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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추상화에 서예의 흔적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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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은주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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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서울 평창동에 위치한 갤러리 전시장 안에서 그를 만났을 때 조금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추상화에 40년 매달려온 70대 초반의 화가는 첫눈엔 농부처럼 우직한 인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작품 앞에서 “회화의 순수성을 음악적인 리듬, 색채의 리듬으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할 땐 다시 화가였고, “내 작업엔 목적이 없다”고 말할 땐 철학자 같았습니다. 칸트가 말한 것처럼 “무목적성이 예술로 이끈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강렬한 색채로 역동적인 기운을 뿜어내는 화폭 앞에서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놓던 그는 오수환(74) 작가입니다. 지금 그의 대형 작품 ‘Variation’이 국립현대미술관(이하 국현)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미술관 書: 한국 근현대 서예전’ 전시장에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추상화가 서예전에 걸려 있느냐고요? 그게 바로 이 전시의 특별한 점입니다. ‘미술관에 書’는 시(詩)·서(書)·화(畵)가 하나였던 문인화가 회화와 조각 등 현대미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펴보는 전시입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선 소전 손재형 등 ‘국전 1세대’ 서예가의 작품을 비롯해 초정 권창륜, 하석 박원규 등 ‘2세대 서예가’들의 작품을 모두 만날 수 있습니다.

오수환, Variation, 2008, 캔버스에 유채. 259x194㎝.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오수환, Variation, 2008, 캔버스에 유채. 259x194㎝.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뿐만이 아닙니다. 김환기에서부터 이응노·서세옥·이강소·김창열, 심지어 조각가 김종영 등 현대 미술 작가들의 작품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오수환의 그림도 그 가운데 있습니다.

오수환은 10여 년 전부터 대형 화폭에 대담한 붓질로 다양한 색을 겹치는 그림을 그려오고 있는데요, 그 전에 작업한 이 그림에선 붓의 움직임이 보여주는 리듬이 유난히 두드러집니다. 그가 강조했던 음악적 리듬, 자연의 리듬이 이런 걸까요. 배원정 국현 학예사는 “이 그림에 서예적 필선의 조형적 아름다움이 잘 녹아있다”고 소개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서예적 필선’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1969년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앞서 서예가 청남(菁南) 오제봉(1908~1991)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붓을 잡고 서예를 했습니다. 그의 그림이 낯설게만 보이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서예의 진짜 유산은 조형적인 것 이전에 일흔을 넘긴 지금에도, 회화의 순수성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물으며 구도하듯이 작업하는 자세가 아닐는지요.

지난 20일부터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선 ‘한국근대서예명가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만약 덕수궁관이 코로나19로 인해 휴관하지 않았다면 한국 현대 서예사와 미술사에서 의미 있는 두 전시가 동시에 열리는 큰 이벤트가 됐을 것입니다. 미와 매혹, 경외의 유산은 더 많은 이들이 문화 현장에서 보고, 경험하고, 누릴 때 미래의 영감으로 이어집니다. 덕수궁 전시장 문도 하루빨리 다시 열려 귀한 두 전시가 더 많은 관람객을 만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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