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북한군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경복궁 내에 위치했던 국립중앙박물관도 삽시간에 북측 손아귀에 넘어갔다. 당시 북한 내각직속 물질문화연구보존위원회를 자처한 일당은 박물관 통제권을 확보한 뒤 직원들에게 소장 문화재를 모두 포장하라고 명령했다. 명목은 전쟁 중 문화재 보호였지만 실제론 이를 평양으로 가져가려는 속셈이었던 걸로 보인다. 당시 보화각으로 불렸던 한국 최초 사립미술관 간송미술관도 마찬가지 협박을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쟁 70주년 전시 25일부터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박물관 직원들과 간송 전형필 등은 포장을 잘못 했다며 다시 풀고 새로 싸기를 반복해가며 ‘유물포장 지연 작전’을 벌였다. 결국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9월28일 서울이 수복되자 인민군은 북측으로 ‘빈손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박물관의 2만점 유물(당시 규모)은 물론 간송 소장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 등 귀한 문화재가 이렇게 가까스로 ‘납북’을 모면했다.
유물포장 지연시켜 北반출 면해
국립중앙박물관(관장 배기동)이 6‧25 전쟁 70주년을 맞아 당시 피해를 입었거나 가까스로 보존된 소장유물 32건을 한자리에 모은다. 오는 25일부터 9월13일까지 열리는 ‘6‧25 전쟁과 국립박물관 - 지키고 이어가다’에서다. 현재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전시관이 휴관 중인만큼 일단 박물관 홈페이지와 유튜브를 통해 온라인 개막한다.
1부 ‘위기에 빠진 우리 문화재’에선 북한군의 서울 점령 이후 9‧28 수복 때까지 문화재가 겪은 위기와 피해상황을 살펴본다. 오대산 월정사에 보관되다 1951년 1월 월정사가 소실되면서 불에 녹은 선림원지 동종, 애초 국립박물관에 5점 있었다가 1점만 남은 고려시대 유리구슬 등이 선보인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조선 숙종대에 제작된 ‘요계관방지도’를 조선 후기에 본떠 만든 모사본 지도다.
지도는 당시 조선과 청의 경계를 표시한 것으로, 백두산 주변을 자세히 보면 군데군데 군홧발 자국이 보인다. 전시회를 준비한 강민경 학예연구사는 “올 초 전쟁기념관에 문의한 결과 이 발자국이 당시 인민군이 신던 군화 밑창과 일치한다고 들었다”고 했다. 석달간 북한군 수중에 있던 박물관의 비운이 이렇게 드러난다. ‘요계관방지도’는 1706년 열폭짜리 병풍 형태로 제작된 원본이 서울대규장각에 그대로 보존돼 있고(보물 제1542호) 군화 발자국이 남은 모사본은 일부가 사라진 일곱 폭짜리로 남아 있다.
인민군 치하 석달, 문화재에도 흔적이…
강 연구사는 “전쟁 후 망실문화재 조사 작업을 했지만 제대로 번호가 확인되지 못한 것도, 뒤늦게 찾은 것도 있어 당시 피해 규모가 확실치 않다”면서 “이번 전시회는 전쟁이 인간 뿐 아니라 문화재에도 상흔을 남긴다는 걸 한눈에 보여줄 일부만 골랐다”고 설명했다. 예컨대 몸통이 날아가고 아랫부분만 남은 19세기 청화백자 용 항아리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기록된 유물카드에는 이 항아리가 채홍염부용문병(彩紅染付龍文甁)으로 기록돼 있다. 채홍이란 붉은빛이 나는 동화(銅畵)나 철화(鐵畵) 안료로 무늬를 그렸다는 뜻이지만 현재 남은 부분에는 붉은 무늬가 남아있지 않아 원래 형태를 짐작하기 어렵다. 또 조선시대 칼 한 자루가 전시되는데 해방 직후엔 16자루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지만 전쟁 중에 15자루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이밖에 2부 ‘문화를 지키고 세계에 알리다’에선 1950년 12월 부산으로 옮긴 국립박물관이 피란지에서도 한국 문화를 지키고 이어가기 위해 벌였던 노력을 조명한다. 전쟁 중에 박물관이 주최했던 제1회 현대미술작가초대전(1953)에 김환기(1914~1974)가 출품했던 작품 ‘돌’과 당시 설명카드 등도 눈길을 끈다. 박물관 측은 이밖에 상설전시실 전시품 중에서도 북한산 신라 진흥왕순수비(국보 제3호), 청자 사자 모양 향로(국보 제60호)처럼 전쟁과 관련된 것들을 팸플릿에 표시해 관객들이 직접 찾아볼 수 있게 안내한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