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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 논설위원이 간다

K팝은 사회운동의 무기가 될 수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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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K팝의 정치성이라는 화두

K팝의 해외 팬들은 K팝 영상을 가지고 온라인에서 미국 인종차별 철폐 시위를 주도했다. 인종차별 반대 성명을 낸 방탄소년단. [중앙포토]

K팝의 해외 팬들은 K팝 영상을 가지고 온라인에서 미국 인종차별 철폐 시위를 주도했다. 인종차별 반대 성명을 낸 방탄소년단. [중앙포토]

과연 K팝은 정치적인 음악 장르가 될 수 있는가. 미국 인종차별 철폐 시위에 K팝 글로벌 팬들이 적극적 역할을 하면서, K팝의 정치성이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미국의 K팝 팬들은 경찰의 제보 앱에 방탄소년단·엑소 등의 영상을 대량으로 올려 시위 진압을 방해했다. 시위대의 구호인 ‘BLM(Black Lives Matter·흑인 목숨도 소중하다)’에 맞서 ‘WLM(White Lives Matter·백인 목숨도 소중하다)’ 해시태그가 등장하자, K팝 ‘팬캠(팬이 찍은 영상)’에 ‘WLM’ 해시태그를 달아 무력화시키기도 했다. K팝 팬덤의 온라인 게릴라전에 외신은 “(미 시위대의) 예상치 못한 동맹군”(AP통신), “소셜 미디어계의 가장 강력한 군대”(CNN)라며 주목했다.

K팝 해외팬들 BLM 시위 적극 참여 #다양성 상징이란 K팝 위상 재확인 #국내에서는 ‘비정치성’ 요구 많아 #확대된 영향력과 책임감 고민할 때

K팝 글로벌 팬들은 K팝 스타들과 소속사에 BLM을 공개 지지하고 기부하라는 요청도 했다. 방탄소년단·NCT·레드벨벳·몬스타엑스·에이티즈·씨엘 등이 ‘인종차별 반대’ 선언을 했다. 기부행렬도 이어졌다. 방탄소년단이 BLM 측에 100만 달러를 기부하자, 팬클럽 아미는 27시간 만에 같은 액수를 모아 기부했다. 글로벌 아미 팬덤은 “우리는 흑인 아미를 사랑한다”는 성명도 발표했다.

사실 K팝 팬덤과 정치 시위의 만남은 이례적인 일이다.  국내 팬들이 아이돌 이미지 제고를 위해 봉사나 자선·기부를 하는 경우는 있지만, K팝 가수들은 대부분 ‘비정치적’일 것을 요구받아왔기 때문이다. 달라진 K팝의 위상과 영향력을 보여주는 이번 사태가 K팝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이유다. ‘아티스트의 정치성’을 둘러싼 국내외 팬덤 간 입장 차이도 부각되고 있다.

소수자 문화·다양성 정치의 상징 K팝

K팝의 해외 팬들은 K팝 영상을 가지고 온라인에서 미국 인종차별 철폐 시위를 주도했다. 인종차별 반대 성명을 낸 박재범. [중앙포토]

K팝의 해외 팬들은 K팝 영상을 가지고 온라인에서 미국 인종차별 철폐 시위를 주도했다. 인종차별 반대 성명을 낸 박재범. [중앙포토]

방탄소년단으로 상징되는 미국 내 K팝의 부상은 ‘백인 주류 문화에 대한 반문화’ ‘비주류·소수자·다양성의 아이콘’이라는 K팝의 위상과 관련 있다.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 강화된 백인중심주의·보수주의에 대한 반감은 아시아 문화에 대한 관심, K팝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변방의 중소기획사 출신으로 서구 메인스트림 음악계를 ‘접수’한 ‘언더독’ 방탄소년단이 그 중심이었다. 음악평론가 미묘는 “(방탄소년단 미국 공연장에서) 국내 지상파 방송이 아무리 금발 백인 여성을 집중적으로 찾아 비춘다 한들 K팝 열풍의 몸통은 인종적·성적 소수자”라며 “BLM 시위 지지층에 K팝과 친숙한 이들이 많다. 세계 대중에게 K팝은 이미 다양성 정치라는 이름으로 소비되고 있다”고 썼다.

K팝의 해외 팬들은 K팝 영상을 가지고 온라인에서 미국 인종차별 철폐 시위를 주도했다. 인종차별 반대 성명을 낸 NCT. [중앙포토]

K팝의 해외 팬들은 K팝 영상을 가지고 온라인에서 미국 인종차별 철폐 시위를 주도했다. 인종차별 반대 성명을 낸 NCT. [중앙포토]

캐나다 토론토대 미셸 조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K팝 해외 팬들은 다양하고, 진보적이며, 소셜미디어에 능하다”며 “K팝이 한국에서는 주류 상업문화지만 북남미에서는 여전히 서브컬처”이고, 유색인종과 퀴어(성소수자) 팬들이 많다고 말했다. “K팝이 LGBT(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 팬들을 적극 대변하지는 않지만, 공격적인 이성애 규범성을 강하게 내세우지 않아 이들에게 상대적인 안정감을 준다”라고도 분석했다. 해외 팬들이 일상적 팬 활동을 통해 주동자 없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조직화·세력화한 강렬한 체험이, 향후 이들이 사회 이슈를 선도하는 정치적 그룹으로 전환할 가능성을 높인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K팝의 해외 팬들은 K팝 영상을 가지고 온라인에서 미국 인종차별 철폐 시위를 주도했다. 인종차별 반대 성명을 낸 씨엘. [중앙포토]

K팝의 해외 팬들은 K팝 영상을 가지고 온라인에서 미국 인종차별 철폐 시위를 주도했다. 인종차별 반대 성명을 낸 씨엘. [중앙포토]

미국 루이스앤클라크대 신라영 박사는 ‘K팝 팬덤에 대한 퀴어적 시선’이란 논문을 통해 “외국팬은 K팝을 퀴어 텍스트, 퀴어 문화의 하나로 받아들이고 해외 연구자들도 이에 주목하는 경향이 높다”고 소개했다. 논문에 따르면 유튜브에서 꽤 인기 있는, 일본 여성으로 구성된 방탄소년단 커버댄스팀 ‘폭탄보이즈’는 퀴어 문화의 하나인 ‘팬코스(fancos)’ 그룹이다. ‘팬코스’란 여성 팬들이 남자 아이돌의 춤·의상·말투·행동을 따라 하는 ‘크로스 젠더 퍼포먼스’로, 국내 K팝 팬덤에서도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유행했다. 팬코스는 2010년대 들어 퇴조했는데, 아이돌 이미지를 깎아 먹는다는 반발이 팬덤 내부에서 나오면서다. 논문에 따르면 이후 국내 K팝 주류 팬덤은 ‘안티 퀴어’ 정서로 정리됐다. 물론 남성 아이돌끼리 연애하는 설정으로 팬들이 쓰는 소설인 ‘팬픽’이나, 남자 멤버들끼리 의도적으로 친근한 관계를 연출하거나 신체 접촉을 하며 ‘퀴어적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관행은 K팝의 음성적 요소로 여전히 존재한다.

한편 해외 팬들이 K팝 스타들에게 BLM 공개 지지나 기부를 요청하는 과정에서 빚은 ‘무리수’들은 국내 팬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K팝에 흑인음악의 지분이 있으니 지지하라’는 요지의 DM을 스타들에게 마구 보내거나, 국내 팬카페에 가입해 관련 글로 게시판을 도배했다. 아티스트의 정치적 발언에 대한 부담감이 큰 한국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강요’에 가까운 압박 수위, 백인 가수 아닌 K팝 가수를 지목한 점 등이 문제로 지적됐다. 가뜩이나 K팝 시장이 해외 중심으로 바뀌면서 국내 팬덤의 소외감이 큰 상황이라, 국내외 팬덤 간 갈등에 불을 지핀 셈이다.

K팝에 던져진 새로운 책무

전통적으로 K팝은 섹스, 폭력, 약물이 없는 ‘청정 음악’으로 인기를 끌어왔다. 서구 부모가 안심하고 자녀에게 권할 수 있는 음악이란 뜻이다. 지금 서구 소수자 커뮤니티가 K팝을 매개로 교류한다고 하지만, K팝의 메시지 자체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자” “세상이 아닌 내 뜻대로 살자” 등 안전한 ‘자기 선언’ 수준이다.

가뜩이나 한·중·일 등 다국적 멤버로 구성돼 현실 정치의 문제가 발생하면 그 불똥이 팀 전체로 튀니, 비정치적 태도를 견지하는 소속사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국제 이슈는 말할 것도 없고, 여자 아이돌이 페미니즘 소설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사이버 테러를 당하는 현실이다. 한마디로 K팝은 국내에선 비정치적이기를, 해외에선 더 정치적이기를 요구받는 모순적 상황이다. 그러나 “K팝은 사회운동의 목소리로 변환될 수 있는, 현재 유일한 글로벌 인기 음악 장르”(이규탁 한국조지메이슨대 교수)라는 말처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열렸다.

인권· 환경 등 여러 정치적 이슈들이 K팝 스타들의 앞에 놓여 있고, 글로벌 팬들은 때론 ‘위험한’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세계적 영향력을 획득한 K팝이 언제까지 정치적 진공상태에 머무를 수 없다는 얘기다. 스타와 소속사가 좀 더 큰 사회적 역할과 책임감을 고민할 때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대 시위 현장서 불린 K팝 명곡 ‘다시 만난 세계’

소녀시대

소녀시대

국내 K팝 팬덤과 정치 시위는 큰 관련이 없지만 예외적 상황이 있다. 2016년 광화문 촛불시위의 도화선이 된 이화여대 시위다. 정유라의 부정입학에 항의하는 이대생들은 대학 본관 점거 농성을 벌이며 소녀시대(사진)의 ‘다시 만난 세계(다만세)’를 불렀다. 대학 축제 아닌 대학 시위에 등장한 최초의 K팝, 그것도 걸그룹 노래다. 이제까지 대학 시위 현장에서 불렸던 80년대식 운동·민중가요와 극적으로 결별했다.

‘다시 만난 세계’는 2007년 10대 소녀 9명으로 등장한 소녀시대의 데뷔곡이다. 시위에 참여한 이대생들이 10대 초·중반 때 발표된, 또래들의 노래인 셈이다. 소녀시대 곡으로는 ‘소원을 말해봐’ ‘지’ 같은 메가 히트곡은 아니지만 방황 속에서도 꿈과 도전을 놓지 않겠다는, 소녀들의 출사표 같은 청량한 가사와 멜로디가 일품이다.

당시 시위 현장에서 이 노래가 불린 정확한 경위는 알 길 없지만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 거야…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등의 가사가 울컥하는 감동을 준다. 학교의 요청으로 교내에 진입한 1600명 경찰병력에 맞서 ‘다만세’를 부르는 장면은 SNS에 공개되며 큰 화제를 모았다.

이날 시위는 광화문 촛불시위를 지나, 2018년 불법촬영 편파수사에 항의해 젊은 여성 수만 명이 모인 혜화역 시위 등 여성주의 시위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제목부터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담은 ‘다만세’는 여성주의적 연대의 출발이기도 한 명장면에 등장한 K팝 명곡이다.

양성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