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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6·25 때 돌아가신 친척 있나요” 물어보세요 전사자 유해 1만 구 가족 찾고 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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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70주년 되는 해예요. 1950년 남침으로 일어나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기까지 만 3년 1개월 2일간 전국에서 격전이 일어났죠. 나라를 지키다 돌아가신 분도 많은데 산중 유해 등으로 묻힌 이들 대부분은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국방부는 이름 모를 산야에 홀로 남겨진 12만3000여위 호국용사들의 유해를 찾아 조국의 품으로 모시는 '국가적 숭고한 호국보훈사업'인 유해발굴 사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올해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늦춰졌다 지난 5월 재개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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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자 유해발굴 사업은 "나라를 위해 희생된 분들은 국가가 끝까지 책임진다"는 국가 무한 책임의지를 실현하는 의의가 있어요. 2019년 12월 기준, 31개사여단 10만여 명이 철원·창녕·순창 등 70개 지역서 아군 전사자 국군 1만1653구, 유엔군 19구 총 1만3180구를 발굴했습니다. 유가족 유전자 시료채취 후 신원확인으로 유가족을 찾아 국립묘지에 안장된 전사자는 142분이죠(6월 22일 기준). 유해발굴단에 따르면, 군번줄이 일상화되지 않았던 과거의 유해들은 신원을 알 수 없어 가족에게 돌려보내기 어려워 유가족 DNA 시료 채취가 절실합니다. 이는 가까운 시·군·구 보건소 또는 보건지소, 보훈병원, 군병원에서 가능하죠. 1577-5625로 전화하면 시료 채취 키트를 우편으로 발송하고요. 유해발굴감식단(이하 유해발굴단) 직원이 방문해 시료 채취합니다. 역사에 관심 많은 학생기자단이 경기도 고양시 철마산 고양 90여단 115기보대대의 유해발굴 현장을 찾았습니다. 장병 150명이 유해발굴 중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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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가는 길이 힘들 수도 있어요." 오전 10시, 유해발굴단 소속 장병의 지도를 따라 학생기자단이 철마산을 올랐습니다. "생각보다 가파르네요!" "이런 곳 처음 봤어요." 학생기자단은 가파른 곳이라 겁내다가도 금세 적응해 산을 타기 시작했죠. "올라갈 때만 마스크 내릴게요. 마스크 하고 갑자기 운동하면 호흡곤란이 올 수 있으니까요." 인솔을 맡은 장병이 설명했죠. "힘들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이 경사서 싸우면서 올라가셨던 분들을 생각하면서 올라갈까요." 9분가량 올라가다 숨을 허덕이는 학생기자단이 태극기를 발견하고 함박웃음을 짓자 그는 "올라온 만큼 더 가야 해요" 하고 다독였어요. 이 길로 매일 출퇴근하는 군인들은 오전 7시 50분에 올라가 점심 먹을 때 내려오고 다시 올라갔다가 오후 4시에 내려온다고 말했죠. "헉, 어떻게 그렇게 해요" "산 올라간 건 처음이 아닌데 좀 힘드네요." 학생기자단이 잠시 재잘대는데 추현준 학생기자가 지친 기색을 드러냈어요. 의무요원 두 명이 들것을 들고 내려와 체온·호흡·맥박·심박수치를 확인했죠. "형이 업어줄까?" 장병이 농담 섞인 위로를 건넸어요. "올라가지 않아도 돼" 하는 어른들의 말에 현준 학생기자는 올라갈 수 있다며 다부진 결심을 드러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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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대단하다. 여길 올 생각을 하고." 현준 학생기자 덕에 쉬는 10분 동안 탄약관 성현주 준위가 칭찬했습니다. 성 준위는 6·25 때 돌아가신 분이 13만 명이 넘는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어요. 유가족을 찾지 못해 대부분 유해는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했어요. "너무 가슴이 아파서 부대 홍보하러 다녀요. 전쟁터에서 죽었으면 가족 품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유가족 시료 채취가 안 돼 못 찾고 있죠. '집에 6·25 때 돌아가신 분 있어요' 물으면 잘 모르죠." 고개를 끄덕이는 학생기자단에게 성 준위는 전화번호를 알려 주며 참여를 독려했죠. "할머니·할아버지의 오빠·형들이 참전했을 텐데 돌아가셨는지 살아계신지 집에 가서 꼭 여쭤보세요. 한 분이라도 더 빨리 집에 돌려 보내드려야죠. 가족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유해는 현충원 지하에 보관돼 있어요. 군번줄을 보면 신상을 알 수 있잖아요. 죽으면 치아에 하나 끼워 두고 다른 하나는 친구가 가져가서 전사 소식을 알려요. 그럼 세월이 흘러도 찾을 수 있죠. 군번줄이 생긴 게 최근이라 6·25전쟁 중엔 없었어요. 당시 3년 1개월 전쟁을 했으니 대부분 참여했지만 누군지 알 수 있는 정보가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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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해 묻힌 유해는 대부분 어린 일반인이에요?"(율아) "10대 중후반쯤이겠죠.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다 나갔거든요." 성 준위가 학생기자단의 호기심을 해결했어요. 그에 따르면, 전쟁이 났던 지역은 흔적이 남아있고 인근 어른들에게도 의견을 물어요. 이후 그 일대를 전문탐사팀이 찾고 유해발굴지를 선정합니다. "주로 엉덩이뼈·정강이뼈가 남아있는데요. 나뭇가지랑 비슷하게 생겼어요. 땅을 팠는데 나뭇가지랑 닮았으니 나와도 유해가 유해인지 모를 수 있죠. 정교하게 살펴야 하는 이유예요. 70년이 흘렀으니 뼈 성분이 흙이 되거나 변했을 테니까요." 섬세한 과정을 거쳐 유해를 찾아야 한다는 설명에 학생기자단의 눈이 커졌죠. "그럼 나뭇가지까지 다 가져가면 다 검사해요?"(섬) "다 가져가서 뒤에서 구별해요. 땅 파는 군인들이 유해로 추정하는 것들을 빼두면 전문감식반이 뒤에 앉아서 선별하죠." "왜 유해발굴 현장은 평지가 아니라 산이에요?"(률희) " "전쟁은 고지를 점령해야 유리하죠. 적이 오는지 봐야 하니까요. 적이 이 산을 넘으려고 시도하겠죠. 그러니 여기가 격전지죠." 성 준위에 따르면, 충청남도 제외한 전국서 하루 1000명 정도 유해발굴 현장서 일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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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 후 학생기자단이 중턱으로 이동하자 이돈태 제30기계화보병사단 115기계화보병 대대장이 인사를 건넸어요. "아직 코로나19 때문에 일반 대상 견학 프로그램은 안 하고 있습니다. 작년까지는 일반 초등생 대상으로도 견학 프로그램을 진행했죠. 궁금한 게 많군요." 줄곧 성 준위에게 질문하며 가파른 산을 오르는 학생기자단을 본 이 대대장이 말했죠. "이곳은 일반인에게 노출된 등산로이기도 합니다. 가팔라서 민간인이 잘 이용하진 않죠. 등산로에서도 유해발굴이 된 적 있죠. 전투 중 전우가 묻어두고 올라가신 것으로 추정합니다. 철마산 발굴 유해는 정강이뼈·엉덩이뼈 등입니다. 근처 수류탄이 발견되는 걸 보니 포격하며 신체 일부가 떨어져 나갔거나 1970년도까지 여우가 많이 살아 유해를 먹고 다니며 흩뜨렸다고 추정할 수 있죠." 30여 분이 흐르자 유해발굴 현장에 도착했어요. "유해 한 구가 나왔어요. 참배하고 현장을 둘러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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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기자단이 대대장의 지도를 따라 이동했습니다. 철마산 유해발굴 현장은 두 곳이라 학생기자단이 방문한 곳에는 총인원 150명 중 70명이 있었죠. 삽으로 땅을 파는 장병들을 보며 예성 학생기자는 입을 다물지 못했어요. 철마산에 유해가 있는 이유는 뭘까요.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서 싸우는 게 유리하기 때문에 고지에서 전투가 주로 이뤄졌습니다. 이곳에선 1951년 6월 1~9일 우리 국군 1사단과 북한군 8사단이 싸웠죠. 수류탄·박격포탄 등이 발견되고 북한의 총포, 아군의 총포 등도 나오죠." 이 대대장의 설명을 들은 학생기자단은 유해발굴 현장을 관리·감독하는 배대장 상사 지도를 따라 헌화 장소로 이동했죠. 김율아·김률희·안예성 학생기자가 헌화를 했고 다른 두 친구는 옆에서 묵념했습니다. 발을 디디는 것도 어려운 곳에서 헌화를 마친 학생기자단이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위험한 곳에서 발견되나요?” 배 상사가 답했어요. “유해가 어디 있을지 모르니 아래서부터 꼼꼼하게 찾으면서 올라와야 해요. 여러분 표현 따라 ‘위험하게’ 찾아야 유해를 찾을 수 있죠. 경사진 곳에서 주로 전투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숨어서 적군과 싸울 수 있는 구멍 등을 만들기에도 경사가 적합했겠죠. 유해를 찾는 것도 어려워 보인다고요. 전쟁에 참여하셨던 분들은 더 힘드셨겠죠. 그분들이 나라를 지켰던 마음을 여러분이 늘 기억하며 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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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김률희(서울 성동초 5) 학생기자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인 6·25 전쟁에서 싸우신 분들의 유해발굴 현장에 가서 안타까움과 경이로움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일단, 전쟁이 발발한 지 70년 가까이 되는데 유해를 다 못 찾은 것, 그리고 발견된 유해가 1만여 구인데 가족의 품으로 다시 돌아간 유해는 얼마 되지 않는 점이 안타까웠죠. 또, 발견된 유해·유품이 어떻게 70년 동안 보존되었는지 놀라웠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기회를 통해 유해발굴 현장을 볼 수 있어서 슬픔과 감사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김율아(경기도 소하초 6) 학생기자
국군 유해발굴 현장에 가서 장갑을 끼고 국화를 유해의 옆에 놓고 전쟁 때 유품을 봤어요. 적군의 모자 장식, UN군이 먹었던 커피봉지 등 허락을 구해 만져 보며 오랫동안 보존됐다는 게 신기하다고 느꼈어요. 발굴된 유해는 많은데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유해가 몇 구밖에 안 돼 안타깝고 슬펐죠. 주로 정강이뼈 등 단단하고 굵은 뼈들이 발견된다고 하셨어요. 또, 나뭇가지와 뼈를 구별하는 것도 물어봤는데요. 나뭇가지는 속이 꽉 차 있고 유해는 속이 텅 비어 있다고 하셨어요. 무더위에도 열심히 유해를 발굴하는 국군이 정말 멋졌죠. 유해발굴을 통해 6·25전쟁의 또 다른 역사를 배웠고 호국 정신을 느꼈습니다.

안예성(인천 연성중 1) 학생기자
이건 정말 어디에서도 할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6·25 참전용사들이 전투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우신 것을 떠올리니 전쟁의 참혹함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죠. 다시는 전쟁이 없었으면 좋겠고 같은 민족끼리 적대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추현준(경기도 다원초 6) 학생기자
처음에 산에 올라갈 때는 많이 힘들었지만 군인분들이 도와주셔서 나중에는 하나도 안 힘들었죠. 대대장께 유해발굴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 6·25 전쟁 얘기를 잠깐 해주셨죠. 전쟁이 굉장히 치열했고 그로 인해 많은 국군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게 안타까웠어요. 돌아가신 국군들의 유해를 찾으려고 하는 국군이 존경스러웠죠. 특히 배 상사께서 유해·유품들을 설명해주셨던 부분이 인상 깊었습니다. 국군의 유해를 찾으려는 국군의 모습이 너무나 멋져서 저도 꼭 멋있는 군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죠.

홍섬(서울 서사부초 6) 학생기자
취재하러 가는 길은 자동차가 올라가기 힘들 정도로 험했지만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은 저의 마음은 이미 산속에 가 있었습니다. 현장서 유해와 유물들을 보며 설명을 들으니 사회시간에 배우고 책을 읽었을 때보다 더 마음이 아팠죠. 많은 전사자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실 수 있도록 더욱 관심을 갖고 주위에도 알려야겠습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 잊지 않겠습니다. 유해발굴 현장에 고생하시는 국군장병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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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강민혜 기자 kang.minhye@joongang.co.kr
사진=이원용(오픈스튜디오), 동행취재=김률희(서울 성동초 5)·김율아(경기도 소하초 6)·안예성(인천 연성중 1)·추현준(경기도 다원초 6)·홍섬(서울 서사부초 6) 학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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