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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제국주의 그늘? 허영·이병우 감독, 친일 단순화하기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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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0호 27면

[전 아사히신문 기자의 ‘일본 뚫어보기’] 일본 이름의 조선인 영화감독

지난해 한국영화는 100주년을 맞았다. 기념행사가 여기저기서 열렸지만 1945년 해방 전 영화는 별로 다뤄지지 않았다. 필름이 행방불명이 돼서 볼 수 없는 작품이 많다는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식민지하의 영화들이 친일 경향이 있어서 100주년을 축하할 기획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 같다.

조선인 지원병 그린 ‘그대와 나’ #허영, 전범 우려 이국서 세상 떠 #‘하늘의 소년병’ 찍은 이병우 #일 다큐의 원점 ‘설국’도 남겨 #친일파=민족의 배신자 낙인 #그들도 내면 갈등 있었을지도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영화 팬으로서 그 당시 영화가 궁금했다. 마침 지인이 그 시기의 일본 영화잡지 ‘에이가준보(映畵旬報)’를 입수했다며 같이 읽어 보자고 연락을 줬다. 지난 4월 영화감독이나 대학교수, 방송기자 등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 또는 일본어를 이해하는 한국사람들이 모여서 독서 모임을 시작했다.

조선 배우 문예봉도 출연한 호화 캐스팅

1 허영(히나쓰 에이타로·日夏英太郎) 감독이 1941년 제작한 ‘그대와 나’. 2 1940년대 일본서 발간된 영화잡지 에이가준보(映畵旬報). 3 이병우(이노우에 칸·井上莞) 감독의 1941년 작품 ‘하늘의 소년병’. [사진 에이가준보]

1 허영(히나쓰 에이타로·日夏英太郎) 감독이 1941년 제작한 ‘그대와 나’. 2 1940년대 일본서 발간된 영화잡지 에이가준보(映畵旬報). 3 이병우(이노우에 칸·井上莞) 감독의 1941년 작품 ‘하늘의 소년병’. [사진 에이가준보]

에이가준보는 1941~43년에 걸쳐 100호까지 출간됐다. 1941년은 태평양전쟁이 시작한 해다. 영화계가 전쟁을 향해 가는 모습이 잡지에도 고스란히 나와 있다. 이때쯤 일본에서 활약했던 영화감독 중에 적어도 두 명의 조선 출신이 있었다. ‘그대와 나(君と僕)’(1941)를 만든 히나쓰 에이타로(日夏英太郎) 감독과 ‘하늘의 소년병(空の少年兵)’(1941)을 만든 이노우에 칸(井上莞) 감독이다. 원래 이름은 히나쓰가 허영, 이노우에가 이병우였다. 그런데 에이가준보에는 두 감독의 일본 이름으로만 나온다. 일본 이름이기 때문에 모르는 또 다른 조선 출신 감독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대와 나’는 조선인 지원병을 그린 극영화, ‘하늘의 소년병’은 소년병들의 비행 훈련을 담은 다큐멘터리영화다. 일본군의 뜻에 따라 전쟁에 나가게끔 만드는 영화였다는 뜻으로 친일의 낙인이 찍힐 만한 영화다. 그런데 조선 출신 감독이 이 시대에 영화를 만드는 데 과연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 당시는 일본 감독들도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 수 없는 시대였다.

한국에서 친일파라는 말이 민족의 배신자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일본인 대부분은 잘 모른다. 이 말의 역사적 배경을 모르면 단지 일본과 친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오해할 수 있다. 나도 그랬다. 지금도 친일파의 단죄라는 과거사 청산이 안 끝났다고 생각하는 한국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한국에 와서 알았다. 그런데 친일인지 아닌지는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일까. 김지운 감독 영화 ‘밀정’(2016)의 주인공 이정출(송강호)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조선인이지만 일본 경찰에 소속된 사람이다. 그는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이 상해에서 경성으로 폭탄을 가져오는 일에 협조한다. 그러면서도 일본 경찰이 의열단 단원들을 잡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는 이중간첩이다.

이정출은 의열단 편인가 일본 경찰 편인가. 관객은 그가 최종적으로 폭파 작전을 돕는 장면을 보고 의열단 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재판 기록만 보면 친일파로 판단될 수도 있다. 실제로 친일파로 낙인 찍힌 사람들도 여러 갈등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허영에 대해서는 딸 히나쓰 모에코(日夏もえ子)가 쓴 책 『월경의 영화감독 히나쓰 에이타로』를 통해 알았다. 허영은 ‘그대와 나’를 찍은 후 1942년에 육군보도반원으로 인도네시아로 갔다가 전쟁 후 일본에도 조선에도 돌아가지 않았다. 모에코는 “전범으로 재판을 받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 아닐까”라고 추측한다.

에이가준보를 보고 놀랐던 것은 ‘그대와 나’의 광고 페이지수다. 12페이지에 걸친 광고는 다른 어느 거장의 영화보다 많다. 일본군이 ‘그대와 나’에 얼마나 힘을 썼는지를 알 수 있다.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郎)도 출연하고, 광고에는 “내외인(일본사람과 조선사람)으로 하여금 내선일체의 실상을 인식하게끔 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을 확신한다”는 미나미의 말이 실렸다. 내선일체는 내지(일본)와 조선이 한 몸이라는 말로 조선을 일본에 완전히 통합하려고 내세운 표어였다.

출연진도 화려하다. 일본 각 영화사에서 스타 배우들이 캐스팅됐고 만주에서 활동했던 이향란(李香蘭)도 합류했다. 조선 배우로는 당시 최고로 인기 많았던 문예봉, 김소영이 출연했다. 에이가준보의 표지에 조선 배우가 나온 건 100호 중에 ‘그대와 나’의 문예봉 한 번뿐이다. 그런데 허영 본인은 어떤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을까. ‘그대와 나’를 연출하기 직전에 일본 영화잡지 ‘영화평론’에 이런 글을 썼다. “현재 내지의 많은 영화인은 조선의 풍토풍속을 모르고, 마찬가지로 조선 영화인들도 내지의 풍토풍속을 모른다. 따라서 서로 의견 교환할 기회도 없이 영화적 소재는 반도 지중 깊숙이 매몰돼 있는 것이다.” 허영은 일본과 조선의 영화계의 가교 역할을 하며 조선의 영화적 소재를 일본에 소개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 내선일체를 추진하려는 일본군으로 인해 이용당한 것이긴 하지만, 영화에 덕수궁이나 창덕궁, 이화여대 등 조선의 문화적 풍경들을 담은 것도 사실이다.

이병우는 신상옥·김수용 영화 촬영도

화려한 캐스팅과 대대적인 광고에도 불구하고 ‘그대와 나’의 흥행과 평은 좋지 않았다. 허영이 인도네시아로 가게 된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허영은 인도네시아에서도 영화인으로 활약했다. 초창기의 영화 발전에 기여해 ‘인도네시아 영화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다. 아버지의 생사조차 모르고 살았던 딸 모에코는 2000년에 이 사실을 알고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고 한다. 영화를 통해 전쟁에 가담한 죄는 부정할 수 없지만 일본에 있는 가족도 못 만나고 조국에도 못 돌아가고 죽은 허영 또한 일본 제국주의와 전쟁의 희생자인 것 같다.

반면 ‘하늘의 소년병’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가메이 후미오(龜井文夫), 시마즈 야스지로(島津保次郎) 등 유명 감독들이 잇따라 절찬했고 문부대신상(文部大臣賞)도 받았다. 박진감 넘치는 비행 훈련을 그 당시에 어떻게 찍었는지 놀랍다. 에이가준보를 보면 이병우가 목숨을 걸고 촬영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영화 연출자(이병우)는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다. 조종사는 공중회전이나 급회전을 10번 정도 되풀이했다. 연출자는 눈이 핑핑 돌고 하늘과 땅이 회전하고 비행기에서 내려도 걷질 못했다.” 프로파간다 영화지만 그걸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은 건 그걸 넘어서려는 이병우의 의지 때문일 수도 있다.

이병우는 허영과 달리 해방 후에도 일본에서 계속 활동했다. 촬영 감독으로 죽을 때까지 주로 ‘이노우에 칸’이란 이름을 썼다. 그가 조선 출신 이병우였다는 사실이 일본에서 알려진 것은 그가 사망한 뒤인 2005년 야마가타(山形)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때였다. 그해 개막작이 그가 촬영한 ‘설국’(1939)이었다. 일본 다큐멘터리의 원점이라고 불리는 명작이다.

재일 코리안 중에는 본명은 한국 이름이지만 일본 이름으로 활동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병우도 그런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일본에서 차별이 심했고 한국 이름으로 활동하면 일을 잃을 수도 있는 시대였다.

이병우는 일본영화뿐만 아니라 한국영화에도 참여했다. 신상옥 감독, 김수용 감독 작품 촬영을 맡기도 했고 가족처럼 친하게 지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조국에 대한 애정도 잃지 않았던 것 같다.

허영과 이병우 두 감독은 일본 이름으로 활동했기에 지금까지 한국에서 크게 조명받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에이가준보만 봐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이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도 한국영화의 역사도 사실 아주 복잡하고 친일이라는 한마디로 단순화하면 안 보이게 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적어도 나한테는 이 두 감독이 그 복잡함을 알려준 사람들이다.

나리카와 아야 전 아사히신문 기자
나리카와 아야(成川彩) 2008~2017년 일본 아사히신문에서 주로 문화부 기자로 활동한 후,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석사과정에 유학. 한국영화에 빠져서 한국에서 영화를 배우면서 프리랜서로 일본(아사히신문 GLOBE+ 등)의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칼럼을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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