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볼턴 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신간 ‘그 일이 일어난 방: 백악관 회고록’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중국 인식이 그의 참모들만큼 강경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줘 눈길을 끈다.
볼턴이 전하는 트럼프의 중국관 #“시진핑 비판 듣지 않으려 해” #"대만이 만년필이면 중국은 테이블”
미 외교를 담당하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중국에서 ‘인류의 공적’이란 소리를 듣는다. 중국 때리기로 일관하는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 정책국장에 대해선 “오만하고 방자하기 이를 데 없다”는 혹평이 중국에서 나온다.
이들 모두 트럼프 대통령을 대신해 마치 목숨이라도 건듯 중국과 격하게 싸우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데 홍콩과 대만 등 중화권 매체가 볼턴의 신간을 살펴봤을 때 트럼프가 했다는 말과 행동은 중국과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이다.
볼턴은 책에서 “트럼프는 근본적으로 중국 정세에 대한 어떤 나쁜 소식도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시진핑을 비판하는 말도 싫어했고 심지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문제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고 했다.
또 “중국 경제에 대한 부정적인 소식을 듣는 걸 바라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게 미·중 무역 담판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미국 경제에는 골칫거리를 가져와 결국엔 연임 가도의 대선에서 ‘표’가 떨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중국 문제와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의 귀를 잡은 건 미국 월가의 사람들이었다고 볼턴은 전했다. 중국 대륙에 투자해 큰돈을 번 월스트리트 금융가 사람들의 말을 믿는 편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트럼프 대통령은 시 주석과는 아첨에 가까운 덕담을 주고받았다. 지난해 6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 때 시 주석과 회담하면서 “시 주석을 중국에서 300년 만에 한 번 나올 위대한 지도자”라고 추켜세웠다.
잠시 후엔 그것도 모자랐다고 생각했는지 “중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라고 칭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시 주석에게 자신의 재선을 위해 도와달라는 간청까지 했다는 게 볼턴의 회고다.
이에 앞선 2018년 11월 말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G20 회의 때는 시 주석의 트럼프 띄우기가 있었다. 시 주석이 만찬을 하며 트럼프 대통령과의 협력을 6년은 더 하고 싶다고 말했다.
6년은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임기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연임을 바란다는 메시지였다. 트럼프는 미국 일각에선 자신을 위해 대통령 임기를 연임으로 제한하는 미 헌법을 수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고 대답했다.
시 주석이 미국엔 선거가 너무 많다며 자신은 결코 트럼프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매우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고 볼턴의 신간은 전했다. 볼턴은 21일엔 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트럼프-시진핑 전화 내용의 일부도 공개했다.
시 주석이 세 번째 대통령 임기를 쟁취하지 않으려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감탄한다”는 말도 했다는 것이다. 볼턴은 “양국 정상의 이런 식의 교류가 트럼프 본인이나 미국 대통령의 자리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이 같은 대화는 시 주석이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사이에서나 오갈 법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게 미·중 지도자 간 대화에서도 오갔다는 게 놀랍다. 미·중 무역 담판과 관련해 트럼프-시진핑이 나눈 대화도 흥미롭다.
시 주석은 미·중 무역회담이 ‘불평등’ 합의가 된다면 중국은 굴욕을 받은 것으로, 이는 마치 중국이 1차 세계대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처럼 산둥(山東)성을 독일의 손아귀에서 떼어내 다시 일본에 내준 것과 같다고 따졌다는 것이다.
시 주석은 정색하고 중국이 무역 담판에서 굴욕을 겪는다면 중국 내 애국주의 정서가 폭발해 반미(反美) 시위가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은 “2차 대전 당시 미국이 중국을 도와 일본을 격파했기에 중국은 미국에 빚을 졌다”고 응수했다.
이에 시 주석은 다시 “중국은 당시 19년을 싸웠고 끝내는 중국의 힘으로 일본의 침략을 격퇴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1989년 6.4 천안문(天安門) 사태 30주년이던 지난해 “15년 전 일을 누가 신경 쓰느냐”며 무역이나 챙기자고 했다.
또 지난해 내내 홍콩을 달궜던 시위에 대해서도 개입하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시 주석이 ‘신장(新疆) 재교육 캠프’에 대해 설명하자 “그런 캠프가 마땅히 세워져야 한다”며 찬동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는 게 볼턴의 신간이 전하는 바다.
대만에 대해선 마치 ‘소화 불량’에라도 걸린 듯 중요성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트럼프는 만년필을 가리키며 이게 대만이라면 중국은 백악관 집무실의 커다란 테이블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중국의 덩치와 경제를 매력적으로 본 것이다.
볼턴은 또 “내가 백악관을 떠난 후 트럼프가 시리아의 쿠르드족을 배신했는데 다음엔 또 누구를 배신할까 따져보니 아마도 대만이 트럼프의 배신 명단 앞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해 대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볼턴의 전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트럼프의 중국관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중국은 경제적으로 매우 큰 매력 덩어리로 무역 담판을 잘해 미국 경제를 살찌우고 이를 토대로 연임에 성공하자. 미안하지만 인권이나 대만 문제 등은 나중 일이다’.
베이징=유상철 특파원 you.sangchul@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