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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의 시시각각

트로트 열풍과 반엘리트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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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논설위원

양성희 논설위원

최근 대중문화계의 트렌드 중 하나는 반엘리트주의다. 핫한 문화현상으로 꼽히는 트로트 열풍부터가 그렇다. 싸구려 취향, 저학력과 가난의 상징으로 폄훼되던 트로트가 문화의 중심에 들어왔다. 엘리트주의에 밀려 주변화됐던 서민 음악의 반란이다. 열풍의 근원지인 TV조선 ‘미스터트롯’ 출신 ‘트롯맨’들은 줄줄이 스타덤에 올랐다. TV만 켜면 트로트가 흘러나오는 쏠림 현상에 피로감도 크지만 아직은 꺾이지 않는 시청률, 마땅한 대안을 찾지 못한 방송가의 안이함이 맞물려 ‘트로트 대세’는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생활밀착형 가사, 흥과 한이라는 트로트의 생명력이 세대를 넘어 통한 결과다.

엘리트주의에 밀린 서민음악 반란 #문화트렌드 넘어 시대정신과 상통 #일각의 반지성주의는 위험한 징후

트로트 열풍에서 단연 흥미로운 대목은 이들 프로그램이 음악을 다루는 방식이다. 트롯맨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노래방 기기 반주에 맞춰 노래 부르고 장소도 버스 안, 논두렁 등을 가리지 않는다. 노래를 부르면 서로 “잘한다”고 추임새를 넣으며 흥을 돋우기도 한다. 일반 예능 프로에 출연한 트롯맨들에게는 장기자랑처럼 이런저런 노래를 불러보라는 주문이 주어지는데, 주저없이 숱한 노래들을 불러젖힌다. 일반 가수들에게는 ‘무례’에 가까운 상황이지만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음악은 경청·감상의 대상이라기보다 여흥과 오락거리에 가깝다. 시끌벅적 노래방 문화, 지방 행사장의 열기를 TV에 담아낸 게 최근 트로트 열풍의 핵심처럼 느껴질 정도다.

문화계의 반엘리트주의·반전문가주의는 2007년 심형래 감독의 괴수 영화 ‘디 워’를 둘러싼 평론가 진중권과 네티즌의 설전에서 극적으로 드러났었다. ‘할리우드 못잖은 컴퓨터그래픽’을 내세우며 ‘애국주의’ 마케팅에 호소해 흥행하던 영화를 “서사 없는 졸작”이라 혹평한 것이 화근이었다. 미학자로서 당연한 비평이었으나 ‘대중 취향을 무시하는 엘리트주의’라는 네티즌의 맹공이 이어졌다. 사이버 테러에 준하는 수준이었다.

지난해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명징과 직조’ 사례도 유사하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대해 짧은 평을 하며 ‘명징’과 ‘직조’란 단어를 쓴 게 논란이 됐다. 당시 두 단어를 검색해 본 이가 많았는데, 그만큼 단어 뜻을 잘 몰랐단 얘기다. 비평의 내용이 아니라 ‘쓸데없이 어려운 단어를 쓰는’ 지식인적 태도가 불만거리가 됐다.

『전문가와 강적들』의 톰 니컬스는 디지털 시대 반전문가주의에 주목한다. 인터넷에 넘쳐나는 정보 덕에 대중은 ‘나도 너(전문가)만큼 안다’는 착각에 빠지고, 이는 자기도취적 나르시시즘, 지적 평등주의, 반지성주의로 이어진다고 분석한다. 가짜뉴스나 ‘탈진실’이 먹히는 동력도 여기에 있다. 『친절하게 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들』의 박정훈은 한 글에서 “무학의 통찰의 위력을 보여줘 지식인들의 고매한 말들은 상상도 못하는 사이다를 대중에게 선사하는” ‘나꼼수’류 정치비평의 반지성주의를 비판한 바 있다. “사이다를 선사하는 과정이 우리 편이 듣고 싶은 말을 하고, 종교적 열정을 자아내는 방식”이라고도 했다. 지식인, 전문가, 기성 언론을 싸잡아 비판하며 복잡한 사안을 자기 진영에 유리하게 단순화하는 건 기본이다.

나꼼수 등 진보 남성들이 어떻게 반지성주의를 부추겼는지 분석한 『타락한 저항』의 이라영은 반지성주의에 대해 “알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한 상태”라고 정의했다. 아마도 그 선봉에 선 방송인 김어준은 이번 ‘정의연 회계 부정 의혹’이란 정당한 의문 제기에 대해서도 “냄새가 난다”며 예의 음모론을 펼쳤다.

반전문가주의, 반엘리트주의 심지어 반지성주의가 정치·사상·문화를 관통하는 시대의 키워드가 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탈권위주의 시대의 거스를 수 없는 흐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도 많다. 작금의 트로트 열풍이야 엘리트주의에 한 방 먹이는 서민성의 승리라 할 수 있지만, ‘김어준 현상’의 유해함은 폐해가 너무 크다.

양성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