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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후남의 영화몽상

디즈니라도 힘든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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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후남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후남 문화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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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초반에 미국 대형 방송사 ABC 사장이, 그 10년쯤 뒤엔 세계적 엔터테인먼트 기업 디즈니의 최고경영자가 됐다. 이후 15년간 CEO로서 그가 주도한 결정은 업계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이런 사람이라면, 자기 자랑으로 점철된 자서전이라도 참고 읽겠다고 마음먹었다. 한데 지난달 나온 밥 아이거의 『디즈니만이 하는 것』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미사여구로 치장한 경영철학 대신 1인자가 되기 이전에, 누군가를 ‘모시고’ 일하던 시절의 경험담부터 흥미진진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특히 인상적인 건 직장상사들 얘기다. 결과물은 뛰어난데 매번 막판에 모든 걸 바꿔버려 주변을 힘들게 했던 방송사 간부, 전설적인 업적을 쌓았지만 말년에는 2인자 경계에만 골몰했던 선임 CEO, 그리고 기업을 인수한 새로운 소유주 혹은 오랜 창업주 자손과 최고경영진의 갈등 등을 아이거는 나름의 균형감각을 갖고 생생하게 묘사한다. 내심 승진을 기대했다 물을 먹거나, 낙하산 인사를 상사로 모시게 된 자신의 심경도 비교적 진솔하게 들려준다. 덕분에 일면식도 없는 저자가 꽤 괜찮은 사람처럼 친근하게 느껴진다.

5월 초 다시 문을 연 중국 상하이 디즈니랜드. 미국 디즈니랜드는 7월 중순 재개장을 준비 중이다. [신화=연합뉴스]

5월 초 다시 문을 연 중국 상하이 디즈니랜드. 미국 디즈니랜드는 7월 중순 재개장을 준비 중이다. [신화=연합뉴스]

물론 그의 사람됨 때문에 이 책을 산 건 아니다. 디즈니의 광폭 행보가 불러온 최근의 결과는 누가 봐도 놀라웠다. 괴팍한 스티브 잡스를 상대로 픽사를 인수한 것을 시작으로 마블, 루카스필름( ‘스타워즈’ 제작사), 폭스 등을 차례로 집어삼켜 엄청난 콘텐트 왕국, 캐릭터 제국을 구축했다. 지난해 ‘엔드게임’의 기록적 흥행은 그 성과를 극적으로 보여줬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 책에서 확인한 것은 아이거가 그때마다 상대에 대한 배려, 피인수 기업에 대한 존중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요약하면 일방적인 흡수가 아니라 ‘픽사는 픽사답게’ ‘마블은 마블답게’라는 전략이다.

하지만 현실은 책과 달리 해피엔딩이 아니다. 이 책이 미국에서 처음 나온 지난해 가을은 누구도 코로나 팬데믹을 예상 못 할 때였다. 지금 디즈니가 처한 위기는 미국 전역의 영화관이 문을 닫고 영화 개봉이 줄줄이 연기된 것만이 아니다. 디즈니의 자랑인 테마파크도 일제히 문을 닫아야 했고, 방송사업의 효자인 스포츠 채널 ESPN도 전 세계 주요 경기가 중단되는 타격을 입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설상가상 디즈니는 크루즈 사업 확장에도 힘을 쏟았던 모양이다. 올 2월 CEO를 그만두고 회장으로 물러난 아이거가 위기상황을 맞아 두 달 만에 다시 디즈니를 진두지휘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만약 개정판을 낸다면, 그는 코로나 위기 극복담을 새로운 한장으로 추가할 수 있을까. 며칠 전 모처럼 영화관에서 한국영화 신작을 보고 나오는 길에 새삼 깨달았다. 코로나 이후 2020년의 세계에서 영화관 나들이는 결코 흔한 경험이 아니라는 걸.

이후남 문화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