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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엔 관과 수의…'장래' 위해 '장례' 택한 20대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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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이트 면접에서 제 전공을 잘못 듣고 '장래지도학과'에서는 뭘 배우는지 묻더라고요. 미래를 계획해주는 학과냐고 하던데요."

이런 상황, 대학생 임승범(25)씨에겐 익숙합니다. 그럴 때면 웃으며 진짜 전공을 소개한다네요.

[밀실] 제36화 젊은 장례지도사를 만나다

임씨는 사실 '장례지도학과' 학생입니다. 장례지도사가 되기 위한 학업을 하는 전공이죠. 우리에겐 장의사라는 호칭이 더 익숙하죠. 2012년 '장례지도사 국가자격증'이 생긴 이후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미래 계획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라이프 강남장례지도사교육원에서 이재윤(31)씨가 마네킹에 입힌 수의를 다듬고 있다. 백경민 인턴

오늘라이프 강남장례지도사교육원에서 이재윤(31)씨가 마네킹에 입힌 수의를 다듬고 있다. 백경민 인턴

지난해 출생자는 30만9000명, 사망자는 31만4000명. 처음으로 사망자의 수가 출생자의 수를 앞지른 해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한때 장의사라 불렸던 장례지도사가 20대 사이에선 유망 직종이 됐습니다.

1999년 을지대에 장례지도학과가 처음 개설된 이래 지금은 5개 대학에서 장례지도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취업 불황에도 평균을 웃도는 취업률로 '블루오션'이 됐다네요. 장례지도학을 찾는 20대가 몰리고 있죠.

강의실에 놓인 관짝·유골함…수업 방식은

8일 찾은 경기 성남 을지대 장례지도학과 실습 강의실. 마스크를 쓴 15명의 학생들이 흰 가운을 걸쳐 입었습니다. 강의실엔 나무로 짜인 커다란 관 2개가 놓여있고요.

교수가 이름을 부르자 학생들이 앞으로 나와 흰 천으로 관을 동여매기 시작했습니다. 고인을 관에 모시고 옮기기 위한 '결관' 실습인데요. 3인 1조가 되어 들썩거리는 관을 한명이 눌러주고, 나머지 두 명은 열심히 매듭짓기에 바쁜 모습입니다.

8일 을지대 장례지도학과 실습 수업에서 학생들이 천으로 관을 묶고 있다. 백경민 인턴

8일 을지대 장례지도학과 실습 수업에서 학생들이 천으로 관을 묶고 있다. 백경민 인턴

능숙한 솜씨로 매듭까지 지었지만, 교수는 마무리가 아쉬웠던 모양입니다.

"여기 매듭을 더 꽉 조여야지. 이렇게 하면 상주들이 관 들고 가다가 떨어뜨릴 수도 있잖아."

강의실 한 구석엔 시신 분장 실습에 쓰는 얼굴 마네킹 수십 개가 쌓여 있습니다. 각양각색의 유골함도 전시돼 있습니다. 남다른 소품들이 있을 뿐, 예비 장례지도사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은 여느 대학교 강의실과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수많은 진로 중에 이들은 왜 장례지도사의 길을 택하게 된 걸까요?

세월호 참사 겪고, '저승사자' 웹툰 보고…

8일 밀실팀과 인터뷰한 을지대 장례지도학과 김하솜(25)씨와 임승범(25)씨. 정유진 인턴

8일 밀실팀과 인터뷰한 을지대 장례지도학과 김하솜(25)씨와 임승범(25)씨. 정유진 인턴

"솔직히 돈 때문에 진로를 택하긴 했어요. 직업 전망도 좋다고 하니 진학을 꺼릴 이유가 없었죠."

임씨는 6년 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고 나서 장례지도학과를 알게 됐습니다. "왜 남들한테 무시당하는 직업을 가지려고 하느냐"는 주변의 우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임씨는 “장례지도사 연봉이 3000만원 초반이라는데, 요즘엔 반려동물 장례문화가 발달하면서 직업 전망이 더 좋아져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죠.

개인적 경험으로 장례지도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기도 합니다. 장례지도사 이재윤(31)씨는 6년 전 세월호 참사를 겪고, 다니던 일반 직장을 그만둔 뒤 자격증을 따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팽목항에 물품전달지원 봉사활동을 갔었는데요. 경기 안산 장례식장에 일손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연히 들른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학생들의 시신과 유족들을 자주 접하게 되면서, 고인을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낼 수 있게 돕는 일에 관심이 생겼죠.

오늘라이프 강남장례지도사교육원에서 이재윤(31)씨가 마네킹에 입힌 수의를 다듬고 있다. 백경민 인턴

오늘라이프 강남장례지도사교육원에서 이재윤(31)씨가 마네킹에 입힌 수의를 다듬고 있다. 백경민 인턴

을지대 장례지도학과 4학년 김하솜(25)씨는 좋아하는 웹툰 때문에 장례지도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죽음에 관하여'라는 네이버 웹툰인데요. 양복 차림의 젊은 저승사자가 죽음을 맞는 사람들과 만나 생기는 이야기를 그린 만화입니다. 죽음에 대해 학문적으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 성적에 맞춰 진학했던 대학을 자퇴하고 다시 재입학하게 됐습니다. 취미가 진로까지 바꾼 겁니다.

남아 있는 편견…부모님 설득도 아직  

을지대 장례지도학과 강의실에 놓인 분장 실습용 마네킹. 정유진 인턴

을지대 장례지도학과 강의실에 놓인 분장 실습용 마네킹. 정유진 인턴

"죽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니까 '귀신 보냐'는 질문도 많이 듣죠. 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임승범씨)

장례지도사를 향한 편견은 20대 장례지도사들의 어깨를 무겁게 하는 짐입니다. 과거보다 인식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곱지 않은 시선이 남아있죠. 아직도 장례지도사를 '염쟁이'(염은 시신을 수의로 갈아입힌 뒤 베나 이불로 감싸는 일을 말함)라고 부르는 어른들을 볼 때면 상처를 받는다고 해요.

부모님과의 마찰은 불가피합니다. 내년 졸업을 앞둔 김하솜씨는 아직도 부모님을 설득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는데요. 부모님은 "제발 '평범한 직업'을 가지라"고도 말했습니다. 그저 여러 직업 중의 하나인 '평범한 장례지도사'로 인정받기 쉽지 않은 겁니다.

3년차 장례지도사 김으뜸(27)씨는 "일하고 온 날엔 여자친구가 자기 몸에 손닿는 것조차 꺼렸다"고 말했는데요.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이 많으니 직업을 숨길 때도 많다고 합니다. 죽은 사람을 대하는 직업에 대한 편견은 어쩔 수 없다고 밝힙니다. 과거 장례 문화에 대한 불신도 한몫한다고 말하기도 했죠.

안타까운 죽음 마주하는 일상 "사명감 필수"

오늘라이프 강남장례지도사교육원에서 교육생들이 마네킹의 얼굴을 덮고 있다. 백경민 인턴

오늘라이프 강남장례지도사교육원에서 교육생들이 마네킹의 얼굴을 덮고 있다. 백경민 인턴

높은 취업률에 눈길이 갈 수 있지만, 장례지도사는 매일 죽음을 마주하는 일입니다. 이들은 "단순히 돈을 벌 목적으로 일을 시작하면 안 된다"고 입을 모았는데요.

2년차 장례지도사 김민규(24)씨는 '배나 머리가 터져서 온 시신'을 보는 것보다 고인의 안타까운 사연을 접하는 게 더 힘들다고 토로했습니다. 눈썹 문신이 잘못됐다는 이유로 극단적 선택을 한 16살 여학생의 시신도 수습했었죠. 막 걸음마를 뗀 두 아이의 엄마 시신을 염습할 땐 아이들이 엄마가 왜 누워있냐고 웃으며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일은 고되고 시선은 따갑지만, 20대 장례지도사들을 지탱해주는 건 보람입니다. 김으뜸씨는 "가족이 없는 무연고자의 시신을 수습하거나 생계가 어려운 유족들이 저렴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도울 때 가장 뿌듯하다"고 말했습니다.

을지대 장례지도학과 강의실에 있는 위패. 정유진 인턴

을지대 장례지도학과 강의실에 있는 위패. 정유진 인턴

20대 장례지도사의 등장이 장례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함께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이정선 을지대 장례지도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는 아직도 죽음을 부정적으로만 인식하다 보니 장례 문화도 폐쇄적"이라며 "'웰다잉법'이 제정된 것처럼 우리 사회가 죽음을 성숙하게 받아들일 때 장례 문화도 긍정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밀실은 ‘중앙일보 레니얼 험실’의 줄임말로 중앙일보의 20대 기자들이 도있는 착 취재를 하는 공간입니다.

박건·최연수 기자 park.kun@joongang.co.kr
영상=백경민·이지수·정유진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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