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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세 이춘식 할아버지 “살아있을 때 배상금 빨리 줘야…답답하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이제 기대도(안 돼)….내 생전에 안 나올 거 같어.”

[출구 없는 강제징용, 시한폭탄된 한·일관계 上]

올해로 96세, 망백(望百)을 넘긴 이춘식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체념에 젖어 있었다. 이 할아버지는 열일곱이던 1941년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말에 속아 보국대에 지원했다. 영문도 모른 채 생경한 일본 땅 이와테(岩手) 현 가마이시(釜石) 제철소로 끌려가 하루 열두 시간씩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다. 임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2018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피고 일본제철이 이 할아버지를 비롯한 원고들에게 1억원씩(지연이자 별도) 정신적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그로부터 1년 8개월이 흘렀지만, 할아버지는 또다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은 여운택·신천수·이춘식·김규수씨 등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본제철(현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1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상고심 선고 공판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최종 확정했다. 유일한 생존자 이춘식 할아버지가 소회를 밝히는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스1]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은 여운택·신천수·이춘식·김규수씨 등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본제철(현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1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상고심 선고 공판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최종 확정했다. 유일한 생존자 이춘식 할아버지가 소회를 밝히는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스1]

이 할아버지는 일본 기업의 국내자산 압류 명령 관련 내용을 전해 들었다며 “정부가 생존자들이 살아 있을 때 배상금을 최대한 빨리 수령하게 해줬으면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한국에서 재판 결과가 나왔으니 그대로 처리해줬으면 한다”면서도, 배상금 지급 방식과 관련해 정부ㆍ민간에서 제기된 다양한 해법에 대해선 뚜렷하게 찬ㆍ반을 밝히지 않았다.

지난 5일과 6일 광주 시내 모처와 자택에서 만난 이 할아버지와의 문답을 정리했다.

손해배상금 지급이 지연되고 있다.
(대법원에서) 판결을 해주니까 희망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 햇수가 넘어도 답이 안 오니께 속이 답답하제. 이제 내가 100살이 되어 가는데 죽기 전에 해결을 (해)줘버리면 쓰겄어요. 정부에서 생존자한테 얼른 처리를 해줬으면 쓰겠어요. 

(※함께 소송했던 고(故) 여운택 옹을 비롯한 원고 4명 가운데 3명이 세상을 떠났다.)

생활은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  
내가 지금 (형편이) 곤란하지. 혼자 살고 있는디 국가보훈청(보훈처)에서 30만원인가 주면 그놈하고. 구청에서 또 30만원인가 달달이 통장에 넣어 주니께 달달이 그놈 가지고 생활해요.
정부가 지난해 한·일 기업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조성해서 드리는 방안(1+1)을 냈다.
일본하고 정부하고 합의해갖고 그렇게 보상을 해주면 고맙죠. 고마와요. 아이고 그 돈을, 해결해서 판결문대로 판결(결론)이 지어지는구나, 그런 생각이지.
이 방안에 대해 의견을 물어온 적 있는지.
나한테 와서 누가 물어본 사실은 없어요. 보상을 받는다고 전부 테레비 방송에서 나오니께 (주변에서) 받았냐고, 받았냐고 묻는데 아직 안 왔네 그러지. 내 이야기만 듣고 앉았소.
법원의 배상금 대신 일본 기업의 사죄를 전제로 한 위로금 지급 방식은.
법원 판결대로 청산해주면 그게 나는 끝난 것이제. 일본이 ‘미안합니다’…. 그 사람들이 뭔 사과를 하겄어? 재판해서 압류한 그 가치대로 해서 처리해주면 끝난 것이제.
양국 국민의 기금 모금 방식에 대해선.
그러면 고맙제, 고맙제. 전에 학생들도 모아서 보내줬어.
한·일 변호사ㆍ학계ㆍ시민단체가 모여서 방안을 찾아보자는 목소리(민ㆍ관 공동 협의체)도 있는데.
나는 무슨 단체 이런 사람들은 잘 몰라요. 변호사한테만 물어보는 것이지. 자꾸 일본서 반대한다고 그러더만. 나는 이제 늙어서 기대도…. 나 생전에 안 줄 것 같아.
왜 한국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시나.
옛날에 김종필 총리 때, 박정희 대통령 때 1차ㆍ2차로 (유·무상 차관) 다 가져갔다 이것이여. (강제징용 피해자와)모두 합해서 정부가 가져갔다 하고. 그래서 지금 (문제의) 근본이 ‘드릴 사람이 없다’고 일본 사람이 그래요. 내 생각은 우리 대한민국에서 돈을 가져온 것은 분명하니까 대한민국에서 생존자분들한테 드려야지. 대한민국에서 재판 결과가 있으니까 (정부가) 청산을 해버려야지.
일본 정부의 역할은.  
양 정부가 청산을 해야되는 거지. (강제징용 당시) 제철소에서는 내가 군대에 가고 나서는 달달이 정부에다가 돈을 줬다고, 일본제철에서는 그렇게 청산을 해줬다는 것이지. 그때는 (정부가) 조선총독부, 일본 아니야. 그렇게 다 받아서 어느 정부에서 써든지 썼지, 우리 돈을. 그런데 이제 재판 소송을 승소했으니께 줘야 깨끗하제. 

(※대법원 판결의 요지는 원고들의 ‘미불 임금’이 아닌 정신적 손해배상 성격이다. 또한 1965년 한ㆍ일 협정은 정부 차원의 외교적 보호권만 소멸시켰을 뿐, 불법행위에 대한 개인의 청구 권리는 소멸시킬 수 없다는 취지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은.  
생전에, 살아있을 때 줘야지. 죽었을 때 주면 소용없지. (같이 소송했던 할아버지들과) 나하고 같이 살아서 이 좋은 일을, 청산을 받아야 할 건디. ‘먼저 가버렸냐’ 그것이 좀 서운하제. 내 마음이 서운해. 나 혼자….

☞최근 위안부ㆍ강제징용 등 과거사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나가야 할지에 대해 전 사회적인 물음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중앙일보는 한ㆍ일 간 현안으로 꼽히는 강제징용 문제의 해법을 모색해 보기 위해 피해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일부나마 기록하고자 합니다.
 인터뷰는 당사자들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원문을 최대한 그대로 살렸습니다. 다만, 피해자들은 고령이면서 법률ㆍ제도 전문가가 아니므로, 일부 용어상의 혼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터뷰에 응하고자 하시는 피해 당사자나 그 가족, 지원단체의 연락도 기다립니다.

광주=백희연 기자, 영상=황수빈·장정필 baek.heeyo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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