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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납적 ‘생물 분류체계’와 박물관의 공통점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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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0호 18면

바우하우스 이야기 〈37〉

소통이 안 되는 이유는 서로 사용하는 단어의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글자 모양이 같다고 개념까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모든 개념은 ‘분류(classification)’에 기초한다. 인터넷이 나오기 전까지 사람들이 의지했던 분류체계는 그리 혼란스럽지 않았다. 디렉토리와 같은 계층적 위계 구조를 갖는 것이어서 그 구조가 단순했다.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었다.

서구 모더니티의 핵심은 ‘분류’ #스웨덴 학자 린네, 탁소노미 완성 #일 메이지정부 박물학자가 번역 #박물관, 박람회처럼 분류해 전시 #한국 좌파·우파 구분은 ‘위계적’

그러나 오늘날 인터넷 ‘검색’에 기초한 분류체계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태그’ 또는 ‘연관검색어’에 기초한 분류체계다. 이를 전통적 분류학, 즉 특정한 권위에 의해 성립된 ‘탁소노미(taxonomy)’에 빗대 ‘폭소노미(folksonomy)’라고 부른다. ‘폭소노미’는 ‘folk(people)+order+nomos(law)’의 합성어다. 인터넷상에 함께 몰려다니는 이들이 만들어낸 분류법이란 뜻이다. ‘탁소노미’가 위계적이라면, 폭소노미는 ‘관계적’이다.

‘탁소노미’ VS ‘폭소노미’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그래서 정치적 입장이 다르면 사고방식 자체도 달라지는 것이다. ‘연관검색어’가 전혀 다른 세계에 살기 때문이다. ‘꼰대’라고 비난받는 이유도 젊은 사람에게는 낯선, 아주 낡은 위계적 체계로 세상을 분류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좌파-우파’의 구분은 상당히 ‘탁소노미’적이다. 매우 ‘꼰대적’이라는 이야기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정치사회적 혼란은 ‘연관검색어’가 제각각인 ‘폭소노미’들로 인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의 한국사회는 전통적 ‘탁소노미’와 ‘폭소노미’가 맞부딪히는 최전선이다. 베이컨의 ‘지식혁명’처럼 한국에서 새로운 ‘지식혁명’이 진행 중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모더니티의 핵심은 ‘분류’에 있다. ‘탁소노미’ 즉 ‘분류학’이 창조적 모더니티를 가능케 했다. ‘분류’는 ‘편집의 단위(unit of editing)’를 만드는 일이다. ‘편집의 단위’가 있어야 창조적 편집, 즉 에디톨로지가 가능하다.

분류는 인류 역사 어느 때나 있었다. 원시인은 ‘먹을 수 있는 식물’과 ‘먹을 수 없는 식물’로 분류했다. 그러나 세상 만물의 체계적 분류, 즉 ‘계층적 분류’가 가능해진 것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1561~1626)의 ‘대개혁(Instauratio Magna)’ 이후의 일이다.

베이컨이 시도한 ‘대개혁’의 핵심은 ‘분류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극도로 혐오한 베이컨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고대인들’의 근거 희박한 분류체계를 폐기하려는 ‘고대인과의 투쟁’을 시작했다. 베이컨의 책 『신기관(Nobum Organum)』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Organon)’을 뒤집겠다는 뜻이다. (동양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던 이유는 베이컨과 같은 이들의 ‘고대인과의 투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이미 설명했다).

미완으로 끝난 베이컨의 분류학을 완성시킨 이는 스웨덴의 식물학자 칼 폰 린네(Carl von Linné·1707~1778)다. 베이컨이 주장한 ‘관찰’과 ‘실험’에 기초한 귀납적 분류법을 식물에 적용해 아주 세밀한 생물 분류학을 세웠다. 학창시절, 생물 시간에 죽어라 외웠던 ‘종-속-과-목-강-문-계’ 이야기다. 당시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 줄 몰랐다. 그저 마구 외웠다. 지금도 나는 이 분류가 아주 공포스럽다.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은 마음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저 외워야만 했던 이 신성불가침의 분류체계를 좀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일단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할 때, ‘호모(Homo)’는 속(屬)의 이름이고, ‘사피엔스(sapiens)’는 ‘종(種)’의 이름이다. 그다음 단계의 분류체계로는 ‘사람과(Hominidae)’, ‘영장목(Primates)’, ‘포유강(Mamalia)’, ‘척추동물문(Vertebrata)’, ‘동물계(Animalia)’의 순으로 확장된다. 린네의 분류체계는 그렇다 치고, ‘종-속-과-목-강-문-계’라는 이 황당한 한자어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가가 내 질문이다. 각 한자어가 어떤 이유로 이렇게 엮였는지 내 한자 실력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일본 박물관의 아버지로 불리는 다나카 요시오. [사진 고도쿄]

일본 박물관의 아버지로 불리는 다나카 요시오. [사진 고도쿄]

원어를 찾아봤다. 차라리 원어가 쉽다. ‘종(種)’은 ‘species’, ‘속(屬)’은 ‘genus’, ‘과(科)’는 ‘family’, ‘목(目)’은 ‘order’, ‘강(綱)’은 ‘class’, ‘문(門)’은 ‘division’ 또는 ‘phylum’, ‘계(界)’는 ‘kingdom’의 번역어다. 도대체 누가 이따위로 번역했을까? 또 찾아봤다. 메이지 시대 일본의 박물학자 다나카 요시오(田中芳男)다. 그가 1875년 펴낸 『동물학초편포유류(動物学初篇哺乳類)』란 책에서 처음 번역한 것들이다. 이 뜬금없는 일본 메이지 시대의 번역어들을 우리 부모들부터 우리 세대를 거쳐 우리 자녀들에 이르기까지 죽어라 외우고 있는 것이다.

다나카 요시오라는 사람이 느닷없이 중요해진 것은 이 황당한 번역어 때문만이 아니다. 그가 ‘박물관’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장을 다녀온 후, 그는 자연과학 전반을 연구하는 조직의 명칭을 ‘박물관’이라는 단어로 하자고 제안했다. 그뿐만 아니다. 1873년 빈 만국박람회에 다녀온 후에는 우에노 공원에 박물관(현재 도쿄국립박물관)과 동물원 설립을 제안하고 주도적으로 실현시켰다. 1875년의 일이다.

도쿄국립박물관의 공식 역사는 1872년 도쿄 분쿄쿠 유시마의 유교사당에서 열린 당시 문부성 박물국 주최의 ‘박람회’를 그 기원으로 잡는다. 당시 이 행사의 광고와 입장권에 ‘문부성 박물관’이라고 기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박물국’이 ‘박람회’를 개최했다는 사실, 그리고 ‘박물관’의 기원을 ‘박람회’로 잡는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Exhibition’(영국). ‘Exposition’(프랑스), ‘Ausstellug’(독일), ‘Fair’(미국)의 번역어인 ‘박람회’와 ‘Museum’의 번역어인 ‘박물관’이 당시 메이지 정부 사람들에게는 개념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일본 메이지 정부의 관계자들이 가장 먼저, 그리고 직접 경험한 서구는 ‘박람회’라는 압축적 공간에서였다. 당연히 가장 먼저 모방해야 할 서구는 ‘박람회’였다. 정부주도의 ‘식산흥업(殖産興業)’, 즉 서구식으로 ‘생산을 늘리고 산업을 일으키는 것’은 메이지 정부가 추구하는 ‘문명개화(文明開化)’의 본질이었고, ‘박람회’는 이 ‘식산흥업’과 ‘문명개화’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견인차로 여겨졌다. 이들에게 박물관은 박람회의 상설전시관과 같은 것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미친 듯 서구화를 밀어붙였다. 빈 만국 박람회(1873년) 이후, 불과 2년 만에 ‘박물관’을 세우고, 4년 후인 1877년에 제1회 ‘내국권업박람회’를 열었던 것이다.

이 급격한 변화의 과정에서 다나카 요시오라는 한 개인에 의해 ‘박물관’이란 단어가 만들어지고 ‘종-속-과-목-강-문-계’라는 생물 분류체계가 번역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박물관의 본질은 바로 분류에 있기 때문이다. 박물관이란 진귀한 혹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물품을 전시하는 곳이다. 전시하려면 체계가 있어야 한다. 즉 전시품들이 ‘분류’ 되어야 한다. 문제는 이 전시품들을 분류하는 원칙이 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우에노 박물관은 1889년 ‘제국박물관’으로의 명칭이 변경된다. 단순히 명칭만 변경된 것이 아니라 전시 분류체계 또한 바뀌었다. 이 같은 변화는 ‘미술’ 개념의 변화와 관련해 아주 흥미롭다. ‘제국박물관’으로 변경하는 과정에는 ‘일본화’라는 새로운 개념을 미술에 포함시키려했던 국수주의자 오카쿠라 텐신의 의도가 깊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텐신의 활동 뒤에는 어니스트 페놀로사(Ernest Francisco Fenollosa·1853~1908)라는 미국인의 ‘미술박물관’ 구상이 깊이 개입되어 있다. 이들에게 미술의 중심은 ‘일본화’였다.

분류가 권력이다!  

우에노 도쿄국립박물관. [사진 고도쿄]

우에노 도쿄국립박물관. [사진 고도쿄]

‘제국박물관’에서 전시품의 분류 자체는 이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전시의 순서가 달라졌다. 첫째는 ‘역사부(歷史部)’, 바로 그다음에 ‘미술부(美術部)’가 배치되었다. 이어서 ‘미술공예부(美術工藝部)’와 ‘공예부(工藝部)’가 전시되었고, 자연 관련 전시품인 ‘천산부(天山部)’가 가장 뒤로 밀렸다. 이전의 ‘자연 대 인공’의 순서가 ‘인공 대 자연’으로 바뀌고, 기존의 ‘예술’의 개념을 대신해 ‘미술’이란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박물관에서 담당했던 박람회 관련 업무는 농상무성으로 이관함과 동시에 ‘역사’와 ‘미술’ 중심의 박물관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때 ‘미술’은 ‘시각미술’ 혹은 ‘응용미술’과 대립하는 ‘순수미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일본화’라는 새로운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미술을 의미한다. ‘서예’와 ‘공예’는 은연중 ‘순수미술’에서 배제되기 시작했다. 서예를 ‘미술’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시작한 ‘서예는 미술이 아니다’ 논쟁이 ‘일본화’ 개념의 성립으로 귀결되자, 오히려 ‘서예’가 배제되는 희한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일본화’와 대립하는 ‘서양화’를 위한 미술관은 한참 후인 1959년 르코르뷔지에의 설계로 우에노 국립박물관 인근에 건립되었다. 이름도 ‘국립서양미술관(国立西洋美術館)’이다.

정리해보자. 근대 일본의 박물관 설립과정에서 ‘미술’은 ‘공예’까지 포함하는 포괄적 예술개념에서 시각예술의 제한적 의미로 축소되었다.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의 분류를 통해 ‘공예’는 자연스럽게 ‘미술’에서 떨어져 나갔다. 국수주의라는 시대적 배경과 맞물리며 ‘서양화’와 대립하는 ‘일본화’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박물관의 전시분류과정에서 일본화는 슬그머니 ‘미술’의 중심에 자리 잡으며 서양화를 주변으로 밀어냈다. 존재는 분류를 통해 정당화된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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