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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염재호 칼럼

새로운 좌표축과 또 하나의 기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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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오늘 우리 사회에는 한 개의 좌표축만 있다. 그런데 그 좌표축은 모두 현재에서 과거를 향하고 있다. 미래를 향한 진보는 안 보인다. 좌파 기득권이건 우파 기득권이건 이를 타파하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보자는 정치가 과연 있는가. 지금 우리 정치는 미래 세대에게 과거를 주입시키는데 안간힘을 쓰고 있다. 21세기 대변화의 소용돌이에서 미래의 희망보다는 과거의 기억을 되새기는데 모든 에너지가 쏟아지고 있다. 가보지 못했던 미래의 길을 함께 만들어 나가기는커녕 과거의 아픈 상처나 “나때는 말이야”라는 자랑으로 미래 세대를 고문하고 있다.

과거로 미래 세대 고문하는 정치 #미래의 나침반이 더 절실한 오늘 #기억의 반대는 망각 아니라 상상 #21세기 또 하나 기적, 문화 강국

민주화 운동의 주체에게는 독재정권의 쓰라린 상처가 가슴 아픈 분노로 남아 있다. 백년이 되어가는 일제강점기의 아픔도 잊을 수 없다. 그 아프고 말도 안 되는 폭압의 순간들을 후세들에게 반드시 확실하게 알려주는 것을 정치의 소명으로 생각한다. 경제성장의 주역들에게는 보릿고개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었던 고통의 순간들을 지울 수 없다. 독재정권에서 자유는 유보되었지만 기아에 허덕이던 최빈국의 설움을 벗어난 우리가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다. 반공과 친미로 가난을 극복한 눈물겨운 피와 땀의 노력을 후세들에게 확실히 알려주고 싶다.

전 세계의 국가와 시장들이 새로운 미래를 만들기 위해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데 우리 정치는 과거의 기억만 들쳐 내고 있다. 물론 역사의 교훈은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과거에 볼모로 잡혀 한 걸음도 못 나가는 좌파 보수와 우파 보수들이 그들만의 정치적 리그를 펼치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이제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21세기 바다를 항해할 때 대한민국이라는 배의 항법장치에 미래라는 좌표축을 앞에 놓아보자. 지나온 항로를 되새기는 것은 잠시 접고 앞으로 나아갈 항로를 우선 고민해보자. 청년실업 50%를 바라보는 이삼십대, 곧 조기은퇴를 앞둔 오십대, WHO가 2030년이면 세계 최장수국이 될 거라고 예측한 한국의 육칠십대. 이들 모두는 현재의 거친 파고와 캄캄한 앞길을 두려워하고 있다. 눈앞에 닥친 험난한 항로를 헤쳐 나가는데 과거의 나침반보다 미래의 나침반이 더 절실하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전 세계가 한국의 방역 대응능력에 주목하고 있다. 모든 나라는 코로나 사태로 문제해결 능력과 리더십을 겨루는 올림픽 경기를 치루고 있다. 하루하루 각국의 확진자, 사망자, 완치자가 성적순으로 발표된다. 한국은 의료인들의 전문성과 헌신, 메르스 사태로 예비된 방역시스템, 뛰어난 건강보험시스템, 시민들의 높은 공공의식, 빠르고 유연한 민관의 대응 능력 등으로 현재까지는 메달급의 높은 성적을 보여주고 있다.

사십년 가까이 한국에 살면서 한국을 예리하게 관찰해온 영국인 기자 마이클 브린은 『한국, 한국인』에서 지난 오십년간 우리가 경제발전 기적과 정치민주화 기적을 이룩한 유일한 국가라고 지적한다. 그는 또 질문한다. 이제 한국에서 제 3의 기적이 가능할까. 혹시 통일은 아닐까. 박근혜 정부가 통일대박을, 문재인 정부가 평화통일의 운전자론을 주창했지만 그는 개정판 서문에서 통일이 제 3의 기적이 될 기대는 접는다고 밝혔다.

마이클 브린은 외국에서 깜짝 놀랄 한국의 제 3의 기적은 오히려 ‘문화’가 될 것으로 본다.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일본을 제치고 한국의 문화가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피겨 스케이트의 김연아, LPGA의 여자 골퍼들, 싸이, BTS, 영화 기생충까지 한류의 문화적 우수성이 세계인들을 사로잡고 있다. K-Pop, K-드라마뿐 아니라 K-뷰티를 넘어 예술적 감각이 내재된 가전제품, 스마트폰, 조직문화, 교육의 탁월함이 세계를 휩쓸고 있다. 이번에 코로나 사태로 한국 의료체계 및 의료인들의 우수성과 헌신이 또 다시 온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빨리 빨리’를 외치며 뛰어난 문제해결 능력을 보인 것에 세계인들은 감탄한다.

문화는 문학, 음악, 예술, 스포츠만이 아니고, 사회문제 해결능력도 포함될 수 있다. 마이클 브린이 예견한 한국의 세번 째 기적이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뛰어난 상상력으로 빠르고 다양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한국식 접근은 외국인들을 놀라게 한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도 드라이브 스루 검사와 마스크 유통 앱 수십 개가 순식간에 민간에서 만들어졌다.

이제는 국가보다는 개인이, 정부보다는 시장이 문제를 더 잘 풀고 있다. 경제 성장의 기적과 정치 민주화의 기적을 맛본 한국은 강력한 소프트 파워를 가진 문화강국으로 나아가고 있다. 글로벌화된 개인의 우수성과 사회 공공선에 대한 DNA로 무장된 미래 세대들은 또 하나의 기적을 만들어낼 것이다. 기억의 반대말은 망각이다. 그러나 좌표축을 미래로 이동시키면 기억의 반대말은 상상이 된다. 이제 좌표축을 과거에서 미래로 옮겨 젊은 세대가 무한한 가능성을 성취할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펼치게 하자. 지도자들만 각성하면 21세기 또 하나의 기적은 더 빨리 이루어질 수 있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