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직 찾으려다 '금녀의 벽' 깼다···'10억짜리 차' 모는 그녀

중앙일보

입력 2020.06.17 05:00

업데이트 2020.06.17 15:26

한 대당 무려 10억원이 넘는 차를 몰지 않고 "주차장에 두는 일이 제일 좋은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소방관이다. 불이 나면 가장 먼저 달려가는 것이 이들의 일이다. 소방관들은 대당 십수억원을 훌쩍 뛰어넘는 고가의 차지만 "화재나 큰 사고로 출동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 국민에게 가장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각종 재난의 현장에서 뛰고 있는 이들 중에서 최근 '1호' 수식어를 달게 된 사람을 만났다. 유지연(43) 서울 영등포소방서 소방관이다.

우리나라 1호 여성 소방사다리차 운용사가 된 유지연 서울 영등포소방서 소방관이 소방사다리차와 굴절차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현예 기자

우리나라 1호 여성 소방사다리차 운용사가 된 유지연 서울 영등포소방서 소방관이 소방사다리차와 굴절차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현예 기자

지난 15일 오후 6시, 서울 영등포소방서를 찾아갔다. 3교대 근무를 마친 유 소방관이 마스크를 쓴 채 소방서 바깥으로 나왔다. 유 소방관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대형 특수 소방차량인 소방 사다리차 운용사 자격시험에 합격한 1호 여성 소방관이다.

국내 1호 소방사다리차 운용사…영등포소방서 유지연 소방관
"출동 고되지만 인명 구조 보람…"후배에게 선례되고 싶어요"

소방 사다리차는 화재 진압만이 아니라 인명 구조 역할까지 한다. 소방 사다리차는 길이가 13m 너비는 2.53m에 이른다. 높이도 4m가 넘는다. 운전석은 대략 2m 높이다. 무게도 30t까지 나간다. 사다리를 펼치면 아파트 15층 높이까지 올라간다. 고층건물 화재 진압에 꼭 필요한 분야로 그간 남성 소방관이 일을 도맡아왔다.

소방청은 소방차량 운전과 화재진압 시 사다리를 펼치고 인명 구조 등을 위한 조작을 하는 '소방 사다리차 운용사'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처음으로 전문 자격증제를 도입했다. 지난 5월 말 이뤄진 합숙교육과 시험에 전국에서 20명의 소방관이 응시해 14명이 자격증을 거머쥐었다. 유 소방관은 이번 시험에서 여성 소방관으로는 처음으로 자격증을 따냈다.

유지연 소방관이 소방사다리차를 조작하고 있다. 영등포소방서에서 운영 중인 고가 소방사다리차는 52m 높이까지 올라가 화재진압에 쓰인다. [사진 영등포소방서]

유지연 소방관이 소방사다리차를 조작하고 있다. 영등포소방서에서 운영 중인 고가 소방사다리차는 52m 높이까지 올라가 화재진압에 쓰인다. [사진 영등포소방서]

늦깎이 소방관 …"'외근'이 하고 싶어요" 

학창시절 운동감각이 뛰어나 '체육대학에 진학하란' 소리를 듣는 일이 많았지만, 대학에선 아동복지학을 전공했다. 1999년 대학을 졸업하고 일을 하다 2005년 공무원 시험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공시생'의 길은 험난했다. 고민하던 차에 소방공무원 시험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엔 체력검정을 먼저 본 뒤 필기시험을 치르는데, 체력만큼은 자신 있었다. 당시 서울 여성 소방공무원 채용인력은 7명. 유 소방관은 2008년에 늦깎이 소방관이 됐다.

처음 발령을 받은 곳은 마포소방서였다. 소방으로 들어왔는데 행정 보조 일을 맡았다. 소방관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육아 휴직을 마치고 일터로 돌아온 것이 2016년. 여의도119안전센터에서 일할 때였다. '외근'이 너무 하고 싶었다. 서무 업무도 할 수 있었지만 '보직'을 갖고 싶다는 꿈을 꿨다. 1년 반가량 구급차를 타면서 심정지 환자 등을 실어나르는 일을 했다.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보람은 짜릿했다.

유지연 소방관이 특수차량을 조작하고 있다. [사진 서울시 소방재난본부]

유지연 소방관이 특수차량을 조작하고 있다. [사진 서울시 소방재난본부]

'외근' 업무의 꿈을 키우는 사이 마침 퇴직자가 생기면서 자리가 하나 났다. '운전원'이었다. 소방서 일은 구급대와 구조대, 진압대 일로 나뉘는데 각각 '운전원'이 있어야 했다. 소방관들을 차량에 태워 현장에 나가는 일을 한다는 뜻으로 불리는 명칭이었다. 평소 운전을 좋아하던 유 소방관은 운전원 일이 눈에 들어왔다. 운전 교육도 따로 신청해 두 번이나받고 나서야 용기를 냈다. "운전원을 하고 싶다"고 손을 들었다. 그렇게 구급차 운전일부터 맡기 시작했다.

꿈은 더 키운 건 지난해 7월부터였다. 경리업무를 맡게 되면서 틈틈이 특수차량 운전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물'만으로는 진압이 안 되는 유류 화재의 경우엔 무게가 5t에 이르는 화학 차량이 출동한다. 이 차량을 운전하고 제어하는 일을 맡았다. 운도 좋았다. 여의도119안전센터에서 함께 일했던 28년 베테랑 소방관인 이기종 주임이 특수차량 운전 '사부' 역할을 해줬다. 이 주임은 유 소방관에 대해 "남들은 한 번 가는 운전 교육을 두 번이나 다녀오고 나서 '왜 안 시켜주냐. 여자라고 못하는 게 아니라 내 몫은 내가 한다'고 당차게 말하는데 안 가르쳐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영등포소방서 소방관들은 유지연 소방관이 운전 감각이 뛰어나다고 입을 모았다. 소방사다리차 운전석은 성인 키를 훌쩍 넘는 2m 높이에 있다. 차량 무게만도 18t이 넘어 조작이 쉽지 않다. [사진 서울시 소방재난본부]

영등포소방서 소방관들은 유지연 소방관이 운전 감각이 뛰어나다고 입을 모았다. 소방사다리차 운전석은 성인 키를 훌쩍 넘는 2m 높이에 있다. 차량 무게만도 18t이 넘어 조작이 쉽지 않다. [사진 서울시 소방재난본부]

구급차로 시작해 화학차 운전을 익힌 유 소방관은 소방사다리차에 도전했다. 경리 일을 하면서 사다리차와 굴절차가 쉴 때마다 연습에 나섰다. 고층 화재가 발생하면 인명구조와 화재진압을 위해 각도를 면밀히 계산해 사다리를 조작하고, 물을 쏘는 일이 사다리차 운용사의 몫이었다.

최근엔 화재 현장 출동도 시작했다. 그는 "제대로 된 보직을 갖고 싶어서 찾은 것이 운전이었고, 자격증은 시작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다리차 운용은 인명구조와 연결돼 있다 보니 실수하면 큰 사고가 난다"며 "앞으로 특수차 공부를 많이 해 현장에서 인명 구조도 하고, 여성 소방관도 소방사다리차 운용사가 될 수 있다는 선례가 되고 싶다"고 당차게 말했다.

김현예 기자 hy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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