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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원에 속아 선상 노예된 11살 소년, 현실은 더 끔찍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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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개봉하는 영화 '부력'은 태국 불법 어선에서 공공연히 자행돼온 '현대판 노예제도' 현실을 파헤쳤다. 사진은 영화의 주인공 차크라(삼 행).[사진 영화사 그램]

25일 개봉하는 영화 '부력'은 태국 불법 어선에서 공공연히 자행돼온 '현대판 노예제도' 현실을 파헤쳤다. 사진은 영화의 주인공 차크라(삼 행).[사진 영화사 그램]

“저인망 어선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린 선상 노예 중엔 11살짜리도 있었어요. 영화에서 선장 역의 배우 ‘타나웃 카스로’도 실제 그 나이에 어선에 끌려가 2년간 노동 착취를 당했고 생생한 경험담을 들려줬죠. 대사 없는 단역, 엑스트라도 대부분 실제 선상 노예 경험자들이 출연했습니다.”

25일 개봉하는 영화 ‘부력’에서 ‘현대판 노예제도’로 악명 높은 태국의 불법 어업 실태를 고발한 호주 감독 로드 라스젠(39)이 본지에 e메일로 전한 얘기다.

25일 개봉 영화 '부력' 연출한 호주 감독 #태국어선 노예 생존자 증언 재구성해 #베를린국제영화제 에큐메니칼상 수상 #"영화는 인간 처한 현실 그리는 데 탁월, #동시대 감독으론 봉준호 빼놓을 수 없어"

노예들로부터 얻은 해산물 

촬영 현장에서 주연 배우 삼 행(왼쪽)과 로드 라스젠 감독. 라스젠 감독은 "1950~60년대 영화를 좋아하지만 동시대 감독 스티브 맥퀸, 대런 아로노프스키, 배리 젠킨스, 미카엘 하네케, 그리고 봉준호 감독도 빼놓을 수 없다"면서 "인간이 처한 현실을 그려내는 데 있어 영화는 탁월한 힘을 발휘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영화사 그램]

촬영 현장에서 주연 배우 삼 행(왼쪽)과 로드 라스젠 감독. 라스젠 감독은 "1950~60년대 영화를 좋아하지만 동시대 감독 스티브 맥퀸, 대런 아로노프스키, 배리 젠킨스, 미카엘 하네케, 그리고 봉준호 감독도 빼놓을 수 없다"면서 "인간이 처한 현실을 그려내는 데 있어 영화는 탁월한 힘을 발휘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영화사 그램]

영화는 캄보디아의 가난한 소년 차크라(삼 행)가 불법 어선에서 목숨 걸고 탈출하는 과정을 그렸다. 태국 공장에서 일하면 매달 8000바트(약 31만원)를 받는다는 말에 무작정 집을 나선 그는 중개인에게 속아 불법 어선에 끌려갔다가 혹독한 운명에 내몰린다. 하루 한두 시간 자며 노예처럼 일한 대가는 음식물 찌꺼기나 다름없는 식사뿐. 병들거나 저항하면 바다에 던져진다. 망망대해 한복판에선 살려달라는 비명도 공허하게 묻힐 뿐이다.

이는 실제 일부 해산물이 우리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어두운 발자취다. 태국 어선들의 불법 조업과 노예노동은 2016년 퓰리처상 공공부문을 수상한 AP통신 기사 ‘노예들로부터 얻은 해산물(Seafood from Slaves)’ 등의 언론 보도와 환경‧인권단체 조사로 알려진 바다.

호주 빅토리아예술대학 영화과 출신으로, 히말라야 유목민 소년에 관한 단편 ‘타우 세루’(2013)로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돼 주목받은 라스젠 감독은 당시 기사를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캄보디아와 태국을 찾아가 광범위한 취재를 통해 이번 영화 각본을 써나갔다. 이 장편 데뷔작으로 지난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에큐메니칼 심사위원상(인간 내면을 깊이 있게 탐구한 영화에 주는 상)을 차지했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끔찍했죠

“‘부력’에서 다룬 현대판 노예 이야기는 수십 년째 이어온 실제 사건입니다. NGO 단체 협조로 50여명의 생존자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번 영화를 만들며 가장 힘들었던 게 바로 그들을 만나 취재하는 일이었죠.”

폭압적인 선장 역의 배우 타나웃 카스로(오른쪽)는 실제 그 자신도 11살 때 불법 어선에서 2년간 노예 노동에 시달린 생존자다. [사진 영화사 그램]

폭압적인 선장 역의 배우 타나웃 카스로(오른쪽)는 실제 그 자신도 11살 때 불법 어선에서 2년간 노예 노동에 시달린 생존자다. [사진 영화사 그램]

어떤 점이 힘들었나.  

“사실 현대판 노예제도의 실상은 착취의 정도나 규모를 정확히 산정하기 어렵다. 생존자들이 용기를 내 꺼내기 힘든 이야기를 들려줬다. 차마 영화에 표현 못한 현실이 있을 정도로 끔찍했다. 취재할 때마다 고통스러웠지만, 최대한 객관적인 사실에 접근하려고 노력했고 생존자 증언을 토대로 영화를 구성했다.”

연출하며 중점 둔 부분은.  

“어두운 세계의 그늘에서 희생된 이들의 아픔을 관객에게 피부로 와 닿게 하고 싶었다. 극한의 비인간성을 겪은 피해자들은 가족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거나, 사회로 들어가는 일이 매우 어렵다. 내가 만난 생존자들은 평생 트라우마와 싸우면서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사투를 벌이고 있다. 이들이 내면의 평화와 삶의 목적을 되찾았으면 하는 바람도 영화에 담아냈다.”

구조화된 착취, 폭력의 순환

길이 20m, 너비 6m의 어선은 푸르른 바다에 폐쇄된 감옥 같다. 권총을 찬 선장은 조종실에서 마치 간수처럼 일꾼들을 내려다본다. 라스젠 감독은 “실제 선박을 개조해 최대한 사실적인 저인망 어선을 구현했다”면서 “이 선박이 감옥처럼 보이길 바랐다. 바다로 뛰어드는 것 외엔 어디도 탈출구가 없다”고 했다.

 차크라의 시선은 때때로 배 안의 끔찍한 현실을 벗어나 아름다운 바다 풍광에 머문다. 마치 희망을 찾는 듯이.[사진 영화사 그램]

차크라의 시선은 때때로 배 안의 끔찍한 현실을 벗어나 아름다운 바다 풍광에 머문다. 마치 희망을 찾는 듯이.[사진 영화사 그램]

어린 차크라가 어선의 무법자들에게 동화되어 가는 모습도 그렸는데.  

“폭력의 순환을 그리는 게 중요했다. 일차원적인 악인을 표현하고 싶지 않았다. ‘부력’에서 선장은 여러 세대에 걸쳐 자행되고 구조화된 착취와 학대, 고문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이를 단순히 몇몇 악인에 한정 지어 책임지우는 건 무책임하다.”

주연을 맡은 삼 행의 고요하되 힘 있는 연기는 연기가 처음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차크라처럼 캄보디아 농가에서 태어난 이 15세 배우는 캄보디아 어린이 보호 자선 단체 ‘그린 게코 프로젝트’를 통해 라스젠 감독에게 발탁됐다. 실제 그는 친구의 아버지가 어선에서 돌아가신 일을 겪었고 더 많은 피해자가 나오는 걸 막고자 출연을 결심했다고 한다.

美국무부 '세계 인신매매' 보고서엔 한국 원양어선도…

'부력'에서 선원들이 겪는 노동 착취는 실제 피해를 경험한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구성했다. [사진 영화사 그램]

'부력'에서 선원들이 겪는 노동 착취는 실제 피해를 경험한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구성했다. [사진 영화사 그램]

지난해 9월 호주 개봉 당시 라스젠 감독은 우리 식탁에 올라오는 생선을 누가 잡았는지 질문하는 해시태그(#whocaughtmyfish) 캠페인도 진행했다. 그는 “태국 어업계에선 여전히 현대판 노예제와 착취가 자행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며 “유럽 연합(EU)은 2015년 인권침해 사례와 관련해 태국 당국에 권고 조치를 내리며 재발 방지 방안의 조속한 마련을 촉구했다. 권고 조치는 지난해 해제됐고 이는 상황이 좀 나아졌다는 것을 뜻하지만 인권 침해 사례가 근절됐다고는 볼 수 없다”고 했다.

어선들의 노동자 인권침해 문제에 있어선 한국도 자유롭지 않다. 2012년 미국 국무부가 발표한 ‘2011년 세계 인신매매’ 보고서엔 태국 어선들과 함께 한국 원양어선의 외국인 선원 노동 착취 사례가 실리기도 했다.

영화 '부력'은 호주 출신 로드 라스젠 감독을 비롯해 태국과 캄보디아 배우 등 다국적 제작진이 참여한 현장에선 영어, 태국어, 캄보디아어, 베트남어, 미얀마어 등이 사용됐다. 캄보디아의 제작실 내부에는 사방 벽에 영화 스토리보드를 붙여 배우나 제작진이 말로 대화하지 않고도 촬영할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미술팀은 사진, 스케치 등 시각 자료를 총동원해 언어 장벽을 넘은 의사 소통을 도왔다. [사진 영화사 그램]

영화 '부력'은 호주 출신 로드 라스젠 감독을 비롯해 태국과 캄보디아 배우 등 다국적 제작진이 참여한 현장에선 영어, 태국어, 캄보디아어, 베트남어, 미얀마어 등이 사용됐다. 캄보디아의 제작실 내부에는 사방 벽에 영화 스토리보드를 붙여 배우나 제작진이 말로 대화하지 않고도 촬영할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미술팀은 사진, 스케치 등 시각 자료를 총동원해 언어 장벽을 넘은 의사 소통을 도왔다. [사진 영화사 그램]

라스젠 감독은 “착취 현상은 도처에 발생하고 있다”면서 “모국 호주의 경우 농업 분야에서 이런 사례가 자주 발견된다. 이주자들의 경우 국적을 불문하고 굉장히 취약한 위치에 놓여있다”고 했다.

“우리 모두가 각자 소비하는 해산물이 어떤 과정으로 식탁에 오르는지 인지하는 의식 있는 소비자가 돼야 합니다. ‘부력’이 그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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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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