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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코로나 치료비 구상권 청구가 만능카드?

중앙일보

입력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완화된 '생활 속 거리두기'로 방역 체계를 전환한 지 한달여가 흘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세가 잦아들며 '생활 방역'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최근 수도권을 중심으로 집단감염 사례가 산발적으로 나타나며 정부가 긴장하고 있다. 감염 경로 파악이 어려운 '깜깜이 감염'의 비율이 높아지는 것도 긴장감을 끌어올리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돌아가는 것에는 선을 긋고 있다. 대신 법이나 지침 등을 어긴 사람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있다. 심지어 ‘구상권(求償權) 청구’ 카드까지 꺼내들 태세다.

서울 관악구에 있는 건강용품 판매 회사인 '리치웨이'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했다. 4일 찾아간 이 회사 노인홍보관엔 원형 테이블과 의자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중앙포토]

서울 관악구에 있는 건강용품 판매 회사인 '리치웨이'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했다. 4일 찾아간 이 회사 노인홍보관엔 원형 테이블과 의자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중앙포토]

수도권 방역상황서 나온 구상권 

구상권은 다른 사람의 채무를 우선 갚아준 뒤 원채무자에게 그 금액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로, 방역 수칙을 어긴 개인이나 단체 등에 정부가 치료비나 방역 비용에 대한 구상권을 청구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것이다.

이미 감염병예방법상 형사처벌이 가능하다. 역학조사를 방해하거나 자가격리를 위반할 때, 소독 미비 등에 대해 국가나 지자체가 제재를 가할 수 있다. 법원의 판결 등에 따라 최대 2000만원에 이르는 벌금을 물리는 것이다. 그런데도 과태료 부과 논의에 이어 구상권 청구 검토까지 나왔다. 가중처벌이 될 수 있다. '공포 방역'이란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정세균 국무총리. 뉴스1

정세균 국무총리. 뉴스1

文대통령, 鄭총리 관련 발언 이어

구상권 청구에 대한 언급이 나온 것은 문재인 대통령과 정세균 국무총리의 지난 8일 주례회동 때다.

이날 문 대통령은 수도권 내 코로나19 집단감염 상황을 보고받으면서 일탈 행위에 대한 엄정 대응을 주문했다. 문 대통령은 “고의 또는 중과실로 인한 위반의 경우 치료비 등 경제적 피해에 대한 구상권 행사를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루 뒤 정 총리 주재로 긴급관계장관 회의에서도 정 총리가 “방역당국과 지자체에서는 방역수칙을 위반한 곳에서 확진자가 나오거나 감염 확산을 초래한 경우, 치료비나 방역 비용에 대해 구상권 청구도 적극 검토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중대본 회의 주재하는 박능후 복지부 장관. 연합뉴스

중대본 회의 주재하는 박능후 복지부 장관. 연합뉴스

경고성 메시지 성격 짙었던 구상권 

그동안 코로나19 방역현장에서 구상권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건 아니다. 지난 3~4월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 때 유흥주점이나 종교시설 발(發) 확산을 차단하기 위한 일종의 ‘경고성’ 메시지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국정 책임자인 문 대통령과 정부 이인자 정 총리가 잇따라 구상권 청구 발언을 내놓으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는 모양새다.

방역이 최일선에 있는 지자체 관계자는 “거리두기나 마스크 착용 등 방역수칙을 보다 철저히 지켜달라는 뜻 아니겠냐”면서도 “앞으로 구상권 청구가 적극적으로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 방역체계를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생활속 거리두기'로 전환한 지 한 달을 맞은 가운데 수도권을 중심으로 집단감염이 연쇄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5일 저녁 서울 홍대 앞 거리가 젊은이들로 붐비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 방역체계를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생활속 거리두기'로 전환한 지 한 달을 맞은 가운데 수도권을 중심으로 집단감염이 연쇄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5일 저녁 서울 홍대 앞 거리가 젊은이들로 붐비고 있다. 연합뉴스

감염병예방법상 벌금 부과하는데 

현행 감염병예방법상 방역수칙을 위반해 확진자가 발생하거나 감염확산으로 이어졌을 때 국가나 지자체가 쓴 ‘비용’을 물릴 수 있도록 하는 벌칙조항이 없다. 이런 사법적 제재 외에 정부가 민사영역인 구상권 청구까지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을 드러낸 것이다.

코로나19 환자 치료비의 경우 중증도에 따라 한명당 330만~7000만원에 이른다. 수천만원에서 수억 원을 물어줘야 하는 상황에 내몰릴 수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동안 대형병원이 아닌 방역수칙을 지키지 않은 일반 개인이나 자영업자를 상대로 구상권을 청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대구·경북에 낮 최고기온이 연일 35도를 웃도는 폭염이 이어지는 가운데 10일 오후 대구 달서구 보건소 주차장에 마련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선별진료소에서 의료진이 짧은 휴식을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구·경북에 낮 최고기온이 연일 35도를 웃도는 폭염이 이어지는 가운데 10일 오후 대구 달서구 보건소 주차장에 마련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선별진료소에서 의료진이 짧은 휴식을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법조계, "일반적이지는 않아" 

의료관련 소송을 주로 담당하는 방승환(제이씨앤파트너스) 변호사는 “정부 입장을 명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피해자’인 환자에게 국가가 지급한 치료비 등에 대해 추후 책임 있는 개인이나 사업체를 상대로 (구상권을) 행사하려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며 “소송은 가능할 수 있지만,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과실비율을 따져 구상권을 청구하는 게 일반적이지는 않다”고 말했다.

물론 코로나19 상황에서 제주도나 인천시가 자가격리 수칙을 위반하거나 역학조사 과정에서 거짓말을 한 사례에 대해 각각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거나 구상권 청구를 검토한 일은 있다. 이례적인 경우지만 정부가 구상권 청구를 적극 검토하면서 앞으로는 일반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5월 이후 코로나19 신규 확진자.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5월 이후 코로나19 신규 확진자.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과태료'까지 부과하겠다는 정부 

와중에 정부는 감염병예방법도 뜯어고치려 한다. 방역수칙을 지키지 않을 경우 즉시 ‘과태료’를 부과하겠다는 방향이다. 그렇다고 형사처벌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민사영역인 구상권까지 청구되면 3중의 벌을 받게 될 수도 있다. 코로나19 중앙사고수습본부 관계자는 “구체적인 법 개정 내용에 대해서는 앞으로 여러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고 일단 선 그었다.

지난달 초 서울 용산구 이태원 클럽 발 감염을 시작으로 수도권 안에서 발생한 주요 집단감염(10명 이상)만 10건이다. 6일 기준 환자수는 660명에 달한다. 정부는 상황이 심각하지만 사회적 거리두기로 돌아갈 상황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대신 생활방역을 철저히 지켜달라고 연신 당부한다. 불요불급한 모임이나 외출도 미뤄달라고 했다.

코로나19의 확산세를 막기 위해 공포를 불사한 방역 강공책을 쏟아내는 마음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가중처벌 논란까지 빚어질 수 있는 구상권 청구가 코로나19의 확산을 막을 수 있는 만능카드는 아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구상권 카드를 꺼내들 것인지. 국민에게만 가혹한 책임을 지우는 것 같아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세종=김민욱 기자 kim.min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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