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트럼프도 시진핑도, 글로벌 리더십 없는 ‘G0시대’ 가속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포스트코로나 대변혁이 온다 ① 국제질서의 대전환

지난해 12월 31일 중국 우한(武漢)에서 시작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6개월 가까이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통계 사이트 월도미터에 따르면 지금까지 전 세계 215개 국가·자치령에서 890만 명이 넘는 확진자와 46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웬만한 전쟁과 맞먹는 인명 손실이다. 이동 제한에 따른 경제·일자리 타격도 1929~39년의 대공황 때와 비교될 정도다. 이런 코로나19 팬데믹은 국제정치에 얼마나 영향을 주고 어떤 변환을 이끌 것인지가 관심사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국제정치 변환은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앙일보·정책기획위 공동기획 ① 국제질서의 대전환 #미국, 코로나 사태로 재정 악화 #납세자 눈치 보는 ‘내부 중심 정치’ #각국, 방역·무역 공존보단 각자도생 #백신 개발·공급망 놓고도 각축 치열 #“국가간 경쟁하는 신전국시대 돌입”

코로나19는 국제정치 분야에서 이미 진행되던 ‘G0 세계’ 진입에 급가속 페달을 밟을 것으로 전망된다. G0는 과거 국제정치를 주도하던 미국과 서유럽의 영향력이 줄고 신흥국·개도국 입지가 커지면서 새롭게 형성된 질서와 세력의 공백을 가리킨다. 시리아 내전이나 기후변화 등 글로벌 문제 해결이나 목표 달성을 단일 강대국이나 국가 집단이 정치적·경제적으로 이끌 수 없는 시대가 됐다.

코로나19 이후 미국은 ‘세계의 경찰’ 역할과 국제정치 리더십을 더욱 빠른 속도로 포기하면서 국제사회의 G0화를 가속하고 있다. 고립주의·미국 중심주의를 부르짖으며 2017년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 이후 전 세계의 미군과 미국 기업·자본의 본토 귀환에 몰두 중이다. 1945년 이후 국제 질서를 이끌고 냉전 이후 단극체제를 주도했던 세계 제국 미국의 위상은 변화하고 있다.

트럼프, 한·일 방위비 압박 … WHO 탈퇴선언

전문가 6인의 포스트코로나 국제질서 전망

전문가 6인의 포스트코로나 국제질서 전망

관련기사

이와 맞물려 동맹시대도 흔들리고 있다. 미국은 유럽에선 냉전 초기인 1949년 결성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를 내세워 소련·러시아를, 동북아에선 한·미, 미·일 동맹을 앞세워 중국에 맞서며 국제 질서를 좌우해 왔다. 하지만 트럼프가 나토 동맹국들에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의 2% 이상 지출한다는 지침의 이행을 다그치고, 한국과 일본엔 방위부담금 증액을 압박하면서 동맹체제는 위기를 맞고 있다.

실제로 트럼프는 코로나19 국면에서 유럽·동북아 등 ‘먼 세계’에 대한 관심을 축소하고 미국 중심주의로 빠르게 회귀 중이다. 트럼프가 지난 15일 웨스트포인트 졸업식에서 “우리는 세계의 경찰이 아니다”고 대놓고 말한 게 그 절정이다. 리처드 그레넬 전 주독 미국대사는 지난 11일 독일 빌트지 인터뷰에서 “해외 주둔 미군 감축은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해 왔던 일”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5일엔 트럼프가 9월까지 주독미군 9500명 철수를 지시했다고 워싱턴포스트(WP) 등이 보도했으며, 트럼프는 15일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이를 확인했다. 스콧 스나이더 미 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은 “미국은 이미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때부터 세계 경찰국가 역할을 포기했다”며 “트럼프와 최근 상황은 거기에 가속 페달을 밟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재정 악화도 미국의 고립을 촉진한다. 올해 미 의회는 경기 부양을 위해 4차례에 걸쳐 2조8000억 달러를 풀었다. 이에 밀려 동맹·국제 협력 분야 예산 감축은 이제 도도한 뉴노멀이 될 태세다. 미국은 국제적 역할보다 납세자의 눈에 더 신경 쓰는 ‘내부 정치 중심 시대’로 접어들었다.

트럼프가 중국 편향을 빌미로 세계보건기구(WHO)의 예산 분담 중단과 탈퇴를 선언한 것도 이런 경향과 맞물려 있다. 코로나19는 2차대전 뒤 일상화됐던 국제 협력의 흐름을 급속히 바꾸고 있다.

코로나19로 세계 각국은 글로벌 시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급속히 개별 국가 중심 시대로 전환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방역에서 국가 이기주의가 판을 쳤다. 트럼프는 코로나 백신을 독점하려 독일 바이오기업 매입을 추진하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반대에 직면했다. 현재 다국적 제약업체 아스트라제네카와 옥스퍼드대가 개발을 주도하는 백신의 공급망을 놓고도 국제 경쟁이 치열하다. 방역부터 무역까지 각국이 국가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국경을 막고 장벽을 세우는 일이 다반사다.

중국의 주펑(朱鋒) 난징(南京)대 국제관계연구원 원장은 “코로나19로 냉전 이후 세계를 휩쓸었던 자유주의 가치관 대신 정부가 자원 배분에 강력하게 관여하는 신국가주의가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주 원장은 “여기에서 보듯 세계는 국가 간 경쟁과 경계가 계속 확장하는 신전국시대(新戰國時代)에 돌입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EU도 코로나 번지자 국경 닫기에 급급

코로나19 상황에서 지역 기구도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유럽연합(EU)은 협력과 공존을 위해 결성됐지만 코로나19가 터지자 각국은 국경 닫기와 마스크·방호복·호흡기의 외부 유출 막기에 급급했다.

지역협의체인 동남아국가연합(ASEAN)·미주기구(OAS)·걸프협력회의(GCC)·아프리카연합(AU)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로 ‘함께 잘살자’는 인류 공영의 국제정치는 실종되고 강력한 국가 중심주의의 거대한 장벽이 국제사회에 들어서고 있는 셈이다. 인류는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베이징=유상철 특파원, 전수진 기자 ciimccp@joongang.co.kr

중앙일보·정책기획위 공동기획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