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갭투자 대출 규제, 전세가율 끌어올려 중장기 효과 미지수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691호 09면

6·17 부동산 대책의 역설

갭-투자. 간격을 뜻하는 영어 갭(Gap)에 한자어인 투자(投資)를 합성한 말로, 전세를 끼고 주택을 구입하는 것을 일컫는 부동산시장의 신조어다. 매매·전세가격의 ‘갭’ 만큼만 비용을 들이면 집을 살 수 있다는 의미다. 2016년 전후로 서울·수도권과 지방 대도시를 중심으로 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게 유행처럼 번지면서 갭투자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지금은 갭투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부정적인 편이지만, 사실 2016년 이전까지만 해도 갭투자는 무주택자가 내 집을 마련하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은행 대출이자가 연 5% 이상 하던 시절, 대출보단 부담이 덜한 전세를 끼고 집을 산 후 5~10년간 돈을 모아 전세보증금을 돌려주고 입주하는 예가 적지 않았다.

강남 4구 전세 끼고 집 구입 비율 #올 1월 58%서 지난달 73%로 급증 #서울 전세가율 47개월 만에 상승 #전셋값 올라 갭투자 더 쉬워져 #현금 동원 투자자 막을 방법 없어 #‘양질의 주택 계속 공급’ 신호 줘야

그러나 2016년께 무주택자는 물론 유주택자에 20·30대까지 대출을 끌어다 갭투자에 나서면서 투자보단 시세차익을 노린 ‘투기’란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대출이자가 낮을 때라 굳이 전세를 끼고 집장만을 할 이유가 없었고, 집값이 오르면 곧바로 집을 팔아 차익을 챙기는 사람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도 갭투자는 정상적인 부동산 거래가 아닌 투기라고 보고 지속적으로 규제를 강화했다. 대표적인 게 지난해 말 내놓은 12·16 부동산 대책이다. 당시 정부는 ▶9억원 초과 주택 보유자에 대한 전세보증 제한 ▶전세대출 후 9억원 초과 주택 매입 때 대출금 회수 등으로 갭투자를 차단하겠다고 천명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갭투자는 줄지 않았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국토교통부가 국회에 제출한 ‘아파트 입주계획서’에 따르면 올 1~4월 투기과열지구 내 주택 매수자 중 ‘임대’를 목적으로 아파트를 매입한 사람은 2만1096명이었다. 지난해 같은 기간 9386명보다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서울 강남 4구(서초·강남·송파·강동구)에서 전세를 끼고 집을 산 비중은 올해 1월 57.5%였으나 지난 달엔 72.7%로 급증했다. 임대가 목적이거나 전세를 끼고 집을 샀다고 무조건 투기로 몰 수는 없지만, 입주 의사가 없으면서 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건 갭투자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다. 국토부가 17일 내놓은 문재인 정부 21번째 부동산 대책에 강도를 높인 갭투자 규제를 담은 배경이다.

국토부는 규제지역을 확대하고, 모든 규제지역에서 주택 구입을 위해 주택담보대출을 받으면 주택 가격과 상관없이 6개월 이내에 전입하도록 했다. 투기과열지구 내 시가 3억원이 넘는 아파트를 신규 구입하면 전세대출 보증을 제한하고, 전세대출을 받은 후 투기과열지구의 3억원 초과 아파트를 사면 전세대출을 즉시 회수키로 했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수석전문위원은 “대출 규제에다 전입 요건을 강화한 만큼 대출을 끌어다 갭투자하는 투기성 매매는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울 강남구의 삼성부동산 김용수 사장도 “전세대출을 넉넉히 받아 집을 사려던 사람은 확실히 줄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갭투자를 근절하긴 쉽지 않을 것 같다. 중장기적으론 되레 갭투자를 늘릴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잇단 정부 규제에 전세 수요만 늘면서 아파트 전세가격이 상승세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매매·전세가격의 갭이 좁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KB국민은행 리브온에 따르면 매매·전세가격의 간격을 보여주는 전세가율(매매가격 대비 전세가격 비율)은 올 2분기 들어 하락세가 멈췄다. 서울은 특히 지난 달 54.8%로, 전달에 비해 0.1%포인트 상승했다. 월간 단위로 서울 전세가율이 상승한 건 2016년 6월 이후 47개월 만이다. 시장에선 최근 집값이 보합권인 반면 전세가격 오름폭은 커져 당분간 전세가율이 상승할 것으로 내다본다. 전세가율이 상승하면 갭투자는 더 쉬워진다.

2016년께 전국에 갭투자 바람이 불었던 것도 높은 전세가율 영향이 컸다. 2010년부터 이어진 전세난으로 당시 아파트 전세가율은 서울 75.1%, 경기도 78.9%, 전국 평균 75.6%에 달했다. 10억원짜리 아파트라면 2억~2억5000만원만 있으면 집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전세대출 등을 활용하면 실제로는 1억원도 안 되는 돈으로 10억원짜리 아파트를 살 수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부동산 전문가는 “대출 규제와 코로나19 등으로 집을 사려던 사람까지 전세로 눌러 앉으면서 전세가격이 올라 갭투자에 유리한 여건이 돼 가고 있다”고 말했다.

갭투자의 또 다른 자양분인 집값도 여전히 불안하다. 조금 내리는가 싶더니 다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올 하반기 수도권에서만 30조원이 넘는 토지보상금이 풀린다. 언제든 부동산으로 흘러들 수 있는 시중 부동자금도 1100조원에 이른다. 정부 대책에 빈틈도 여전하다. 주택담보대출이나 전세대출이 아닌 현금을 동원한 갭투자는 막을 방법이 없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자금조달계획서를 제출해야 하지만, 출처가 불분명한 현금이 아니라면 걸림돌은 아니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갭투자를 차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집값을 안정시키려면 결국 ‘수요가 원하는 양질의 주택을 꾸준히 공급한다’는 신호를 줘야 한다”며 “수도권 3기 신도시를 추진 중이지만 입주 때까지 4~5년은 걸리기 때문에 그 전까지 최소한의 주택을 계속 공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파트 세입자 임대차 기간까지 전세대출 회수 유예키로

서울 시중은행 대출 상담 창구 모습. [뉴스1]

서울 시중은행 대출 상담 창구 모습. [뉴스1]

전세자금대출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다. 주택담보대출 규제 강화로 집 사려는 수요가 급감하고, 전세시장이 들썩이고 있는 영향이다.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의 지난 달 말 전세대출 잔액은 90조9999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말 81조3058억원이었는데, 올해 5월까지 10조원 가까이 늘었다. 지난해 동기 대비 증가액(6조9795억원)보다 38%가량 많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월 은행권의 전세대출 증가액은 3조7000억원이다. 이는 2018년 11월(2조9000억원) 이후 15개월 만에 최대 규모다. 전세대출 증가액은 지난해 2월부터 올해 1월까지 2조원대를 유지하다 지난 2월부터 증가액이 3조원대로 뛰었다. 3월에는 소폭 감소했지만 3조원대를 기록했다. 주택금융공사의 올 1분기 신규 전세대출 보증은 9조3000억원으로 건수로는 10만5000건이었다. 1년 전과 비교해 각각 1조9000억원, 1만2000건 늘었다.

전세대출이 급증세인 건 서울 등 주요 지역의 아파트 매매가격이 오르고, 정부의 주택담보대출 규제로 매매보다 전세 수요가 늘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한은은 “고가 주택 보유자에 대한 전세대출 규제가 강해지자 새 규정 적용을 피해 시행일(1월 20일) 전 전세 계약이 늘고 관련 전세대출도 시차를 두고 불어난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편 6·17 부동산 대책에 담긴 전세대출 규제가 투기 수요를 견제하는 수준을 넘어 섰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정부가 예외 조항을 마련 중이라고 밝혔다. 우선 정부는 매입한 아파트에 기존 세입자의 임대차 기간이 남아 있다면 해당 기간까지는 전세대출을 회수하지 않기로 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규제지역 아파트의 경우 대부분 시가 3억원이 넘는 점을 감안했다”며 “주택을 샀다고 무조건 전세대출을 회수하는 게 아니라 매입한 아파트에 기존 세입자의 임대차 기간까지는 회수를 유예해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하면 규제지역이라도 전세에서 자가로 집을 옮기는 실수요자는 전세대출 회수로 어려움을 겪지 않고 정상적인 주거사다리를 이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황정일 기자 obidius@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