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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성모상과 소녀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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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성모 마리아의 죽음을 상상하게 한 것은 루브르에 걸려 있는 카라바조(1571?~1610)의 작품이었다. 루브르 초대 관장 이름을 딴 드농관에 전시된, 관람객에게 둘러싸인 모나리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카라바조의 ‘동정녀의 죽음(La Mort de la Vierge·사진)’에는 전혀 다른 마리아가 있었다. 천사와 함께 승천하는 모습도 아니고, 아들(예수)의 시신을 안고 고통을 구원으로 승화시키는 성스러운 여인상(미켈란젤로의 피에타)도 아니었다.

그림 속 마리아는 허름한 옷을 입고 누워 있다. 평범한 아낙네의 얼굴이다. 천으로 제대로 덮지도 않아 퉁퉁한 몸통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시신이 올려진 탁자 밖으로 다리가 나올 정도로 장소도 남루하다. 안내한 이가 설명해주지 않았다면 유럽의 한 촌부(村婦)를 그린 민화로 알고 스쳐 지나갈 뻔했다.

카라바조의 ‘동정녀의 죽음(La Mort de la Vierge)’

카라바조의 ‘동정녀의 죽음(La Mort de la Vierge)’

그 뒤 읽은 글들에 따르면 이 그림은 한 수도회의 주문으로 제작돼 로마의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카라 성당에 걸렸던 작품이다. 그림은 곧바로 철거됐다. 기대했던 성스러움을 찾을 수 없었던 수도회 책임자들이 당장 떼어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 뒤 우여곡절을 겪으며 영국으로 간 그림은 루이 14세의 손을 거쳐 루브르에 소장됐다.

그림 속 얼굴과 몸의 모델은 강에 투신해 목숨을 끊은 임신한 매춘부였고, 카라바조가 시체공안소까지 찾아가 시신을 보고 그림을 그렸다는 속설이 있다. 대관절 왜 수도회가 주문한 성화를 그토록 초라하게 그렸을까. ‘성스러움, 즉 한 줄기 은총의 빛줄기는 크고 화려한 성당이나 추기경과 같은 실력자의 서재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의 밤거리를 서성이는 매춘부들에게도 임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 김상근 연세대 교수의 추론(『카라바조, 이중성의 살인미학』)이다.

사람의 딸로 태어나 사람의 삶을 살았던 성모 마리아는 일찍이 남편을 잃고 홀로 키운 아들마저 먼저 하늘로 보냈다. 아들은 외견상 비참하게 인간의 삶을 마감했고, 그 뒤 마리아는 박해에 시달리다 이국땅(터키 에페소)에서 숨을 거뒀다. 카라바조는 신산했던 마리아의 생을 그림에 담으려 한 것 같다. 중세 교회의 도그마적 숭고함 대신에 성(聖)과 속(俗)을 아울러 구원을 표현하려 한 것 같다. 승천 벽화로는 상징할 수 없는 실존적 종교성이 그 안에 있어 보였다.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은 성공작이다. 처음 그것을 봤을 때 슬퍼 보이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소녀의 표정이 머리와 가슴을 때렸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울림을 줬기에 전국 학교와 광장에 300개 이상이 자리하게 됐을 것이다.

이 소녀상의 성공(평론가 최범은 정치적·상업적 성공이라고 평가)은 정형화된 위안부 피해자 이미지를 국민에게 각인시켰다. 치마저고리 입은 꽃다운 10대 소녀의 슬픔과 원망이 섞인 표정이 대표 상징이 됐다. 미술평론가 임근준은 “한국식 이상주의 조각 또는 한국식 염원 투사 조각”이라고 했다.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위안부의 평균 나이가 20대 중반이었고, 일본군이 강제로 끌고갔다는 일반적 인식과 일치하지 않는 피해자 증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인 이나영 교수는 이런 글을 썼다. ‘소녀상은 역사 속에 숨겨진 수많은 여성의 고통스러운 경험들을 관통하는 젠더 부정의의 표상이며, 고통이 만들어지는 구조와 역사에 보다 깊은 관심과 저항을 요청하는 상징물로 봐야 한다.’ 그의 희망과 달리 소녀상은 반일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자극하는 표상으로 자리 잡았다. 진중권씨는 “도대체 전 세계 어느 나라에 동일한 동상을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세우는 경우가 있느냐”고 묻는다. 통념의 틀을 깨고 실존을 택했던 카라바조처럼 소녀상에 드리워진 획일적 피해자 이미지를 걷어낼 이를 기다린다.

이상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