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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문재인 정권 언로가 꽉 막혀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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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주필

이하경 주필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주 6·10항쟁 33주년을 맞아 고(故)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으로 숨진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았다. “갈등과 합의는 민주주의의 다른 이름”이라며 “일상의 민주주의를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했다. 실상은 어떤가. 2500년에 걸쳐 진화한 민주주의의 장점인 다원적 가치의 공존은 흔들리고 있다. 정권의 언로는 꽉 막혀 있다.

DJ, 사쿠라 몰려도 한·일개선 찬성 #여당은 조국·윤미향 위선에 침묵 #‘공수처 기권’ 금태섭 경고는 최악 #문 정권, 군사독재와 다른게 뭔가

거대 여당은 조국과 윤미향의 위선과 타락에 대한 내부 비판을 틀어막고 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법안에 기권표를 던진 금태섭 전 의원을 "강제적 당론을 위반했다”며 경고처분한 것은 헌법 부정이다. 헌법 46조 2항은 "국회의원은 국가 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고 돼 있다. 176석의 정당이 일사불란한 단일대오를 위해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의 소신을 단죄한다면 그들이 목숨 걸고 싸웠던 군사독재와 무엇이 다른가.

국회법 114조의 2(자유투표)는 "의원은 국민의 대표자로서 소속 정당의 의사에 기속되지 아니하고 양심에 따라 투표한다”고 돼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창당한 새천년민주당이 2002년 주도해 신설한 조항이다. 문 대통령도 대선후보 시절 "강제적 당론을 지양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스스로 만든 경건한 성문율과 철석같은 약속은 휴지 조각이 돼버렸다.

문 대통령과 민주당은 "김대중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다짐하지만 말뿐이다. 김대중은 언제나 두 발을 지상 위에 단단히 내딛고 있었다. 열렬한 민주주의 숭배자였지만 독재자의 진의(眞意)도 이해하려고 애쓴 리얼리스트였다.

지금 민주당은 초유의 유리한 정치환경을 손에 쥐고도 허둥대고 있다. 단독으로 21대 국회를 개원하더니 자기들끼리 국회의장을 선출하고 18개 상임위원장을 독식하겠다고 나왔다. 꽉 막힌 아포리아의 상황에서 공동체의 출구를 마련하려면 타협과 자기부정의 결단을 내려야 하는 정치의 본질을 모르고 있다. 거인의 부재(不在)가 안타깝다.

민주당 국회의원 김대중은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한 한·일 국교정상화를 반대하지 않았다. 야당과 각계 대표 200여 명이 ‘대일 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만들고, 윤보선이 "박정희는 매국노”라고 선전포고했을 때였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역주행했다.

김대중은 북한·중국·소련에 둘러싸인 한국이 일본까지 잠재적 적으로 만들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경제강국으로 성장하는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미루면 세계의 흐름을 놓치고, 우리만 고립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정부안이 나왔으니 야당도 적절한 대안을 마련해 싸워야 한다”며 "상호 이익이 보장된 협상안이라면 야당도 반대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여당 첩자” "왕사쿠라”로 몰렸다. "조흥은행 남대문지점에서 거금 3000만원을 받았다”며 수표 번호까지 나돌았다. 김대중은 굴하지 않고 목포시민 1만 명을 상대로 "국가 이익을 위해 피할 수 없다”고 설득했다. 반감을 지닌 이화여대생들과도 토론했다. 두 아들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김대중은 “괴로움이 온몸을 찔렀다”고 자서전에 적었다. 박정희는 "윤보선씨의 매국론은 시대착오적이라 무시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김대중 의원처럼 한일회담의 원칙에는 찬성하면서도 대안을 가지고 논박해 오면 참으로 대응하기 힘들어진다”고 토로했다.

고난의 세월을 함께 이겨낸 동지의식으로 뭉친 문재인 정권은 “우리만 옳다”는 집단사고의 함정에 빠져 있다. 시대착오다. 민주 대(對) 반민주의 단순한 도식으로는 이 넓고 복잡한 세계를 파악할 수 없다. 미국의 언론인 월터 리프먼은 "모두가 똑같이 생각한다면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고 했다. 이질적인 사람의 경험과 논리를 토씨 하나 놓치지 말고 경청해 나의 생각을 필사적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이 정부가 직면한 경제와 방역의 위기는 심각하다. 미·중은 선택을 강요하고, 북한은 대남 보복과 군사행동으로 위협하고 있다. 한·일 관계는 악화일로다. 사람과 정책을 모두 바꿔야 하는데 "잘 굴러간다”는 용비어천가만 요란하다. 오히려 총선에서 참패한 미래통합당이 달라지고 있다. 김종인을 비대위원장으로 영입한 뒤 보수 일변도였던 관성을 깨고 중도도 공략하기 시작했다. 민심이 돌아서면 무서운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반대 의견을 못 견디는 정치인은 민주주의와 친해질 수 없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1962년 쿠바 위기 때 동생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에게 ‘악마의 변호인’ 역할을 맡겼다. 강경파가 주도한 집단사고를 깨고 3차 세계대전을 막았다. 지금 이 나라 일상의 민주주의는 무지개 저편의 추상적 깃발보다도 멀리 있다. 문 대통령은 “왕사쿠라” 김대중을 보호했던 박순천 총재의 포용력을 배워야 한다.

역사의 시험대에 올라선 대통령은 완장을 차고 눈을 부라리는 군기반장과는 달라야 한다. 내키지 않겠지만 금태섭의 용기와 소신을 사면해야 한다. 그게 꽉 막힌 언로를 열고 일상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이다.

이하경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