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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통·복통 아이 알고보니 ‘왕따’ 탓…아픈 마음, 몸으로 표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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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0호 24면

아이 마음 다이어리 〈3〉 신체증상장애

#“천 교수님, 지금 혹시 병원에 계시나요?” 아침 출근길에 소아신경과 교수께서 다급히 전화했다. “네, 거의 병원 도착했습니다만, 무슨 일이신가요?” “어제 저녁 응급실에 온 환자에 대해 말씀드리려고요. 두통으로 온 여자아이인데 신경과에서 할 수 있는 검사는 다 했는데도 특별한 이상 소견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소아정신과적 문제가 의심되는데 교수님께서 직접 봐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스트레스·심리 불안 심하면 발생 #호흡곤란·어지럼증·가성 발작도 #각종 의학적 검사에선 안 나타나 #아픈 아이를 꾀병 부린다고 오인 #100명 당 5~7명 꼴로 장애 생겨 #여성이 남성의 10배, 우울증 동반

연구실에 들어와 가운을 걸치면서 전공의에게 전화했다. “응급실 소아 구역 소아신경과에서 협진 의뢰한 11세 박수정(가명)이란 여자아이, 강 선생이 내려가서 기초 면담 시작해주세요.” 응급실 환자에 대해 먼저 파악한 교수가 전공의에게 지시하는 일은 흔치 않기에 강 선생은 다소 긴장한 목소리로 신속히 진행하겠다고 답했다. 내가 응급실 소아 구역에 들어서자 전공의가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교수님! 어쩌죠? 아이에게 다가갔더니 머리만 감싸 안으며 아파 죽겠다고 신음만 내고 아무 말을 하지 않습니다. 부모님은 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내려왔냐며 무척 화를 내셨습니다. 아이가 저렇게 아파하는데 어떤 처치라도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시고요. 면담은 시작도 못 했습니다.” 나는 신체 증상으로 응급실에 온 환자와 보호자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설명하며 전공의를 안심시켰다.

과민성대장증후군과 비슷한 사례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수정아, 어디가 제일 아파?” 나는 아이가 누워있는 침상 옆에 서서 최대한 다정하게 물었다. 얼굴을 한껏 찡그리며 양쪽 관자놀이를 검지로 가리켰다. “어제 학교에 있을 때까지는 괜찮았니?” 아이는 끄덕였다. 부모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이와 나를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수정아, 선생님이 아픈 게 좀 가라앉도록 알약 하나를 줄 거야. 알약 잘 삼키니?” “네” 아이는 시선을 피하며 모기만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복도로 나와 전공의에게 소량의 항불안제 처방을 지시한 후 부모와 마주했다.

부모에게 아이가 심리적 불안이나 스트레스로 인해 몸이 아플 가능성에 관해 설명했다. 신체적 증상을 각종 의학적인 검사에 의해 확인할 수 없는 경우 ‘신체증상장애’라고 부른다고 덧붙였다. “선생님, 그럼 수정이가 꾀병을 부린다는 말씀이신가요? 정말 데굴데굴 구를 정도로 심각하게 아파했는데요.” 부모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뇨. 수정이는 실제 무척 아픈 겁니다. 다만 통증이 의학적으로 설명이 안 된다는 것일 뿐 아이가 의도적으로 꾸며낸 것은 아니에요. 사람이 스트레스를 지속해서 받고 불안하면 신경호르몬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균형이 깨진 신경호르몬이 뇌·심폐·소화기·근육 등 다양한 장기에 영향을 끼쳐 몸을 아프게 만드는 것이죠. 스트레스를 오래 받으면 신경전달물질이 변하고 뇌-장 신경계를 통해 대장이 민감해져서 복통과 설사 증상을 보이는 ‘과민성대장증후군’이 바로 대표적인 예입니다.”

수정이는 소아정신과에 입원했다. 입원한 지 셋째 날부터 아이의 두통이 서서히 호전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수정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수정이는 스스로 숙제도 잘하고 매사에 손 갈 데가 없는 순하고 의젓한 아이였다. 1년 전 남동생이 백혈병 진단을 받은 후부터 집안 환경이 급격히 변했다. 항암 치료를 받는 동생과 함께 엄마는 입·퇴원을 반복했고 수정이는 방과 후 바로 학원에 가서 숙제까지 다 마친 후 집에 왔다.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혼자 먹는 날이 많았다. 부모는 아이 앞에서 의연하려고 애썼지만, 표정은 지치고 어두웠다. 어느 날은 설거지하던 엄마가 갑자기 흐느끼는 모습을 아이가 목격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 친구들과 갈등이 있거나 어려운 숙제가 있어도 늘 바쁘고 슬퍼 보이는 엄마에게 어떤 도움도 구하지 않고 혼자 해결하려 했다. 엄마는 이런 수정이에게 “알아서 잘하니 기특하다”는 칭찬을 자주 했다. 4학년이 된 후 배가 아프다며 조퇴를 한 적이 몇 번 있었지만, 엄마는 장염약만 먹이며 별일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수정이의 단짝 친구였던 지민이가 수정이를 따돌리고 다른 아이랑 단짝이 되면서 수정이의 학교생활은 고통의 나날이었다. 수정이가 응급실에 내원한 다음 날 학교에서는 야외 견학이 예정되어 있었다. 수정이는 친구 없이 온종일 지낼 것을 상상하며 무척 괴로웠다. 게다가 지난 1년간 부모에게 힘든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꾹꾹 억눌러왔기에 괴로운 심정을 말할 수도 없었다. 차곡차곡 쌓여온 스트레스는 무언가로 표현돼야 한다. 수정이의 표현 수단은 두통이었다.

신체증상장애는 100명당 5~7명에게서 발생하고 여성이 남성보다 10배 높게 나타난다. 흔한 신체증상은 통증이다. 소아청소년 아이들에게는 두통이나 복통이 자주 나타나고 기침이나 호흡곤란, 어지럼증, 가성 발작(심리적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어 나타나는 발작으로 뇌전증 증상과 유사)도 보인다. 다리가 마비되어 걷지 못하는 청소년이 정형외과에서 온갖 검사를 다 한 후에도 원인을 찾지 못하고 소아정신과에 온 적도 있다.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이상의 신체증상을 보이고 심각한 정도가 다양하다. 신체증상장애 환자의 절반 이상은 우울증과 불안을 동반한다.

수정이가 처음 배가 아파 조퇴한 날 저녁, 엄마는 남동생을 아빠에게 맡기고 수정이의 옆을 지켰다. 복통이 뜻밖에 엄마와 함께 있게 해준 이득을 가져다준 것이다. 이것을 ‘이차적 이득’이라고 부른다. 처음 복통은 스트레스로 인한 생물학적인 요인에서 시작되었지만 이후 지속한 복통과 조퇴는 수정이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엄마와 함께 있기’라는 이득이 생기면서 강화된 현상이었다. 응급실에 왔던 날 두통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친구에 대한 배신감과 서운함, 외톨이가 되었다는 두려움으로 통증이 시작되었다. 아이가 의식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다음날 야외 견학을 피하는 이득이 생겼고 치료받지 않았다면 신체증상은 강화되었을 것이다. 수정이는 부모에게 학교생활이 힘들다고 솔직하게 말할 경우 부모가 매우 실망할 것이고 더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있었다. 힘든 내색 없이 알아서 잘하는 모습에 대해서 항상 칭찬받았기 때문이다. 힘들다고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신체증상으로 표현하는 것이 부모를 실망하게 하지도 않으면서 부모에게 의존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수정이는 인지행동치료와 가족치료를 받았고 항우울제도 10개월 정도 복용했다. 인지행동치료는 수정이의 ‘잘못된 믿음 교정하기’부터 시작했다. 즉, ‘힘들다고 하면 부모가 실망할 것이다’라는 생각으로부터 ‘힘들다고 솔직히 표현해도 안전하다’는 생각으로 바꾸기였다. 이러한 인지행동치료를 부모교육과 병행했다. 불안을 말로 표현할 때 더 크게 인정받는 경험을 반복시켰다. 아이는 점차 엄마에게 속마음을 터놓고 과거 섭섭했던 일들을 하소연했다. 어리광도 부렸다. 두통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만, 의젓했던 아이가 너무 의존적인 아이가 되는 것은 아닌지 부모가 걱정했다.

인지행동치료·부모교육 통해 치유

“수정이의 어리광을 어디까지 받아줘야 하나요? 완전히 아기가 된 것 같아요.”

“치료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동안의 불안과 공허감이 어느 정도 해소되면 부모에게 도움을 청하면서도 일상생활을 더 야무지게 잘하는 아이로 발전할 겁니다.” 나의 설명에 부모는 안도했다. 수정이는 3주 후 퇴원했고 통원 치료를 받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치료를 끝냈다.

얼마 전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온 수정이 엄마와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쳤다. 5년 만이었다. 엄마가 먼저 나에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처음에 알아보지 못했다가 서서히 기억을 되살렸다. 올해 고2인 수정이가 심리학과 진학을 목표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고 전했다. “선생님, 수정이가 여기서 치료받았던 경험에 대해 자주 이야기해요. 그래서인지 심리전문가가 되고 싶다네요.”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등장인물을 가명으로 처리했고, 전체 흐름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일부 내용을 각색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소아 신체증상장애에 대해 알아둘 점

- 신체 증상이 심각한 의학적 질병에 의한 것은 아니다.
- 스트레스에 대한 신체 반응의 대표적인 예가 과민성 대장 증후군.
- 인지행동치료 모델을 통해 아이와 가족이 증상 형성 과정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 좋다.
- 심리적 접근이 신체 증상 호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기전(mechanism)을 통해 이해하도록 한다.
- 인지행동치료와 가족 치료 등 치료 계획을 사전에 잘 이해하는 것이 도움된다.

천근아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교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 영국 국제인명센터(IBC)의 ‘세계 100대 의학자’로 선정. 서울시교육청 자문위원, 가정 법률상담소 교육위원, 법무부 여성아동정책심의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저서로는 『아이는 언제나 옳다』, 『엄마 나는 똑똑해지고 있어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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