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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호흡기 투병했던 김훈 신작 “약육강식 야만을 그렸다"

중앙일보

입력

 『공터에서』이후 3년 만의 장편『달 너머로 달리는 말』을 낸 소설가 김훈. 뉴스1

『공터에서』이후 3년 만의 장편『달 너머로 달리는 말』을 낸 소설가 김훈. 뉴스1

“고대사에서 고구려ㆍ백제ㆍ신라는 수백 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싸웠다. 피가 강물처럼 흘러서 그 위로 방패가 떠내려갔다고 했다. 그 싸움의 뿌리는 공포심이고 폭력과 야만이다.”

작가 김훈이 가공된 시대와 공간을 배경으로 새 장편소설을 냈다. 16일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야만과 폭력에 끝없이 짓밝히면서도 저항하고 도망치고 다시 잡혀 오는 생명의 모습을 써보려 했다”고 했다. 『칼의 노래』『현의 노래』『남한산성』등에서 정확한 역사적 시대 배경을 가지고 썼던 것과 달리 이번 소설 『달 너머로 달리는 말』(파람북)은 상상에 의한 판타지다.

열 번째 장편이자 첫 판타지 소설을 낸 김훈은 실재하는 세계의 야만에 대해서 우선 입을 열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야만은 분명히 약육강식이고, 그것이 심화하는 것이다. 약자가 살기 위해 자신의 머리를 강자의 고기로 내어줘야 한다면 인간이 살 수 없는 세상 아닌가.” 그는 소설 속 세상의 기초 또한 야만적 폭력으로 보고 양쪽의 폭력이 부딪히는 모습을 묘사했다.

소설 속의 시대는 역사에서 가늠할 수 없는 시점, 장소는 초(草)와 단(旦)이라는 두 나라다. 이 배경 속에서 김훈은 유목과 농경 문화가 충돌하고, 야만과 문명의 충돌 속에 생명이 죽어가는 과정을 예의 정확한 문장으로 그려낸다. 등장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죽고 사라진다. 대신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은 말 두 마리다. 김훈은 “말은 힘이 강하고 성품은 강인하다. 말은 문명과 야만의 동반자였다”고 설명했다.

토하와 야백이라는 이름의 두 말은 각 나라의 장수를 각각 태우고 폭력적 전쟁을 경험한다. 야백은 자신의 장수가 패배를 직감해 투석기에 일부러 올라가 발사되고, 적군의 진영에서 몸이 으깨지는 것을 목도한다. 김훈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달리는 인간들과 저쪽에서 이쪽으로 달리는 인간들이 서로 부딪혀서 인간의 세상은 일어서고 무너지는구나"라는 말의 생각으로 인간의 세계를 묘사했다.

소설은 이 두 말이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에서 만나는 설정으로도 인간 야만의 결과를 은유하고 있다. 김훈은 “모델로 삼은 고대국가나 시대는 없다. 초는 유목이고 단은 농경이다. 세계를 인식하는 바탕도 다르다. 인간집단 사이 적대의식의 뿌리와 전개 과정을 나는 늘 의아하게 여긴다”고 했다.

그가 말을 선택한 배경에는 개인적 경험이 있다. 김훈은 “수년 전 미국 여행 중 그랜드 캐니언의 아메리칸 인디언이 사는 마을을 여행하다 야생마들을 봤고 언젠가 저 말에 대해 뭔가를 쓰게 되겠구나 하는 모호하고 강한 충동을 느꼈다”고 했다. “어둠 속에 수백 마리가 있었는데 각각 혼자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국에 돌아와 그는 말의 습성, 역사, 사육 과정에 대한 자료를 찾아 읽었다. “말이 인간의 문명과 야망을 감당해 나가는 과정의 모습들을 그리게 됐다.”

김훈은 소설의 후기에 “세상을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서식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이 책은 그 답답함의 소산”이라고 적었다.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약육강식의 문명을 돌파하고 새로운 시공을 열어보려는 욕망에 대해 말한 것”이라 설명했다. “사회의 문제에 대한 인간의 사유가 제도화돼서 이 세상이 본래 이렇게 생겨먹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됐다. 거기에서 헤어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 대해서도 그는 “최하층부를 강타하고 파괴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 했다. “코로나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여러 전문가의 얘기가 엇갈리고, 예언가와 약장수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결국 이것도 약육강식을 심화하는 방식으로 가지 않을까, 더위와 함께 사회의 최하층부를 강타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출판사 파람북에 따르면 이번 소설의 집필 기간은 3년이 넘는다. 집필 중이던 지난 겨울에 김훈은 심장 질환으로 한달 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호흡했고 퇴원 후에도 통원 치료를 받고 있다. 이날 기자간담회에서도 그는 “건강이 좋지 않다”고 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이처럼 병과 싸우며 완성했다. 1년여 전 미국의 어머니와 누이를 차례로 떠나보낸 일도 집필 기간 중에 겪었다.

소설 속 핏줄이 터지도록 전장을 달리던 말들은 결말 부분에서 똥수레를 끄는 처지가 돼 폐허 위에 쓰러진다. 이 작품 이후의 집필에 대해 김훈은 “여생의 시간을 아껴서 내 이웃들의 슬픔과 기쁨, 살아 있는 것들의 표정에 관해서 말하고 싶다”고 했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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