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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편집국장 레터] '기본소득'이라는 구호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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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1호 면

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중앙SUNDAY 편집국장 김종윤입니다. ‘기본소득’이 유행어가 됐습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여러 정치인이 기본소득 도입을 들고 나왔습니다. 기본소득은 보수 진영에도 매력적인 상품입니다. 원래 보수진영에서 주장하는 기본소득의 전제는 복잡한 복지제도를 없애고 기본소득 한 가지로 통합하자는 것입니다.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철학에 맞는 셈이지요. 복지 수혜자에 대한 낙인효과도 없앨 수 있습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심화할수록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위기감이 높아지면서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도 커졌습니다. 벤처 캐피탈리스트 와이콤비네이터의 샘 울트면 회장은 2016년 8월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에서 100가구를 선정해 1년간 매달 200달러를 주는 실험을 했습니다.

그는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미래의 공장을 예로 들어 설명했습니다.
 “미래의 공장에는 개 한 마리와 직원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 개는 외부 사람이 기계를 건드리는 걸 막기 위해서, 사람은 개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서.”
일자리가 드물어진 세상에서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현금을 주면 복지 사각지대를 없애고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생각입니다. 이미 플랫폼 노동자 같은 새로운 직종이 탄생했지만, 이들은 고용보험 사각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여기에는 조건이 깔립니다. 최소한의 급여가 보장돼야 한다는 점입니다. 논란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한국의 5200만 국민에게 월 1만원씩 기본소득을 주면 연간 6조2400억원이 들어갑니다. 『복지의 원리』 저자인 양재진 연세대 교수는 연간 6조7000억원(2018년 기준)이 소요되는 실업수당과 비교했습니다. 실업수당은 최대 9개월 동안 월 198만원까지 지급합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오세훈 전 서울시장(오른쪽). [MBC 100분토론 캡처]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오세훈 전 서울시장(오른쪽). [MBC 100분토론 캡처]

실업자에게 실업수당으로 줄 돈을 전 국민 기본소득 지원금으로 대체한다고 가정해보죠. 국민은 월 1만원의 푼돈이 생깁니다. 반면에 최대 월 200만원 가까이 실업수당을 받던(또는 받을) 실직자들은 1만원 기본소득 받는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복지 사각지대 해소가 아니라 사각지대를 더 안 보이게 만드는 꼴입니다. 생계급여, 기초연금, 아동수당 등 다른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본소득을 도입하려면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지가 핵심이란 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기존 복지 제도를 다 없애고 기본소득으로 대체하려는 건 가뜩이나 사회보장시스템이 취약한 한국 실정에서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기존 복지제도를 그대로 두고 기본소득을 도입하려면 증세는 불가피합니다. 소액 증세로는 턱도 없습니다. 획기적인 증세가 뒷받침돼야 합니다.

이쯤에서 진보 진영의 목소리가 울립니다. 부유세, 로봇세, 생태세 등을 신설하고, 기존의 재산세, 소득세 등을 강화해 재원을 마련하자는 겁니다. 이게 당장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지금 단계에서 기본소득 주장은 정치적 구호에 불과합니다. 유권자 모두에게 돌아가는 작지만 달콤한 사탕이, 지원이 꼭 필요한 소수에게 돌아가는 적절한 당근보다 표를 모으는 데는 더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힘으로도 때를 만난 아이디어를 막을 수 없다”(빅토르 위고)는 말이 있습니다. 기본소득 주창자들이 즐겨 찾는 문장입니다. 기본소득 아이디어가 때를 만난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초적인 논의를 해보자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마치 곧 실행할 수 있을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는 건 위선입니다. 한국의 사회안전망은 여전히 취약합니다. 일하고 싶은데 일자리가 없고, 일해도 소득이 적은 이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촘촘히 까는 게 우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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