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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시시각각

‘일하는 국회’ 그 위험한 질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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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 구원을 기다리며 분란의 말만 일삼던 교회에 보내는 사도 바울의 경고(신약 데살로니가후서)가 우리 국회에도 통하게 될까. 176석의 거대 여당이 ‘일하는 국회’를 내세운다. 1호 법안으로 추진하는 ‘일하는 국회 법안’에는 회의 불출석 의원의 세비를 삭감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열심히 일하자는 의지, 당연히 환영할 일이다. 그런데도 괜히 시비 거는 것은 종종 효율성 앞에 민주주의가 위협받았던 역사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효율성 앞세워 야 압박하는 여당 #소수 존중 가치관 스스로 뒤집어 #‘민주주의 비용’ 마저 이제 아깝나

의회 정치의 현장을 배우려고 학생이 많이 찾는 국회 내 헌정기념관에는 국회의 기능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입법, 정부 견제, 재정 심사. ‘일하는 국회’ 구호에는 이런 기초적 균형감각이 작동하고 있을까. 기를 써서 법사위를 장악한 의도가 정권 말 불거질 권력형 비리 문제를 미리 단도리하자는 것 아니냐는 의심마저 나오는 상황인데.

이런 의심이 근거가 있느냐고? 박병석 국회의장이 상임위원장 배분안을 놓고 사흘간의 말미를 주자 국회의장실과 민주당 당원 게시판 등에는 열성 친문들의 성토가 가득했다. “민주당이 상임위원장 18석을 다 차지해야 한다” “법사위를 넘겨주면 탈당하겠다” 등. 이런 모습, 조국 사태나 윤미향 사태 때 익히 봐서 새삼스럽지도 않다. 여당이라고 정부 견제 못하리란 법은 없지만, 극성스러운 지지 세력에 휘둘리는 여권의 모습을 봤을 때 그런 기대는 난망 아닌가. ‘일하는 국회’가 국회 위상을 높일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일’이라는 게 권력 엄호를 위한 것이라면 의회민주주의 입지는 위태롭기만 하다.

‘일하는 국회’ 구호가 선뜻 와닿지 않는 것은 지금 여당의 야당 시절 모습이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19대 국회 말미이던 2016년 2월, 정부의 테러방지 법안에 대해 192시간27분에 걸친 세계 최장 필리버스터로 맞섰다. 이른바 ‘동물 국회’를 막기 위해 도입된 국회선진화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악법에 맞서 ‘입법 생산성’을 낮추는 지연 전략은 당시 민주당으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랬던 민주당이 여당이 되자 패스트트랙 기간마저 줄이자고 한다. 생산성을 앞세워 야당을 압박하는 모습은 이율배반을 넘어 가치 전도(顚倒)라고 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치 제도다. 지금까지 존재한 다른 정치 제도를 제외하고는.” 인용조차 진부할 정도로 유명한 처칠의 이런 말이 아니더라도 민주주의는 비용이 많이 든다. 권력자들은 이런 비용을 아끼려다 더 큰 사달을 맞곤 했다. 대표적 사례가 2015년 6월 박근혜 정부의 국회법 파동이다. ‘시행령’으로 입법절차 낭비를 줄이려던 정부 의도가 국회법 개정에 막히자 박 전 대통령은 “갈등과 반목, 비판만 하는 구태 정치”라며 국회를 맹비난하며 거부권을 행사했다. 여당 원내대표는 대통령의 ‘배신자’ 한마디에 물러났다. 그러나 결국 이 사건이 박근혜 정부 몰락의 씨앗이 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적극적 지지 세력을 정치적 자산으로 지닌 현 정부도 그 유혹을 느낀다. 야당 지도자 시절, 의회민주주의를 강조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100일 회견에서 톤이 바뀌었다. “국민은 간접민주주의에 만족하지 못한다.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 직접민주주의는 전체주의와 포퓰리즘의 토양이 되기 쉽다는 경고는 촛불 앞에서 잊혀 버렸다. 강한 권력자와 이를 추종하는 대중 사이에서 의회민주주의는 위태롭다. 야당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런 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일과 효율을 앞세워 반대파를 압박하는 태도는 자기 확신이 아니고서는 나오기 힘들다. 그러나 민주주의란 스스로가 옳다고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 체제다(미국 정치학자 엘머 에릭 샤츠슈나이더). 누구보다 민주주의를 위해 열심히 ‘일’해 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고 싶어질 줄은 몰랐다.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