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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에서 무덤까지' 영국 좌파 애틀리 총리, 6·25에 파병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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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5일로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맞는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이 대한민국을 침략하면서 시작된 전쟁은 유엔군 참전과 중국인민지원군(당시엔 중공군으로 표기)의 개입으로 국제전 성격을 띠었다. 많은 나라가 참전해 대한민국과 함께 싸우며 희생을 치렀지만 유난히 주목되는 나라가 영국이다. 영국은 당시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상징되는 복지국가 건설을 주도한 좌파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가 집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지는 좌우를 아우르는 개념이 됐지만 당시 노동당 정권은 고전적 사회주의 국가와 비슷한 산업 국유화와 계획 경제를 가동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 노동당 정권은 이념적으로 좌파지만 소련 공산제국주의의 침략과 팽창 야욕 앞에선 단호했다. 영국은 즉각 홍콩에서 한반도로 병력과 군함을 파견해 싸웠다. 한국·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해 1000명 넘게 전사하는 희생을 치렀다. 좌파 노동당의 애틀리 정권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지난 2016년 영국 런던의 윔블리 경기장에서 열렸던 2018 월드컵 예선에 등장한 거대한 응원 배너. 독특하게도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의 실루엣에 당시 플랑드르 전선에 피어 전몰자의 상징이 된 던 빨간 파피(개양귀비꽃)를 놓았다. 그 아래에 '우리는 잊지 않는다'는 문구를 적었다. 1차대전 이후 시작된 영국의 전몰자 추모는 사회적 전통으로 자리 잡고 하나의 문화가 됐다. 그만큼 전쟁의 피해와 충격이 컸음을 보여준다. 2차대전까지 치른 영국이 한창 전후 복구 중이던 1950년 북한군이 대한민국을 침략하자 즉각 병력을 보내 함께 싸웠을까? AP=연합뉴스

지난 2016년 영국 런던의 윔블리 경기장에서 열렸던 2018 월드컵 예선에 등장한 거대한 응원 배너. 독특하게도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의 실루엣에 당시 플랑드르 전선에 피어 전몰자의 상징이 된 던 빨간 파피(개양귀비꽃)를 놓았다. 그 아래에 '우리는 잊지 않는다'는 문구를 적었다. 1차대전 이후 시작된 영국의 전몰자 추모는 사회적 전통으로 자리 잡고 하나의 문화가 됐다. 그만큼 전쟁의 피해와 충격이 컸음을 보여준다. 2차대전까지 치른 영국이 한창 전후 복구 중이던 1950년 북한군이 대한민국을 침략하자 즉각 병력을 보내 함께 싸웠을까? AP=연합뉴스

복잡한 국제전 성격의 6·25전쟁

1945년 집권 노동당 애틀리 총리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정책 추진 #산업 20% 국유화 등 내정은 좌행좌 #대외정책은 소련공산제국 팽창 경계 #내정은 복지, 대외 정책은 반공좌파 #미국과 손잡고 나토 결성, 집단방위 #북한 침략하자 즉각 병력·군함 보내 #영연방 캐나다·호주·뉴질랜드·남아공도 #한국·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희생자 #파병비용 위해 안경·틀니 혜택 연기도 #포츠담회담 참가해 한반도 독립 논의

이를 파악하려면 먼저 6·25전쟁의 과정과 성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전쟁의 성격에 대해선 다양한 해석이 있다.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의 충돌이라는 고전적 학설부터 냉전을 시작한 미국과 소련이 벌인 실전 대리전쟁, 심지어 미국과 중국의 충돌이라는 주장까지 있다. 기존에는 내전으로 시작해 국제전으로 비화했다는 학설이 바탕을 이뤘다. 유엔 결의로 북한의 침략을 규탄하고 미군과 유엔군이 참전했으며, 북한 정권을 구하려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고 소련군 미그기 조종사가 유엔군 전투기와 공중전을 벌였으므로 6·25전쟁은 분명히 국제전이다. 지금은 북한이 탱크 등 소련의 무기지원을 바탕으로 남침한 것부터 국제전 성격을 띤다는 주장도 있다.

1950년 홍콩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영국군.영국국립문서보관소

1950년 홍콩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영국군.영국국립문서보관소

안보리, 6월 25일 당일 북한 침략 중지 권고

유엔군이 6·25전쟁에 참전해 북한 침략군, 나아가 중공군과 맞서게 된 배경은 극적이다. 6·25전쟁이 발발했던 1946~65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모두 11개국으로 이뤄졌다. 비토권을 보유한 상임이사국 5개국(미국·영국·프랑스·소련(91년 러시아가 승계)·중화민국(현재 대만, 71년 중국이 승계))에 비상임이사국 6개국(중남미 2개국과 영연방·동유럽·중동·서유럽 각 1개국)이 포함됐다. 6·25가 발발한 1950년 6월 25일 소집된 안보리에서 소련은 49년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의 유엔 가입을 요구하며 불참했고 유고슬라비아는 기권했다. 이에 안보리 상임 4개국과 에콰도르·쿠바(1959년 혁명 이전)·인도·이집트·노르웨이를 합쳐 표결 참가 9개국 만장일치로 결의 제82호를 통과해 북한의 침략행위 중지를 권고했다.

영국 런던의 한국전 참전 기념비.

영국 런던의 한국전 참전 기념비.

유엔 안보리 결의로 유엔군 파병

이어 6월 27일에는 대한민국 지원을 권고하는 결의 83호를 7개국 찬성과 유고슬라비아의 반대, 그리고 인도·이집트·소련의 결석 하에 통과했다. 한반도에선 6월 28일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급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고, 미국은 이 결의안에 따라 1일 지상군 선발대인 스미스 대대를 급파했으며, 이 부대는 7월 5일 오산 죽미령에서 첫 전투를 치렀다.

6.25전쟁 중 대전에 진입하는 북괴군 3사단. 중아오토

6.25전쟁 중 대전에 진입하는 북괴군 3사단. 중아오토

결정적인 것은 7월 7일 통과한 결의 84호로 대한민국에 대한 지원을 다시 한번 권고하고, 미국의 지휘 아래 유엔군을 편성하는 내용이었다. 유고슬라비아·이집트·인도는 기권했고, 소련은 결석했다.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16개국이 전투 병력을 파병했다. 미국·영국·호주·네덜란드·캐나다·프랑스·뉴질랜드·필리핀·터키·태국·남아프리카연방·그리스·벨기에·룩셈부르크·에티오피아·콜롬비아 순으로 병력을 한반도에 보냈다. 스웨덴·인도·덴마크·노르웨이·이탈리아 등 5개국은 의료지원대를 각각 파견했다. 전후 복구로 여유가 없던 독일은 정전 뒤 의료지원단을 보내 부산에서 독일병원을 운영하며 한국을 도왔다. 공산 측은 아무런 국제적 절차나 결의 없이 중국과 소련(비공식적으로 공군조종사 등)이 군대를 보냈다.

6.25전쟁에 참전한 영국군 포병의 모습. 영국국립문서보관소

6.25전쟁에 참전한 영국군 포병의 모습. 영국국립문서보관소

한국-미국 다음으로 많은 영국과 연연방 희생

유엔 자료 등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126만9349명의 병력을 동원했으며 15만8365명이 전사하고 13만2256명이 실종하는 피해를 입었다. 미국은 연인원 178만9000명을 파병해 3만6940명의 전사자와 3737명의 실종자를 냈다. 가장 많은 병력을 보내고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
그다음으로 많은 병력이 한반도에서 싸웠던 집단이 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남아프리카연방 등 영연방이다. 영국은 연인원 5만6000명을 파병해 전사 1078명, 실종 179명의 피해를 입었다. 캐나다는 2만5678명을 파병해 전사 312명, 1명 실종의 손해를 입었다. 호주는 8407명을 보내 339명이 전사하고 3명이 실종됐다. 뉴질랜드는 3784명의 병력을 보내 23명이 전사하고 1명이 실종됐다. 남아프리카연방(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은 826명의 공군을 보내 34명이 전사했다.

6.25전쟁 당시 불타는 서울을 지켜보고 있는 영국군 병사.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6.25전쟁 당시 불타는 서울을 지켜보고 있는 영국군 병사.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나토와 영연방 회원국이 유엔군 주축

유엔군 측 참전국을 분석하면 참전 동기를 짐작할 수 있다. 1949년 창립된 집단안보기구인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회원국이 압도적이다. 미국·영국·캐나다·네덜란드·프랑스·벨기에·룩셈부르크(참전시기 순)가 나토 창립회원이고 터키·그리스는 6·25 전쟁 중이던 1952년 나토에 가입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가 6·25전쟁에 서방의 다국적군을 참가시키는 국제정치적 매개 역할을 한 셈이다.
이와 함께 눈여겨볼 기구가 영연방이다. 625전쟁에는 1931년 결성됐던 영연방의 창립회원국인 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남아프리카연방이 참전했으며 1947년 독립하면서 가입했던 인도가 의료지원단을 보냈다. 영국과 캐나다는 나토 창립 회원국이자 영연방에 동시에 속했다. 6·25전쟁에서 영국과 연방이 미국 다음으로 많은 기여를 했고, 큰 희생을 치렀다는 사실이다.

클레멘트 애틀리. 영국국립문서보관소

클레멘트 애틀리. 영국국립문서보관소

영국, 6·25 당시 좌파 노동당 집권

눈에 띄는 것은 당시 영국은 좌파인 노동당 정권이 집권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윈스턴 처칠(1874~1965년, 총리 재임 1940~1945년, 1951~1955년)의 정적인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1883~1967년, 재임 1945~1951년)가 총리를 맡고 있었다. 애틀리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부터 6·25전쟁 이듬해인 1951년까지 총리를 지내며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구호로 요약되는 20세기 복지국가 건설을 지휘했던 좌파 정치인이다.
애틀리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처칠 총리가 주도한 전시 거국내각에 참가해 부총리를 맡았다. 그는 1945년 5월 8일 VE(유럽전 승전) 2개월 뒤인 45년 7월 치러진 총선에서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새로운 시대 건설을 강조하는 ‘미래를 맞이하자(Let us face the future)’라는 선거구호가 먹혔다. 영국 유권자들은 과거의 영광이나 되새김질하는 낙오자의 길 대신이 미래를 일구는 진취자의 진로를 택한 셈이다. 영국 국민은 새로운 사회를 요구했고 애틀리는 노동당과 자신을 지지한 유권자에 호응해 전후 사회 재조직을 일사천리로 추진했다.

클레멘트 애틀리 영국 총리,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요시프 스탈린 소련 지도자(왼쪽부터)가 1945년 독일 베를린 근교 포츠담에서 만나 전후 처리문제를 의논하고 있다. 이들은 포츠담 선언을 통해 전후처리 문제를 정리하는 한편 카이로 회담에서 결의했던 전후 한국의 독립을 재확인했다. 애틀리와 트루먼은 50년 6·25발발 직후 유엔 결의를 주도하고 한국에 파병해 공산세력의 남침에 맞서게 된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클레멘트 애틀리 영국 총리,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요시프 스탈린 소련 지도자(왼쪽부터)가 1945년 독일 베를린 근교 포츠담에서 만나 전후 처리문제를 의논하고 있다. 이들은 포츠담 선언을 통해 전후처리 문제를 정리하는 한편 카이로 회담에서 결의했던 전후 한국의 독립을 재확인했다. 애틀리와 트루먼은 50년 6·25발발 직후 유엔 결의를 주도하고 한국에 파병해 공산세력의 남침에 맞서게 된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노동당 애틀리 총리, 복지국가 실현 주인공

우선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복지국가를 실현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를 위해 주요 기간산업의 국유화, 복지국가, 계획경제를 국정 3대 지표로 삼았다. 국유화와 계획경제는 나중에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평가받고 ‘영국병’의 원인으로 지목받았지만, 당시에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정권을 잡은 애틀리는 머뭇거리지 않고 파죽지세로 준비된 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잉글랜드 은행을 1946년 말 국유화한 데 이어 생산성이 떨어지고 툭하면 노사쟁의가 일어났던 석탄산업도 국유화했다. 항공, 철도, 화물차, 운하, 유무선통신, 전기, 가스를 1948년까지 차례로 국유화했다. 방송과 전신전화, 지하철과 버스 등 이미 국유화됐던 것을 포함해 공공 편의시설 대부분을 국유화했다.
자본주의가 탄생한 영국에서 주요 생산수단과 서비스의 국유화 정책을 추진했으니 파장이 컸을 법도 했다. 하지만 애틀리는 사회적 충격을 최소화하는 ‘소프트’ 국유화 정책을 폈다. 국유화 과정에서 원래 소유주에게 충분한 보상을 했으며 과정을 중시해 사회적 충격이나 패닉 현상을 부르지 않도록 조심했다. 요란한 구호를 내세우지 않고 소리 없이 개혁을 실천해 사회를 대대적으로 바꿔놓았다. 2차대전이라는 비상시기에 산업의 국가통제와 계획 경제에 이미 길든 국민은 이를 별 불편 없이 받아들였다. 그 결과 애틀리의 노동당 정권은 전체 산업의 20%를 국유화했다.

독일 포츠담에서 전후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 소련의 스탈린 최고지도자. 처칠은 회의 도중 치러진 영국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총리 자리는 노동당의 애틀리에게 넘어갔고 회담 참석자도 그렇게 바뀌었다.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독일 포츠담에서 전후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 소련의 스탈린 최고지도자. 처칠은 회의 도중 치러진 영국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총리 자리는 노동당의 애틀리에게 넘어갔고 회담 참석자도 그렇게 바뀌었다.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자본주의 영국에서 무상의료·무상교육 도입

애틀리의 업적으로 지금까지 영국을 대표하는 것이 그가 도입한 국민건강시스템(NHS)이다.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 행사로 영국의 역사와 자랑거리를 보여주는 공연에선 수많은 간호사와 병상이 무대에 등장해 NHS를 자랑했다. 1946년 국민보험과 함께 입법된 NHS는 국민 세금으로 전 국민을 무료로 진료해주는 획기적인 정책이다. 의사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일반의는 개인 개업이 가능하도록 하는 타협안으로 풀었다.
그다음이 주택이었다. 1951년까지 100만 채를 새로 짓고 50만 채를 보수하는 주책 공급사업을 펼쳤다. 실업수당, 노령연금 제도도 탄탄하게 확립했다. 전시인 1944년 마련했던 버틀러 교육법을 1947년부터 적용해 15세까지 무상교육을 실시했다.
이렇듯 애틀리는 국내 정책에서는 북지국가를 지향하는 좌파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지만 대외정책에서는 소련의 세력 팽창주의와 공산제국주의적 행동, 유럽에 대한 간섭 시도를 철저히 경계했다. 그는 1947년 이후 노동당내 좌파들이 ‘계속 좌향좌(Keep Left)’라는 구호를 앞세워 미국과 거리를 두라고 요구했지만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노동당 좌파들은 영국이 유럽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중심이 돼야 하고 미국과 소련 간 제3세력으로서 중립정책을 펼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애틀리는 이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관계의 문제로 국가와 국민 이익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며 이런 요구를 물리쳤다.

6.25전댕 당시 영국군이 피란민들이 임진강을 도하하는 것을 돕고 있다. 영국굴립문서보관소

6.25전댕 당시 영국군이 피란민들이 임진강을 도하하는 것을 돕고 있다. 영국굴립문서보관소

국제관계는 이념이 아닌 국민 이익의 문제

애틀리는 소련이 전후 점령한 동유럽에 공산정권을 수립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미국과 손잡고 이에 대항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1949년 소련의 핵실험과 중국 공산화를 본 애틀리는 이런 정책을 더욱 가속화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더욱 증폭시키고 냉전을 더욱 격화한 사건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애틀리는 이념에 따른 편들기 대신 시대정신을 추구한 셈이다. 냉전체제 하에서 확고하게 친미정책을 추구한 이유다. 이념보다 나라를 생각한 사례다. 정부가 가난한 사람을 일어서도록 도와야 한다는 그의 이념은 복지국가 추구로 나타났다.
애틀리의 국제적인 이상은 1947년 인도의 독립과 대영제국 해체로 이어졌다. 처칠은 인도 독립에 반대했지만 애틀리는 이를 과감하게 추진했다. 역사의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식민지 독립이라는 시대정신의 순리에 따른 셈이다. 인도를 무사히 독립시켰지만 통일은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영국령 인도제국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나뉘어 독립했다. 이스라엘 건국과 팔레스타인의 공존을 이루지 못한 안타까움도 있다.
애틀리는 소련은 물론 영국 공산당과도 멀리했다. 공산당과 가까이하는 노동당원은 가차 없이 제명했다. 국민의 지지 속에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내정개혁을 이루려면 소련이나 공산당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국민에게 확신시켜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6.25전쟁 당시 영국군의 모습. 영국국립문서보관소

6.25전쟁 당시 영국군의 모습. 영국국립문서보관소

좌파 노동당 정권, 공산권 막는 나토 창설 기여

애틀리는 미국과 손잡고 소련의 팽창을 막는 것이 영국의 국익에 부합하고 내부 개혁에도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판단했다. 그의 이런 신념은 1949년 4월 4일 공산권에 대항하는 서방의 집단방위기구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창설에 앞장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면서도 영국이 독자 노선을 걸으려면 핵무기 보유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1947년 1월 자체 핵무기 개발을 지시했다. 2차대전 중 핵을 공동개발했던 미국이 핵정보를 더 이상 공유하지 않자 취한 조치다. 애틀리의 노력 덕분에 영국은 보수당의 처칠 총리가 정권을 다시 차지했던 1952년 남호주에서 핵실험에 성공하고 핵 보유국이 됐다.

1951년 봄 중공군의 공세 상황을 기록한 영국군의 지도. 국립문서보관소

1951년 봄 중공군의 공세 상황을 기록한 영국군의 지도. 국립문서보관소

애틀리, 포츠담 회담 참석과 6·25참전 기여

애틀리는 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데 두 차례 기여했다. 첫째는 전후 한반도의 독립을 재확인한 1945년 7~8월의 포츠담 회담이다. 회담 초반에 참석했던 처칠은 7월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황급히 귀국해야 했고 새로 총리가 된 애틀리가 영국 대표로서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최고지도자와 함께 전후처리 과정에 참여했다.
둘째는 1950년 북한의 침략으로 6·25전쟁이 발발한 대한민국에 미국에 이어 둘째로 많은 병력을 파병해 공산군에 맞서 싸운 것이다. 애틀리는 안경과 틀니 무료제공에 필요한 예산 등 복지예산을 깎아 6·25전쟁 전비를 비롯한 냉전을 위한 재무장 비용 47억 파운드를 마련했다.
애틀리가 한반도에 파병한 영국군은 1951년 4월 22~25일 파주군 적성면 설마리 일대에서 벌어진 임진강전투(적성전투·설마리전투라고도 함)에서 투혼을 발휘했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한 발의 총알을 다 쏠 때까지 진지를 사수해 중공군의 서울 진격을 저지했다. 그 결과 한국군과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서울 북방에 튼튼한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으며 중공군은 다시는 서울을 넘보지 못했다.

영국국기

영국국기

영국 왕실이 거주하는 런던 교외 윈저성을 찾으면 전시실 벽에 ‘IMJIN’이라고 적힌 임진강 전투 기념 팬던트가 당당히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애틀리는 자유세계를 공산제국주의의 팽창에서 지키고 한국과 영국 관계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내외적으로는 거대 세력이 부딪히고, 대내적으로는 국민의 복지요구가 확산하는 냉전 초기를 현명하게 헤치고 나간 셈이다. 애틀리의 리더십은 6·25 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더욱 큰 울림을 준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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