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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 논설위원이 간다

AI 농부에서 ‘디지털 강소농’의 미래를 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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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네덜란드 농업AI 대회 한국팀 3위 기염

제2회 세계농업AI대회 본선에 진출한 한국의 ‘디지로그팀’ 팀원들이 지난해 말 네덜란드 현지 유리온실에서 센서와 카메라 등을 설치하고 있다. 팀원들은 6개월 동안 한국에서 AI의 도움을 받아 원격 재배 방식으로 방울토마토를 키웠다. [사진 디지로그팀]

제2회 세계농업AI대회 본선에 진출한 한국의 ‘디지로그팀’ 팀원들이 지난해 말 네덜란드 현지 유리온실에서 센서와 카메라 등을 설치하고 있다. 팀원들은 6개월 동안 한국에서 AI의 도움을 받아 원격 재배 방식으로 방울토마토를 키웠다. [사진 디지로그팀]

이번엔 농사 대결이다. 2016년 인간 이세돌과 AI(인공지능) 알파고의 대결은 AI의 위력을 실감하게 했다. 바둑은 인간 지혜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을 여지없이 깨버렸다. 이제 AI를 빼고 나면 제조·유통·서비스업 등의 미래를 논할 수 없는 단계가 됐다. 인간 문명의 역사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농업에서는 어떨까. 인간과 AI 중 누가 농사를 잘 지을까.

방울토마토 6개월간 재배 과제 #민승규 교수 주축 민간팀이 도전 #“AI, 인간이라면 안 했을 선택도” #한국형 농업 데이터 축적이 과제

생명과학 도시로 유명한 네덜란드 바헤닝언(Wageningen)에서 열리는 ‘세계 농업AI 대회’는 이런 궁금증에 답하는 행사다. 중국 텐센트 후원으로 바헤닝언대학이 주관해 2018년 처음 열렸다. 1회 대회 주제는 오이. 본선 진출 5개 AI 팀과 베테랑 농부가 3개월간 벌인 재배 대결에서 인간을 이긴 AI팀은 단 한 개였다. 그러나 올해 방울토마토 재배를 놓고 열린 2회 대회에서는 본선 진출 5개 AI팀 모두가 농부를 이겼다. 농업에서도 4차 산업혁명의 물결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줬다.

주목할만한 것은 한국팀의 성적. 이달 초 발표된 결과에서 민승규 한경대 석좌교수(전 농촌진흥청장)를 단장으로 하는 ‘디지로그팀’이 당당히 3위를 차지했다. 첫 대회에서 한 대학팀이 예선의 벽을 넘지 못할 정도로 AI 농업 경험이 일천한 한국으로선 의미 있는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사진은 한국팀이 키운 방울토마토. [사진 디지로그팀]

사진은 한국팀이 키운 방울토마토. [사진 디지로그팀]

대회는 시뮬레이션 방식으로 치러진 예선전과 6개월간 실제 유리온실 재배로 치러진 본선으로 나뉜다. 한국팀은 지난해 9월 바헤닝언대에서 열린 24시간의 ‘해커톤’(해킹과 마라톤의 결합어로, 팀원들이 회의해가며 프로그램을 짜는 것) 시합에서 세계 21개 팀 중 2위로 예선을 통과했다. 본선 진출 5개 팀은 바헤닝언 현지의 30평 규모 온실을 배정받아 6개월간 원격 재배에 들어갔다. 심사 기준은 순수익(수확량·당도·가격 등), 지속 가능성(에너지 사용량 등), AI전략 등이다.

대회 참가 자체가 도전이었다. 마땅한 AI 전문가를 찾기 어려운 한국 농업 현실에서 참가팀을 꾸리기가 만만찮았다. 민 교수가 방문연구원으로 가 있을 때 알게 된 바헤닝언대 박사 출신 서현권 동아대 교수(에이넷 테크놀로지 대표)와 함께 사람을 모았다. 두 달간에 걸친 물색과 설득 끝에 아이오크롭스의 조진형 대표, 스페이스워크의 이경엽 이사, 최대근 파미너스 대표, 한광희 이지팜 연구원, 팜에이트 김성언 차장 등 AI 및 농업 전문가 14명을 모았다. 정부나 대기업 지원 없이 팀원들이 자비로 항공료·숙박비·식비를 부담하는 등 ‘자발적 도전’이었음에도 열정 하나로 뭉쳤다. 대회용 시뮬레이터를 써 본 경험이 있는 스페인 출신 IT 전문가를 삼고초려 끝에 모셔오기도 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합성한 ‘디지로그’라는 팀명은 투병 중에도 팀원들을 위한 특별강연을 마다치 않은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지어줬다.

예선을 통과한 뒤 지난해 말 현지 유리 온실을 찾아 센서와 카메라를 다는 등 원격 재배 채비를 갖췄다. 팀원들은 각자 현지 전송 자료를 받아 화상 회의를 통해 의견을 나눴다. PC로 작물의 상태 등을 모니터링하며 AI의 도움을 받아 최적의 생육 전략을 짜고, 온실 온도·습도·환기 등을 원격 제어했다. 팀원들은 한두 달에 한 번씩 민 교수가 운영하는 서울 양재동의 한국벤처농업대학 사무실에서 만나 머리를 맞댔다.

비가 와서 온실에 물이 차고, 현지 관리자의 실수로 온실 전기가 일시 차단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결과는 고무적이었다. 외양·당도 등 품질 분야에서는 1위를 하는 등 한국 AI 농업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민 교수는 “현지에서 국제적인 농업 AI 전문가들과 교류하고 경험을 쌓는 것 자체가 수확이라는 생각으로 참가했으나 결과는 기대 이상”이라고 말했다.

서울 양재동 사무실에서 민승규 교수를 만났다. 민 교수는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농업을 연구하다 공직(청와대 농업비서관, 농수산식품부 차관, 농촌진흥청장 등)을 거친 뒤 2012년 삼성경제연구소 부사장으로 복귀했으나, 2016년 10월부터 1년간 바헤닝언대에서 연수를 했다. 새로운 농업혁명의 현장을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민승규 교수

민승규 교수

AI와 인간의 농사는 무엇이 다른가.
“가령 온실 온도를 낮춰야 할 필요가 있다고 치자. 인간이라면 창문을 여는 정도만 생각한다. AI는 어느 창문을 어느 정도로 열어 몇 분 만에 목표 온도를 맞추는 것이 작물 생육에 최적이라고 제시한다. 때때로 베테랑 농부도 생각지 못한 솔루션을 보여 준다. 1회 대회 우승팀 주역인 데이비트 카친은 ‘AI는 사람이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을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재배 방법들이 최선이 아닐 수 있다’고 말했다. 의미심장하다.”
농촌 인구가 고령화되고 있다. AI로 완전 자율 농업이 가능해질까.
“AI 농업은 이제 첫발을 뗐다. 자율 농업까지는 갈 길이 멀다. 이번 대회에서도 현장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엔 현장 요원들이 유리 온실에 들어가 해결했다. 자동화 기계와 AI 기술이 결합하면 인간 노동력을 상당히 덜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인간의 판단보다 AI가 제공하는 솔루션이 더 뛰어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은 의미 있다.”
한국 농업에 AI의 적용 가능성은.
“일반적으로 한국 농업의 문제점을 ‘작은 규모’, 즉 소농의 높은 비중에서 찾는다. 그러나 AI 등 첨단 기술의 발전은 이런 인식을 뒤집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대규모 농가에 적용 가능한 ‘선택과 집중’ 모델은 한국에서 무리일 수 있다. 한국형 농업 모델, 즉 작지만 강한 ‘디지털 강소농’을 개발해야 한다. AI는 규모의 경제를 뛰어넘는 무기가 될 것이다. 초보적 AI 기술은 수년 내 노지 재배에 적용 가능하리라 본다.”

이번 성과로 AI 농업의 가능성을 확인했으나, 풀어야 할 과제는 한둘이 아니다. 무엇보다 데이터 확보다. 민 교수는 “바헤닝언대가 AI 농업 대회를 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30년 동안 쌓은 방대한 농업 데이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알파고가 짧은 시간에 수천만 개의 기보(棋譜)를 학습해 ‘최적의 수’를 두듯이, 농업 AI도 오랫동안 축적된 자료를 바탕으로 최적의 재배법을 제시한다. 민 교수는 “네덜란드는 대규모 유리 온실 농업이 발달해 있어 노지 재배나 비닐 농업이 일반적인 우리 농업과는 다르다”며 “우리 농업 데이터를 쌓는 일이 급선무”라고 말한다.

이런 데이터 축적을 위해서는 한·중·일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민 교수의 생각이다. “중국의 방대한 농가 데이터, 한국의 우수한 실험실 데이터, 일본의 고품질 재배 데이터를 결합하면 훌륭한 아시아형 AI 농업 모델이 나올 수 있다.”

민 교수는 AI 농업 적용 실험 지역으로 깻잎 주산지인 충남 금산군을 주목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키우지 않는 작물인데다, 이미 금산군 차원에서 스마트팜 온실 구축 사업이 이뤄지고 있는 등 기초 여건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2600개 넘는 깻잎 농가 비닐하우스에 AI 데이터 수집용 센서 설치 등을 위해 문정우 금산군수 및 농민들과 협의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인터뷰 말미, 민 교수가 구글어스를 띄웠다. 중국 산둥성 서우광시 근처로 좁혀 가자 화면에 하얀 지대가 잡힌다. “1억평 규모의 비닐하우스 지역입니다. 소농 중심의 아시아형 AI 농업 모델을 개발한다면 시장은 무궁무진할 겁니다. 이를 위해 수년 내 한국에서 아시아판 농업 AI 대회를 여는 것이 목표입니다.”

주목받는 AI 농업의 실제 사례들

AI 기술이 바꿔 놓는 농업 현장은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 예가 네덜란드 스타트업 테크네이처다. 장미의 꽃머리 각도와 크기, 색깔, 줄기의 길이와 두께 등 8가지 항목을 카메라로 자동 분석해 ‘피고 지는 시기’가 비슷한 꽃을 묶을 수 있다. 이렇게 묶인 꽃다발은 일반 제품보다 12% 정도 비싼 가격에도 인기를 얻고 있다.

방제 드론

방제 드론

화훼 및 채소 농가의 골칫거리인 나방을 잡아내는 드론 기술도 있다. 네덜란드의 방제 드론 업체 파츠(Pats)가 그 주인공. 적외선 카메라가 나방의 비행 궤적을 포착하면 대기 중이던 드론(사진)이 출격, 0.6초 안에 날개로 나방을 산산조각낸다. 네덜란드어로 ‘파츠’는 박수칠 때 나는 소리를 표현한 의성어다. 살충제를 사용하지 않는 친환경이라는 장점이 있다. 드론 하나가 1유로 정도 하기 때문에 시스템 설치비를 빼면 비용 부담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수산업에 AI를 접목한 사례도 있다. 노르웨이 아쿠아바이트사는 250만 마리의 생선 이미지 학습을 통해 0.8% 오차 범위 내에서 물고기의 무게를 예측한다. 이를 통해 최적의 사료량을 결정함으로써 양식장 운영 효율을 크게 높였다.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