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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 호갱의 슬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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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전영선 기자 중앙일보 팀장
전영선 산업1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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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스타벅스 ‘서머레디백’ 대란에 대한 각계의 분석(이렇게 다양한 고품격 논의가 나올 줄이야)이 나왔지만, 핵심이 빠져있다. 바로 놀잇감을 빼앗긴 ‘호갱(호구+고객)의 슬픔’이다.

타고난 호갱이라 이건 확실히 안다. 레디백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는 호갱인데, 제품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다. 고작 이걸(1만원 미만이라는 게 업계 중론이다) 받겠다고 프리퀀시(일종의 도장)를 모으는 이 놀이의 재미는 과정에서 나온다. 목표라고 내세우기 민망한,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쓰면서 받는 순간 쓸모없어지는 굿즈(goods)를 향해 가는 길을 즐기는 것이다. 바보 같은 짓인지 잘 알기 때문에, 꽤 즐겁다.

호갱의 마음을 알면 음료 17잔을 마실 바에 온라인 쇼핑몰에 널려 있는 유사 레디백을 사라는 조언은 못 한다. “창피해서 들고 다닐 수는 있냐”는 말도 이해도가 떨어지는 참견이다. 이런 굿즈는 사실 누가 선물해줘도 전혀 반갑지 않다. 열풍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 분석에도 거부감이 든다. 그저 유치원의 ‘착한 일 스티커’ 받기처럼 시각화가 잘돼 있는 임무다. 적당히 쉽고, 핑계도 있고, 제법 그럴듯한 뿌듯함이 있다. 난제(스타벅스에서 제일 비싸고 맛없는 음료를 마셔야 한다)를 해결할 묘책을 찾아내거나, 식후 동료에게 프리퀀시 하나를 적선 받는 정도의 즐거운 일이 생긴다.

노트북을 열며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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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달성해 당당히 굿즈를 챙기는 순간 호갱 놀이, 그 기쁨의 정점에 오를 수 있다. 기쁨은 약 1~2시간 지속된다. 이후 굿즈는 그게 무엇이라고 한들, 집안 어느 구석에서 ‘예쁜 쓰레기’가 돼 간다. 한철 잘 논 호갱이 다음 놀잇감을 찾아 나설 때다.

레디백이 과하게 인기를 끌면서 이번 놀이는 초반부터 완전히 망쳤다. 호갱과 달리 이재에 밝은 ‘똑똑이’들이 다수 끼어들면서 불거진 일이다. 레디백을 구해 개당 몇만원을 남길 수 있다는 계산에 수백잔의 커피를 버리면서까지 싹쓸이해 간 한 업자의 등장이 결정타가 됐다. 비(非) 호갱의 참여는 레디백 미션 난이도를 쓸데없이 높였다.

호갱은 자신이 호갱임을 알지만, 과도한 관심이 쏠리는 것은 부담스러워 하는 특징도 갖고 있다. 중고상품 거래 플랫폼이나 온라인몰에서 레디백은 5만원대(인기가 좋은 핑크 레디백은 한때 16만원까지 갔다), 레디백을 받을 수 있는 프리퀀시 완성본은 3만원대로 떨어졌다. 여전히 레디백은 스타벅스 매장에 들어오기 무섭게 사라지지만, 열풍은 사실상 끝물이다. 어쩌면 매년 철마다 진행해 온 스타벅스코리아 굿즈 마케팅의 막다른 지점일 수도 있다.

전영선 산업1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