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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도 놀랐다, 퇴임 3개월 앞 권순일 대법관 파격 판결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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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권순일

권순일

퇴임을 3개월 앞둔 권순일(61·사진) 대법관이 진영을 넘나드는 판결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2014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제청하고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명한 권 대법관은 ‘보수 성향의 대법관’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최근 이어진 그의 판결에 진보와 보수로 분류되는 판사들 공히 ‘파격적’이라고 평가한다.

양승태가 제청 ‘보수 성향’ 대법관 #“미혼부도 아이 출생등록 할 권리” #“기지 반대글 삭제 배상책임 없다” #최근 좌우 넘나든 소신판결 화제

권 대법관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언급되며 진보 진영의 탄핵 대상에 올랐었다. 지난 4·15 총선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맡아 거꾸로 야당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가 막바지 판결을 통해 남기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권 대법관은 지난 2주간 양쪽 진영에서 논쟁을 일으키는 여러 파기환송 판결을 했다. 모두 1·2심 결론이 같았던 사건을 ‘틀렸다’고 돌려보냈다. 두 건이 대표적이다. 첫째는 지난 8일 미혼부가 아이의 출생등록을 할 권리를 최초로 인정한 판결이다. 이를 통해 현행법상 아이의 출생 신고를 할 수 없었던 미혼부와 그 아이들의 권리가 구제됐다. 소수자의 권리를 넓힌 진보적 판결이란 평가를 받았다.

한국에 통계로 잡히는 미혼부는 7768명(2018년 기준)이다. 학계에선 최대 3만 명으로 본다. 한 현직 판사는 “입법으로나 해결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 문제였다. 법의 해석을 넓힌 획기적 판결”이라 말했다.

둘째는 이 판결 나흘 전인 4일 나온 것이다. 해군 홈페이지에 게시된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글을 해군이 삭제한 행위에 국가 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다. 해군에 원고 1인당 30만원 배상판결을 했던 원심이 5년만에 뒤집혔다. 천주교인권위원회와 진보네트워크센터 등 시민사회에선 “표현의 자유를 전면 부정하는 판결”이란 논평이 나왔다.

윤진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권 대법관의 판결은 진보나 보수 등 이분법적으로 나누기 어려운 특징이 있다”며 “한번 판결이 나오면 학계에서도 상당한 논쟁이 뒤따른다”고 말했다. 대법원 내부에선 ‘권 대법관이 남은 임기 동안 파기할 판결이 아직 여럿 남았다’고 바라본다.

실제 권 대법관의 판결을 모아보면 사안에 따라 보수처럼 보이기도, 김명수 대법원에서 가장 진보적인 대법관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권 대법관이 국가의 손해배상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온 것은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2015년 박정희 대통령의 긴급조치가 고도의 정치성을 띤 행위라 손해배상 청구대상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2018년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 재상고 사건에서도 조재연 대법관과 소수 의견에 섰다. 1965년 한·일 협정으로 피해자의 개인보상청구권이 소멸됐다고 봤다. 이에 반하는 하급심 판결이 잇달아 나오고 있다.

반면 여성과 아이 등 소수자의 권리에 민감했다. 2018년 판결문에 ‘성인지감수성’을 처음 언급한 이도 권 대법관이다. 6세 때 수영장에서 사고를 당한 학생의 손을 들어주며 수영장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지난해 판결도 사회와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권 대법관은 지난해 검찰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 공소장에 공범으로 적시되며 어려움을 겪었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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