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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곳간’부터 채워놓는 것이 선제적 위기 관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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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신해룡 중앙대 행정대학원 교수 전 국회예산정책처장

신해룡 중앙대 행정대학원 교수 전 국회예산정책처장

2020년도 본예산은 3년 만에 400조원 시대에서 500조원 시대를 열었다. 두 차례 추경과 3차 추경안을 더하면 547조 1000억원에 달해 2019년도 예산 대비 77조 5000억원(16.5%)이 늘어나게 된다.

한번 나빠진 건전성 회복 어려워 #최후 보루인 재정건전성 지켜야

2015년 이후부터 연례행사가 된 추경을 고려한다면 2021년도 예산의 경우 1년 만에 나라 살림 규모가 600조원에 근접하거나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세 차례에 걸친 추경 소요재원의 대부분을 국채로 충당함으로써 국가채무가 사상 처음 국내총생산(GDP) 대비 43.5%로 늘어나고, 관리재정수지는 GDP 대비 -5.8%까지 적자 폭이 증가한다는 것이 문제다. 나라 곳간이 비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재정이란 정부가 행하는 경제활동이다. 재정의 기능 중에서 재정정책적 기능이 가장 기저(基底)적인 기능임을 고려할 때 코로나19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가 동원 가능한 모든 정책수단을 강구하고 신속하게 집행하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다만 앞으로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경로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재정 위협 요인들이 불거질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많은 방지책이 쏟아진다. 하지만 “위기 이후의 방지책은 다음번의 위기를 막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위기가 지난 직후에는 앞으로 그러한 위기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도 위기는 언젠가는 또 온다. 코로나 위기 다음에 또 다른 변종 위기가 닥친다면 그때도 지금처럼 재정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것이다.

미래에 다가올지 모르는 위기에 대비하는 것도 심모원려 차원에서 중요하다. 하지만 목전에 닥친 근원적인 문제 즉, 기본소득 도입 논의 등 복지 범위와 수준 확대, 복지비용을 감당할 증세 필요성, 복지와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한 국채발행 규모 등 이 세 가지 다른 퍼즐을 어떻게 조합해서 운용하느냐가 정책성과의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는 코로나19 사태를 두고 추락속도가 전례 없이 빠르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번 위기는 진짜 다르다”고 말했다. 우리 재정의 여건은 과거 어느 때보다 밝은 면 보다는 어두운 면이 더 많이 눈에 띄고 있다. 외국보다 아직 건전하다고 낙관할 수 없다.

세입 여건은 더 어두워지는 반면 복지 등 지출 소요는 빠르게 증가할 것이다. 경우에 따라 불규칙하게 대폭 늘어날 수밖에 없어 급격하고 지속적인 재정악화는 불가피한 상황이다. 정부 차입은 중추신경자극제 리탈린과 비슷해서 적절히 쓰면 무기력한 경제를 자극해 경기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지나치게 많은 양을 복용하면 마비증세가 올 수 있다.

독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은 양이다. 천장에 말총 한 올로 매달아 놓은 ‘다모클레스의 칼’은 재정 의존 증후군에 빠져 빚잔치를 벌이는 재정중독자(Fiscal alcoholist)에게 예기치 않은 위협으로 다가올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근본으로 돌아가서 그 근본에 다시 집중해야 한다. 돈을 풀어 경기를 살리는 것 이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경제 주체들의 자신감 회복이 중요하다는 것이 실증분석 결과다.

자신감의 요체는 첫째가 일관성이고, 둘째는 신뢰다. 가장 나쁜 정책은 일관성 없는 정책이다. 불리한 자료나 통계를 숨기고 부풀려서 좋은 것만 골라서 취하려는 체리 피킹(Cherry picking) 방식의 정책선택도 옳지 못하다.

몽테스키외는 “국가의 힘은 국가 내부의 건강함에 있다”고 설파했다. 한 번 악화한 재정 건전성을 조속히 회복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재정 건전성이 국가 경제의 최후의 보루라는 점은 반드시 수호해야 할 재정규율이다. 부채 쓰나미가 오기 전에 곳간을 채워 재정 여력을 축적하는 것이야말로 선제적 위기관리의 으뜸이요, 번영의 대한민국으로 가는 첩경이다.

신해룡 중앙대 행정대학원 교수·전 국회예산정책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