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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문화 되돌아보기

중앙일보

입력

병원을 떠나며 지난 시간을 정리해 본다.
2년간 해외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1996년 7월 출산준비교육을 처음 시작한 곳, 은혜산부인과. 작지만 가족의 소중함과 친근감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그후 1998년 12월부터 이곳은 나의 일터가 되었다. 함께 하는 따뜻함과 생명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곳, 축제의 시간으로 모두를 초대하고 싶었다.

출산 후 가장 먼저 주어지는 과제는 모유수유이다. 적극적으로 임하는 산모가 있는 반면 마지못해 수용하는 산모들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은혜산부인과에서 자체적으로 모유수유율을 조사한 적이 있다. 나름대로 교육과 시범을 보이며 모유수유율이 높아지기를 기대해 보았다. 결과적으로 6개월 후 모유수유를 하고 있는 엄마는 45%(혼합수유 포함), 기대에는 다소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한국인의 교육열이나 지식 수준 경제력 시간적 여유가 모유수유에는 긍정적인 조건이 아닌 것 같다.

환경 공해문제가 심각하다는 데는 모두가 인식을 같이 한다. 산부인과에서 가장 많이 배출되는 쓰레기는 일회용 기저귀일 것이다.
단지 편하다는 것 말고는 사용할 이유가 없다. 교육을 통하여 왜 천 기저귀가 아기와 환경에 좋은지 설명하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병원장과 세탁 담당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병원에서도 천 기저귀를 사용하였다. 병원에서의 천 기저귀 사용은 모두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퇴원 후 대다수의 산모들은 곧 일회용 기저귀를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적어도 생명을 키우며 미래를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행위가 미래에 어떤 영향을 가져올지 고려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병원에서 사라지는 천 기저귀들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인지.. 1년 6개월 뒤 병원에서는 더 이상 천 기저귀를 구입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1999년 7월 은혜산부인과 관심사는 수중분만이었다. SBS방송국에서 방영된 생명의 기적이란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수중분만에 대한 video tape하나가 병원으로 왔다. 우리는 즉시 관심을 갖고 수중분만의 현실성에 대해 토론했다. 과연 안전한 방법인가? 산모들이 수용할 수 있는 방법인가? 시설 투자는 부담이 되지 않는가? 등등 인터넷을 통하여 자료를 더 수집하고 수중분만에 대한 서적( water birth, gentle birth choices)도 외국에서 구입하여 읽었다. 국내에 있는 또 다른 수중분만에 대한 video tape을 수소문해 보면서 일단 시도 해보기로 했다. 이유는 자연분만을 도와주며 모자관계 형성에도 기여 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8월에는 구체적인 시도로 욕조를 구하기 위해 을지로와 논현동을 돌아다녔다. 결과적으로 적당한 크기와 깊이의 욕조를 구하는데는 실패했다. 한편 병원 내에서는 산모들을 대상으로 수중분만의 장점을 설명하며 신청자를 찾았다. 드디어 9월7일 임시로 준비한 물놀이용 튜브에서 용감한 한국의 수중분만 1호 아기가 태어났다. 처음으로 아기가 산모의 질을 빠져 나와 물 속에서 건져 올려질 때 그 신비로움과 감동이란...

10월 초 수중분만을 위해 일본으로 날아갔다. 본격적으로 수중분만을 시행하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그 무엇인가가 더 있을 것 같았다. 흔히 걱정하는 감염에 대하여, 또 다른 위험요소에 대하여, 또는 다른 방법론에 대하여서도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서였다.(이렇게 수중분만에 대하여 자세히 다루는 것은 그 동안 은혜산부인과를 견학하고 문의를 하면서도 확신이 서지 않아 수중분만을 시행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의료인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이다.)

일본에서 첫 방문지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수중분만을 했다는 작고 허름한 산부인과였다. 할아버지 원장과 두 분의 조산사를 만났다. 분만실에는 둥근 모양의 작은 이동식 분만욕조가 설치되어 있었다. 80년대 말 한 산모가 영국에서 직접 구입하여 처음으로 사용한 후 그 병원에서 구입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물을 넣을 때는 비닐 cover을 사용하고 사용 후에는 EO gas소독을 하여 재사용하고 있었다.(후에 은혜산부인과에서 비닐 커버를 소독 후 재사용을 하는 방법을 고려 해봤는데 비닐의 수명이 이를 용납하지 않는 듯..참고로 일본에서 본 것은 영국제, 은혜산부인과에서 구입한 것은 미국제임).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생명의 기적에서도 소개된 미라이 조산원, 하룻밤을 머물며 그곳의 산모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을 가졌다. 마침 둘째 아기를 수중분만하기 위해 온 산모를 만났다. 그녀는 농수산부 산하 연구원이고 첫째 아기도 그곳에서 낳았다고 했다.

그녀가 조산원을 선택한 이유로 첫째, 의사들은 자신의 기술이나 기계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이곳 조산사는 산모와 아기의 능력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 둘째 병원에서는 병원규칙이 우선하지만 조산원은 산모의 자율성을 인정해 준다는 것, 셋째 이 곳 환경이 주는 편안함을 들었다.
저녁 식탁에서는 다른 산모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데 아기들은 보이지 않았다. 산모들에게 아기를 혼자 두어서 걱정되지 않는가 라는 질문에 아기는 모두 모유를 먹고 안전한 자세로 누워 있다. 설령 울더라도 아기가 우는 동안 혈액순환이 좋아지고 울고 난 뒤에는 젖을 더 잘 빨아 잠을 잘 잔다. 우는 것은 아기의 직업일 수도 있기 때문에 식사 시간동안 우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대답하는 모습에서 자신감을 볼 수 있었다.

미라이 조산원에 설치된 욕조는 평범한 가정용 욕조였으며 한국의 욕조에 비해 깊이가 약간 더 깊었다. 그 뒤 다른 조산원에서 본 욕조도 큰 차이는 없었다. 일반 수돗물을 사용하고 있는 일본은 물의 안전성에 대한 믿음을 누구나 갖고 있었다. 한국에서 최정원씨의 수중분만 장면을 본 많은 시청자들로부터 물에 대한 질문을 받고 있는데 한국의 수돗물에 대한 불신이 이렇게 심각한 줄이야...어쩌면 SBS방송국에서 수돗물을 목욕물로 사용하기에도 부적절하다는 불신감을 조장했는지도 모르겠다. 수돗물은 소독된 물, 생수는 소독제가 없는 물이라고 볼 때 감염의 위험을 줄일 수 있는 물은 수돗물이 아닐까? 라는 생각에서 나는 앞으로도 수중분만 시 수돗물을 계속 권할 용의가 있다. 일본 조산원에서는 30% -50% 산모가 수중분만을 선택하고 있었다. 수중분만에 대한 두려움도 거부반응도 없다는 일본인들은 대중목욕 문화의 영향일 수도 있다고 했다.

수중분만을 지켜본 조산사들은 생명이 만들어내는 기적과 감동의 현장으로 출산을 경험한다. 아기는 편안했던 자궁을 뒤로하고 진통이라는 고통의 터널을 지나 미끄러지듯 물 속으로 나와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킨 후 가족의 환호 속에서 어머니의 품에 안겨 첫 숨을 쉰다. 이런 모습은 지금까지 조산사들이 흔히 병원에서 경험했던 출산이 주는 긴장감과 의료인의 일로서의 출산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왔다.
흔히 전문지식과 첨단기계가 인간에게 좀더 많은 자유와 편안함과 풍요로움을 갖다 줄 거라는 믿음을 갖고 문명을 동경해 왔다. 좀 더 안전하고 편안한 분만을 추구하며 최첨단 시설과 학벌로 무장한 현대식 대형병원을 찾는 것은 문명인에게 주어진 특권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산전진찰을 위해 병원을 찾는 임부들은 시험을 치르듯 정해진 단계를 거쳐 의사와 몇 마디를 나누고 의사의 의견에 자신을 맡겨버린 후 어머니의 역할을 다했다는 듯 총총 떠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출산이란 인간의 역사와 함께 계속되고 있는 가장 자연적인 생리 현상이다. 자연 현상(출산)에 대한 현대의 지식이 자연(출산)의 모습을 어떻게 바꾸어 놓고 있는가? 최첨단 시설이 자연상태를 더 자연스럽게 표현해 낼 수 있을까?

잠시 동안이나마 작년에는 일본을, 지난달에는 미국의 조산원을 견학하며 출산문화를 한국과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미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은 의료가 상품화되어있는 대표적인 나라이다. 의료보장이 잘되어 있는 유럽국가보다는 조산사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있으나 미국과 일본에서는 조산사에 의한 분만이 5%정도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1%미만임). 짧은 시간과 언어의 문제 등으로 단편적인 모습과 이해의 한계 속에서 접한 임신과 출산의 문화이지만 한국과는 상당한 차이를 볼 수 있었다.

첫째, 미국과 일본 조산원에서의 자연분만 비용은 병원보다 더 높았다.
일본 미라이 조산원에서 만난 한 산모는 그 조산원의 출산비용이 타병원보다 더 비싸고 거리 상으로도 멀지만 조산원에서 누릴 수 있는 장점이 더 크기 때문에 조산원을 찾았다고 했다. 미국 LA에서 방문한 베버리 출산센터는 한인 교포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2명의 한인 산부인과 전문의와 2명의 미국인 조산사가 진료실을 각자 갖고 접수실, 분만실, 병실 등은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곳에서도 분만비용은 조산사에게 더 많이 지불하고 있었고 자연분만을 준비하는 산모들은 조산사를 더 선호하는 분위기였다.

둘째, 출산준비교육이 다양하고 일반화되어 있었다.
출산을 활발히 하는 의료기관이라면 어디에나 출산준비교육 프로그램이 있었다. 심지어 미국에는 출산준비교육만 전문으로 하는 소그룹 출산준비교실이 곳곳에 있었다. 산모들은 이런 교육을 통하여 얻은 정보를 기초로 자신만의 출산을 계획하고 있다. 수중분만이 미국에 도입된 계기도 이런 교육을 통해서였다. 캘리포니아에서 방문했던 조산원에서는 남편교육을 중요시하는 브래들리 법을 선호하는 반면 병원에서는 라마즈 법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동양적인 정서가 반영되어 임산부 요가, 소프롤로지 법과 함께 라마즈 교육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셋째, 모유수유를 위한 준비, 노력, 의지가 보편화되어 있었다.
산전에 모유수유에 대한 교육을 받고 출산 후에도 모유수유를 위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곳이 있어 쉽게 이용하고 있었다. 분만 직후부터 산모와 아기는 언제나 함께 있고 모유 수유를 위해 밤잠을 설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일본 조산사에게 모자 동실이어서 분만 후 산모가 아기 때문에 쉴 수 없다는 불평은 없는지 물어 봤을 때 그 조산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기에게 가장 좋은 음식을 신선한 상태로 줄 수 있다는 것은 어머니의 기쁨이며 그 결과는 산모에게 더 큰 휴식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또한 얼마나 길게 자는가 보다는 짧고 깊게 자는 것의 중요성을 덧붙였다. 미국에서는 입양한 아기에게도 모유를 먹이겠다는 의지로 모유 생성 유도기와 함께 빈 젖의 유두를 아기에게 물리고 수유(계속적으로 유두를 빨아주면 젖이 나오기 때문)를 하고 있는 여성이 있을 정도이다. 두 나라 모두 6개월 이상 모유 수유율이 70% 이상이라는 결과는 이런 노력과 의지의 성과이다. 반면 한국여성의 대부분은 출산준비물로 우유병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는 언제든지 인공 영양을 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전 세계에서 최하의 모유 수유율을(15%이하) 보유하고 있는 한국의 어머니들은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는 것이 문제 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출산은 의료인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임산부 자신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출산 주체에 대한 인식을 들 수 있다.
출산을 잘 하는 유명한 의사나 병원은 없다. 100% 완벽한 출산법도 없다. 출산이란 저절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때 가장 건강하다 할 수 있다. 좋은 의료는 산모와 가족의 의견을 존중하고, 산모의 생리적 활동을 신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긍정적인 자세로 함께 기다려 줄 수 있는 사람(의료인)과 편안한 장소(의료기관)인 것이다. 전세계에서 최고의 높은 제왕절개율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에서는 산모의 생리적 기능이 비정상적이 되도록 만드는 그 요인을 찾고 제거해야 하는 숙제를 갖고 있다. 그 요인 중 하나는 의료인에 대한 지나친 의존심은 아닐까? 의료인을 찾는 목적이 자기관리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함이 되어야지 자신을 타인에게 맡겨 버림으로 자신의 능력마저도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이는 현대의료가 만들어낸 위험한 역작용이라 할 수 있다.

2000년도를 맞이하여 한국의 출산문화에도 많은 변화가 일고 있다. 이 변화가 남을 따라가는 모습이 아닌 준비된 부모의 고민과 노력의 결과이기를 기대해 본다.

임신과 출산은 늘 아기와 함께 하는 과정이다. 아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머니를 믿고 그대로 배우고 닮아간다. 아기의 운명은 어머니에게 달려 있고 그 어머니는 남편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 이렇게 아기는 가족에 의하여 가족의 일원으로 가족역사의 주인공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 아기만의 개성을 찾는 것, 품위를 높이는 것, 생명력을 활성화시키는 것 이 모두가 태내 이전 부모님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다.

이제 생명을 잉태한 몸 공부를 먼저 하자. 그리고 구체적인 출산계획을 세워보자. 필요하다면 의료인이나 의료기관을 활용할 수도 있고 가정분만을 계획할 수도 있다. 가족이 중심이 되어 가족이 함께 만들어내는 출산, 개성과 감동과 사랑으로 출산의 기적을 만들어 가길 바란다. 이 땅에 새로 태어나는 출산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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