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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심은경의 미국에서 본 한국

친애하는 파커 일병에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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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한미경제연구소장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한미경제연구소장

우리는 이웃이에요. 저희 집은 몬태나주 밀너 호수 기슭의 오두막입니다. 일년 전 집 옆에 있는 작은 묘지를 걷다 오리나무와 폰데로사 소나무 사이에서 당신의 삶이 기록된 검소한 묘비를 발견했어요. 저는 뜨내기 이웃입니다. 일 년의 대부분을 워싱턴 DC에서 보내지요. 메모리얼 데이가 지난 지금은 몬태나에 돌아와 있습니다. 밀너 호수 공동묘지엔 미국이 참전한 모든 20세기 전쟁의 용사들이 여기저기 묻혀있습니다. 이들 대부분의 무덤에는 메모리얼 데이를 기리기 위해 성조기가 꽂혀있어요. 하지만 당신의 무덤에는 없었습니다. 아마도 다른 이들과 달리 살아 돌아오지 못해서, 참전 용사 단체에 가입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겠지요. 당신의 짧은 인생은 약 70년 전 한국에서 마감했습니다.

20살 앳된 나이로 한국 지키다 숨진 #그의 희생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 #양국민이 그에게서 영감·겸손 얻어 #역사적 과제 위한 동행 다시 나서길

저도 당신처럼 광활한 미국 서부에서 자라 21살에 한국으로 갔습니다. 당신은 그보다 어린 20살에 자신의 선택이 아닌 의무로 한국에 갔지요. 당시 미국 남성들은 병역의 의무가 있었으니까요.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을 넘자 트루먼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방어한다는 중대 결정을 내렸습니다. 갓 20살이 된 당신은 그해 7월 3일 24사단 34보병대대의 일원으로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평택에 있는 당신의 대대는 7월 6일 북한군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5시간을 버텼지만 결국 천안으로 후퇴했습니다.

7월 12일 공주까지 퇴각한 당신의 대대는 금강을 따라 55㎞를 방어했습니다. 북한군 전차와 병력이 주변을 둘러쌌지만 방어력은 부족했습니다. 결국 당신의 부대는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당신은 대전을 방어하기 위해 갑천강을 따라 남쪽으로 후퇴했다가 다시 고창으로 갔습니다. 여기서 당신의 부대는 동쪽으로 이동했지요. 8월 초, 철수한 생존자들은 낙동강에서 병력을 재편성했습니다. 이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기 전까지 부산 방어선이 구축되고 많은 군인과 민간인의 희생으로 방어선은 지켜집니다.

그러나 당신은 낙동강에 닿지 못했지요. 당신은 1950년 7월 30일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다른 많은 한국인과 미국인들처럼 당신의 삶은 전쟁의 끔찍한 도입부에서 끝났습니다. 1950년 7월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나요. 전장은 계속 남하하고 병력과 화력은 열세에다 체계도 없던 그때, 고통과 파괴 그리고 당신을 둘러싼 죽음을 바라보던 그때 말입니다.

미국 몬태나주 밀너 호수 공동묘지에 있는 파커 일병의 묘비. [사진 캐슬린 스티븐스]

미국 몬태나주 밀너 호수 공동묘지에 있는 파커 일병의 묘비. [사진 캐슬린 스티븐스]

왜 당신은 알링턴 국립묘지나 다른 훌륭한 군인 묘지가 아닌 밀너 호수의 조용한 무덤에 묻혔나요. 어쩌면 파커 일병의 어머니는 당신을 잃은 상실감에 아들을 위로할 산과 호수가 있고 쉽게 방문할 수 있는 가까운 곳을 원하셨나 봅니다. 파커 일병의 희생은 의미가 없거나 잊혀진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저는 당신보다 25년 후에 한국에 갔습니다. 천안·공주·대전 사람들과 언덕에 오르고 강가를 따라 걷기도 했어요. 그때 만난 한국 사람들은 전쟁의 고난과 희생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국과 미국은 혈맹관계라고 말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존립을 위해 치른 인간적 고통의 끔찍한 대가가 헛되지 않도록 나라를 잘 건설하겠다고 다짐했어요.

저는 그후 수 십 년 동안 한국의 도약을 직접 지켜봤습니다.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경제 번영과 탄탄한 민주주의를 이뤄내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와 가치 공유로부터 나오는 활력이 안보와 경제 협력을 튼튼하게 해 한·미 관계의 폭이 더 넓어지는 것을 봤습니다. 당신이 직접 목격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어떻게 한국인들이 지난 70년 동안 미국과 동행했는지, 어떻게 우리가 친구를 넘어 동반자가 됐는지 알 수 있었을텐데요. 특히 전세계가 심각한 사회·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고 미국 국내에서는 평등·정의·인권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우리 스스로 투쟁을 재개하는 요즘 같은 때 말입니다.

파커 일병. 몬태나에 있는 가족에게 돌아와 당신의 삶을 살았다면, 그래서 지금쯤 호숫가에 사는 제 90살 이웃이었다면 정말 좋았을 거에요. 우리는 물수리가 수면 위를 날아 다니고 산봉우리 위로 치솟는 것을 보며 과거와 미래에 대한 담소를 나눴겠지요. 당신의 인생이 너무 빨리 끝난 것에 애도를 표합니다. 1953년 정전협정이 맺어졌지만 불만족스럽고 불완전했습니다. 한반도와 우리가 사랑하는 미국에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일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은 세계에서 존경받는 나라로 부상했습니다. 이는 정전협정 후 한국 전쟁의 희생을 ‘무승부를 위한 죽음(Die for a tie)’이라 폄훼했던 것이 틀렸음을 증명합니다.

워싱턴 DC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관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어요. “조국은 전혀 몰랐던 나라,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부름에 응했던 우리의 아들과 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파커 일병. 6월의 어느 아름다운 날 당신의 묘비에 꽃을 놓으며 소망합니다. 2020년 한·미 두 나라 국민들이 당신의 희생에서 영감과 겸손을 얻고 역사적 과제에 결의와 지혜로 맞서기 위해 다시 함께 나서기를 말입니다.

진심을 담아, 캐슬린 스티븐스 올림.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 미국대사·한미경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