은 걸 보면 아직 바지가 바뀐 걸 모르는 걸까. 쫄쫄이바지를 입었을 덩치 큰 사람을 상상하니 웃음이 났다. 까미노에서 순례자에게는 모름지기 ‘불평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 자루 같은 옷에 나를 넣고 허리를 옷핀으로 고정했다. 몸이 불고 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큰 옷을 입는 어색한 기쁨을 즐기기로 했다. 커다란 바짓가랑이가 휘적거렸지만 걷다 보면 편해질 것이다.

미뉴 강 다리에 소심하게 혹은 무심하게 표시된 국경을 넘었다. 뒤꿈치 통증이 가라앉지 않아 뚜이에서 쉴까 했지만 걷기에 딱 좋은, 더 좋기 힘든 날씨를 맞았으니 휴식은 반납이다. 햇살과 바람이 구름으로 하늘 장면전환 쇼를 펼치는 것을 보면서 평소보다 무릎이 반 뼘씩 높이 올라갔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내일부터 비다. 포르투갈에서는 지난 37일간 비 한 방울 맞지 않았는데 스페인에 입성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비 소식이다. 내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것, 오늘의 할 일은 갈리시아의 환상적인 까미노를 즐기는 것이다. 아늑하고 시원한 숲속, 폭신한 흙길, 온몸 가득 습기를 머금은 풀이 누운 흙은 부드러웠다. 내일부터 비가 온다면 곧바로 질퍽 찐득거리는 벌이 될 것이지만 오늘은 축복의 길이다.

“다 맛있을 것 같아요. 결정하기가 너무 어렵네요.” 포르투갈을 떠나기 아쉽다고 눈물을 찔끔거렸던 내가 맞나? 갈리시아의 음식을 앞에 두니 스페인 찬양이 나온다. 결정할 수 없을 때는 둘 다 시키라는 매우 현명한 주인장의 조언대로 2.5인분을 시켜서 접시를 깨끗이 비우는 신공을 발휘했다. 이게 모두 바지 때문이다. 자리에 눕기 거북할 만큼 많이 먹었는데도 바지는 자꾸 흘러내렸으니까.

미뉴강을 국경으로 둔 언덕에 남아있는 대포로 요새였음을 알 수 있다.

미뉴강을 국경으로 둔 언덕에 남아있는 대포로 요새였음을 알 수 있다.

스페인 갈리시아의 깊고 아름다운 숲이 이어지는 까미노.

스페인 갈리시아의 깊고 아름다운 숲이 이어지는 까미노.

도보순례 26일차 포리뇨(O Porrino) – 레돈델라(Redondela) 15.5km

“비가 잦아들면 출발할 거니까 너 먼저 가.”
늦장을 피울 생각이었는데 마리(Marie)는 나를 기다리겠다고 한다. 체코 출신 런던 유학생 마리는 쿨하다고 해야 하나 시니컬이라고 해야 하나 그 경계선에 있었다. 딱히 호감형이라고 할 수 없는 태도를 일관하던 마리가 발렌사의 와인 세례 이후 친밀하게 굴었다.

“그날 네가 술을 마신 모습이 너무 재밌고 귀여웠어.”
이 말은 내가 어떤 실수 혹은 바보짓을 했다는 뜻이다. 마리는 자세한 얘기 없이 웃기만 했고 나도 불안해서 더는 묻지 않았다. 다만, 까칠 신랄한 마리가 그냥 웃을 정도면 나쁜 실수라기보다는 푼수 짓이 아닌가 싶었고 마리는 덜떨어진 사람에게 애정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마리와 함께 비를 맞으며 도시를 빠져나와 한참을 걸었을 때 카페가 나타났다. 커피를 마시려고 카페에 들어가서 알았다. 막판에 허둥대다가 마리가 좋아하는 덜렁이 짓을 한 번 더 했다는 것을. 비에 젖지 않게 깊숙이 넣으려고 따로 빼 둔 여권과 순례자 패스포트, 지갑이 없었다. 나오기 직전에 손을 씻었는데 얌전하게 세면대에 놓고 나온 것이 틀림없었다.

자동 잠금장치로 폐쇄되는 포리뇨의 알베르게 앞 순례자 상징.

자동 잠금장치로 폐쇄되는 포리뇨의 알베르게 앞 순례자 상징.

마리에게 기다리지 말라고 한 후 빛의 속도로 뛰어 돌아갔지만 알베르에게는 이미 닫혀있었다. 마지막으로 나오는 사람이 강제 자동잠김 장치를 누르게 되어있는 구조다. 오후 3시 관리자가 오기 전까지 들어갈 수 없다. 오후 세 시! 여섯 시간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어 알베르게 앞에 있는 건물로 무작정 뛰어들어갔다. 같은 구역의 건물이니까 담당자 연락처라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도움이 필요해요. 지갑, 여권, 애플워치를 저 안에 두고 왔어요. 비상 전화번호 알고 있나요?”
헐레벌떡 빌딩 사무실로 들어가 나는 손짓 발짓으로 절박함을 표현했다.
사무실에서 나를 바라보던 뿔테 안경 청년이 다가와 내게 물었다.
“어쩌고 저쩌고가 어쩌고 그래서 저쩌고라는 겁니까?”
대충 이렇게 해석되는 스페인어였다. 그는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반복했고 나는 여권, 지갑, 애플워치. 긴급 전화번호라는 말을 반복했다. 뿔테 안경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뭐라고 다시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인 것 같다. 그는 눈을 더 크게 뜨고 빌딩을 가리키며 물었다.

“인사이드? 인사이드(Inside)?”
‘그렇다니까. 안에 두고 나왔으니 문제지 밖에 있으면 뭐가 문제야?’ 난 그렇다고 했다.

순간 그의 표정이 결연해지더니 전화기를 들었다. 드디어 그가 상황을 이해하고 관리자에게 전화하는 모양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삐보~ 삐보~ 삐보~’ 경찰 사이렌이 울린다. ‘경찰출동 사이렌 소리는 어디나 다 비슷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찰라 경찰차가 건물 앞에 섰다. ‘띠이… 뿌이뿌이’ 확성기를 켜는 소리가 들리더니 경찰차 문 네 짝이 동시에 활짝 열렸다.

범죄영화에서 보면 조폭이나 경찰이 차 문을 그렇게 열던데 정말 실제로도 그랬다. 그런데 앗, 뭐지? 차에서 내린 정복 경찰들이 나를 노려보며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무전기를 들고 있는 사람은 알베르게 빌딩으로 뛰어가며 뭐라고 소리쳤고 세 사람이 다가와 나를 둘러쌌다. 세 명 중 가장 풍성한 눈썹을 가진 경찰이 내 눈을 보며 말했다. 또박또박 천천히 스페인어로. 아무리 천천히 말한다고 해도 모르는 스페인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다. 다만 지금 내가 무언가 심상찮은 상황에 놓인 것만은 분명했다. (계속)

기업인·여행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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