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한 아버지 찾았으면…엄마 영전에 000001 배지 바칠 것”

중앙선데이

입력 2020.06.13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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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0호 08면

‘끝까지 찾아야 할 태극기 122609’ 배지 1호 주인공

미발굴 전사자 고 서병구 일병의 유족 서금봉씨가 9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을 찾아 태극 배지를 달고 눈물을 흘렸다. 박종근 기자

미발굴 전사자 고 서병구 일병의 유족 서금봉씨가 9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을 찾아 태극 배지를 달고 눈물을 흘렸다. 박종근 기자

“서, 병, 구. 아버지 이름이 서병구라예.”

6·25 때 숨진 서병구 일병 외동딸
“미발굴 전사자 유족 다 같은 심정”

NH농협·GS리테일서 무료 배포
연예인야구협회도 캠페인에 동참

문 대통령,12만2609번째 배지 달고
25일 국군 전사자 유해 귀환 행사

어느덧 머리에 서리가 내린 외동딸은 아버지 이름을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단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아버지의 이름은 가슴에 그리움으로 새겨졌다. 6·25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고 서병구 일병의 유족 서금봉(70)씨는 ‘아버지’라는 단어만 들어도 목이 메었다. 서씨는 전쟁이 터지고 한 달 뒤인 1950년 7월 부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서 일병은 딸이 태어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전쟁터로 나갔다.

“아버지는 군인도 아니었는데 병력이 모자란다고 차출됐다카데예. 하루 이틀 훈련받고 바로 투입됐다 안합니까. 그래 전쟁에 나갔다가 부상을 당해가 밀양에 있는 군병원으로 후송됐다는 거라예. 그 소식을 듣고 엄마가 갓난쟁이인 내를 업고 아버지를 만나러 갔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던 거라. 그러고 얼마 안 있다가 다시 전쟁하러 나갔다캅니더. 너무 많은 사람이 부상당해 내려오니까 치료하다가 막 전쟁터로 올려보낸 거지예. 그해 10월에 돌아가셨다캅니더.”

신혼생활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은 서씨 모친은 어려운 살림에 온갖 고생을 하며 하나뿐인 딸 서씨를 키웠다. 남몰래 눈물을 훔치는 어머니의 모습을 서씨는 멀리서 지켜보곤 했다. 아버지의 사진 몇장을 고이 간직하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기 전 10여 년 동안 치매를 앓으면서 어딘가에 사진을 꼭꼭 숨겼다. 서씨는 아버지 사진을 끝내 한장도 찾지 못했다. 그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에 대해서도 많이 물어보고 했어야 하는데 그걸 못 했다”며 아쉬워했다.

매년 6월이 되면 서씨는 감회가 남다르다. TV에 6·25전쟁과 관련한 내용만 나와도 눈물이 흐른다. 해마다 부산에서 열리는 현충일 기념행사에는 아들·딸 자녀와 세 손녀의 손을 잡고 참석한다. 지난 9일에는 서울 용산구에 있는 전쟁기념관을 찾았다.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와 농협중앙회의 ‘122609 태극기 배지 달기 캠페인’ 업무 협약식에 미발굴 전사자 유족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서다.

고유번호가 매겨진 12만2609개 태극 배지 가운데 1번 배지가 서금봉씨에게 전달됐다. 박종근 기자

고유번호가 매겨진 12만2609개 태극 배지 가운데 1번 배지가 서금봉씨에게 전달됐다. 박종근 기자

이날 서씨에게는 ‘끝까지 찾아야 할 태극기’ 1호 배지가 전달됐다. 미발굴 전사자인 12만2609명의 호국영웅을 상징하는 의미로 각각의 고유번호가 부여된 12만2609개의 태극 배지를 시민들에게 배포하는 캠페인의 일환이다. 배지 모양은 참전용사의 유골함에 태극기를 도포한 모습을 형상화했다. ‘000001’이라는 숫자가 적힌 배지의 의미에 관해 설명을 들은 서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옷깃에 배지가 부착되자 기어이 참았던 울음이 터졌다. 서씨는 “아버지의 유골을 찾아 4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 묘지에 합장해 드리는 게 내가 죽기 전 해야 할 의무이자, 한평생 고생만 하다 가신 어머니의 소원을 이뤄드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씨는 전쟁기념관에 있는 전사자 명비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찾고 싶다고 했다. 10여 년 전 이곳에 왔을 때 미처 찾아보지 못하고 돌아갔던 게 마음에 남았던 터다. 고 서병구 일병이 소속됐던 8사단 전사자의 이름만 해도 여러 개의 명비에 빼곡했다. 애타는 마음으로 이름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던 서씨는 추진위 관계자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이름 석 자를 찾을 수 있었다. “네, 맞습니더. 아이고야, 고맙습니더.” 그는 명비에 새겨진 이름을 손으로 한참 어루만졌다.

“12만 명이 넘는 미발굴 전사자들의 유가족들은 다 같은 심정일 겁니더. 하루빨리 그 한을 풀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지예.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고 역사는 꼭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더. 70년 전에 돌아가신 분들 덕분에 우리가 이래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헛된 죽음이 되면 안 되지예. 요즘 젊은 사람들도 그걸 꼭 알아줬으면 좋겠어예. 6.25가 자꾸 멀어지고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 안타깝지예. 제가 1호 배지를 받았다카니까 무거운 느낌이 듭니더. 배지는 엄마 영전에다 갖다 놓으려고예. 엄마가 좋아하실 것 같네예.”

서씨가 받은 1번 배지를 시작으로 태극 배지는 일반 시민들에게도 전달되기 시작했다. NH농협은행은 9일부터 ‘올원뱅크’ 애플리케이션(앱)에서 신청을 받아 선착순 2만 명에게 배지를 무료 증정하기로 했다. 당초 25일까지 진행될 예정이었던 이 행사는 신청자가 몰려 사흘 만에 조기 종료됐다. 농협은 전국 시군지부를 통해서도 1만개의 배지를 지역 주민들에게 나눠줬다. GS리테일은 15일부터 전국 144개 지정 점포(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와 ‘더 팝’ 앱을 통해 9만 개의 배지를 무료로 배포한다.

태극 배지 캠페인이 SNS에서 확산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태극 배지 캠페인이 SNS에서 확산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시민들은 태극 배지에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NH농협은행과 추진위, 배지 아이디어를 처음 소개한 공공소통연구소 등에 문의 전화가 쏟아졌다. “배지를 어떻게 하면 받을 수 있는지” 묻는 전화뿐 아니라, “초등학생 자녀에게 배지의 의미를 설명해주고 싶다”는 학부모, 6.25 참전 전사자의 유족, 현역 군인, 유해발굴감식단으로 활동했던 전역 군인, “교육 자료로 활용하고 싶다”고 밝힌 현직 교사 등 사연도 다양했다.

안명자(73)씨는 “배지를 받으면 둘째 삼촌의 유품으로 생각하고 간직하고 싶다”고 말했다. 안씨의 둘째 삼촌 고 안재호 병장은 제대를 한 달여 앞두고 6·25전쟁에서 전사했고 아직 유해를 찾지 못했다. 안씨는 “미혼이었던 둘째 삼촌은 직계가족도 유품도 남아 있지 않아 얼마나 외로울까 싶었는데, 태극 배지에 관한 기사를 읽고 무척 반가웠다”고 말했다. 그는 “시신도 찾지 못하고 그대로 잊힌다면 너무 가엾지 않나. 가족들이 배지라도 보면서 위로를 받고 오래도록 기억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사)한국연예인야구협회도 캠페인에 동참하기로 했다. 15일 치러질 경기에서 선수들은 유니폼에 태극 배지를 달고 출전할 계획이다. 박정철 협회장은 “사회적 공인인 연예인들이 국가를 위해 헌신한 분들을 기리는 일에 동참하자는 취지”라며 “협회 소속 연예인들이 배지를 달고 찍은 인증샷을 SNS에 올려 국민께 널리 알리려는 계획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 12만2609번째 배지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달될 예정이다. 문 대통령은 이 배지를 달고 오는 25일 미국에서 돌아오는 6·25전쟁 국군 전사자의 유해를 맞이한다. 미국이 북한지역에서 발굴해 간 유해 가운데 한미 감식을 통해 국군 전사자로 확인된 유해다. 태극기 옷을 입고 조국으로 돌아오는 이들을 보며 남은 유가족들은 또 한 번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다. 아직도 찾아야 할 12만2609명의 호국 영령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대학생 10명 중 8명 “태극 배지 착용할 의향 있다”
태극기에 대한 청년 세대의 인식이 대체로 긍정적인 것으로 조사됐다. 새로운 보훈의 상징으로 제시된 태극 배지에 대해서도 10명 중 8명은 ‘달고 다닐 의향이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성용준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지난 9~11일 고려대에 재학 중인 20~34세 학생 107명(남성 51명, 여성 56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했다. ‘태극기를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응답자들은 ‘태극 문양의 이미지, 국기로서의 상징, 대한민국의 역사, 애국심, 부정적 이미지’ 등이라고 답변했다. 긍정적인 인식을 보여주는 키워드로 ‘태극 문양의 조화로움, 문양의 화려함과 강렬함, 대한민국의 상징, 애국가, 무궁화, 올림픽, 독립운동, 6.25전쟁, 근현대사, 민족의 아픔, 자부심’ 등이 나왔다. 반면 부정적 이미지로는 ‘극우 단체, 고집불통, 정치적 이념, 지루하다’ 등을 답했다.

성 교수는 또 20~37세 재학생 25명(남성 14명, 여성 11명)을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도 진행했다. 인터뷰 대상자들에게 ‘끝까지 찾아야 할 태극기 122609’ 캠페인 영상을 시청하게 하고, 시청 전후 각각 ‘태극기 모양 배지를 착용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캠페인 영상을 시청하기 전에는 ‘보통이다’라는 중립적 태도가 44%, ‘착용하고 싶다’와 ‘착용하고 싶지 않다’는 응답이 똑같이 28%로 나타났다. 그러나 영상 시청 후에는 ‘착용하고 싶다’는 대답이 80%, ‘착용하고 싶지 않다’ 12%, ‘보통이다’는 응답이 8%로 조사됐다.

성 교수는 “z세대는 주변의 시선이나 평가를 중요하게 여기고 ‘가치’를 추구하는 성향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조사에서 응답자들은 마음속으로 태극기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배지를 착용하고 겉으로 드러내는 데에는 부정적인 태도를 나타냈다”면서 “태극기 배지 캠페인은 이들이 애국심과 같은 감정을 드러내고 표출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최은혜 기자 choi.eunhye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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