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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새가 내 얼굴을 잘 안다오" 이언적 사색 꽃피운 곳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77)

추사 김정희가 쓴 옥산서원 글씨와 강당인 구인당. [사진 송의호]

추사 김정희가 쓴 옥산서원 글씨와 강당인 구인당. [사진 송의호]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서 서애 류성룡이 배출되었다면 경주 양동마을에서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 나왔다. 회재 선생 종가가 양동마을 무첨당(無忝堂)이다. 최근 무첨당에서 이지락(53) 종손을 만나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자취를 답사했다. 회재가 태어난 곳은 종가가 아닌 양동마을 서백당이다. 아버지 이번이 손소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 마을로 이주했다. 점차 번성해져 양동은 이후 손‧이 양 가문의 집성촌이 된다. 회재는 어려서 외숙이자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인 손중돈에게서 배웠다.

회재는 양동마을에서 태어났지만 사유하고 학문을 한 터전은 옥산(玉山)이란 곳이다. 양동에서 11㎞ 떨어진 위치다. 이곳에는 유네스코가 문화유산으로 등재한 회재를 기리는 옥산서원이 있다. 추사 김정희가 쓴 다소 투박해 보이는 ‘玉山書院’ 글씨가 인상적이다. 서원 강당 구인당(求仁堂) 앞에 서면 자옥산이 보인다. 서원을 안내한 종손은 “서원을 감싼 앞뒤 산이 자연의 울림을 만드는 공간”이라고 경관을 설명했다. 서원 바로 앞으로 옥산천이 흐른다. 계곡 너럭바위에는 퇴계 이황의 필적 ‘세심대(洗心臺)’가 새겨져 있다.

독락당 회재유물관에 보관돼 있는 퇴계 이황의 글씨.

독락당 회재유물관에 보관돼 있는 퇴계 이황의 글씨.

옥산천 건너편에 회재가 터전을 일군 독락당(獨樂堂, 보물 제413호)이 있다. 그는 40세에 사간원 사간으로 있을 당시 유배 간 김안로의 재등용을 두고 조정 의견이 갈렸을 때 ‘절대 불가’를 주장한다. 소인배라는 것이다. 회재는 그 주장으로 파직된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당시 손씨 터전이나 다름없는 양동을 벗어나 아버지가 지은 계정(溪亭)이 있던 옥산에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다. 자옥산 아래 독락당이다. 회재는 아름다운 자옥산과 계곡, 맑은 시내와 못을 사랑했다. 마음을 붙든 다섯 곳엔 세심대‧관어대 등 이름을 붙였다. 42세엔 옥산천 계곡에 수십 칸 집을 짓기 시작한다. 그러나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하고 독락당이라 이름 붙였다. 그는 독락당 앞뒤로 소나무와 대나무, 꽃을 심고 그 속에서 시를 읊고 낚시하며 세상일을 잊었다. 또 단정히 앉아 책을 읽고 사색을 즐겼다. 전원생활은 15수의 시(林居十五詠)로 남아 있다.

무리 떠나 홀로 사니 누구와 함께 시를 읊나/산새와 물고기가 내 얼굴을 잘 안다오/그 가운데 특별히 아름다운 정경은/두견새 울음 속에 달이 산을 엿볼 때지

15수 중 ‘독락(獨樂)’이라는 시다. 자연을 받아들인 한 인간의 희열이다. 회재는 전원에서 그동안 듣고도 깊이 이해하지 못한 것들이 비로소 환해졌다. 여기서 7년간 머물면서 학문은 훌쩍 깊어졌다. 회재는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닦는다.

자연을 끌어들인 설계가 돋보이는 경주 독락당의 계정.

자연을 끌어들인 설계가 돋보이는 경주 독락당의 계정.

독락당에 들렀다. 이해철(71) 주손이 뜰에 있다가 독락당 뒤쪽 회재유물관의 문을 열었다. 『대학장구보유』 등 전적과 고문서, 경상도 관찰사 시절 유서통 등 각종 유물, 그리고 퇴계가 쓴 원조오잠(元朝五箴) 유묵 등이 진열돼 있었다. 보물만 146점이 된다. 회재 연구에 필요한 자료들이다.

회재유물관을 나와 독락당과 계정을 둘러보았다. 독락당은 담을 활용해 외부에는 폐쇄적이지만 계곡 쪽으로는 열려 있다. 담장 가운데 살창으로 떡갈나무 초록 잎이 보이고 옥산천 물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계정에 오르니 난간 아래가 바로 계곡이다. 정자의 반은 집 안쪽에 반은 계곡 쪽에 세워져 자연과 하나가 돼 있었다.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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