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

박현주의 변심이냐, 숙청당한 덩샤오핑 손녀사위의 반격이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미국 럭셔리 호텔 인수 소송 내막 들여다 보니

글로벌 무대를 휘젓는 한국 기업의 전형적인 성공 스토리였다. 2019년 9월 미래에셋자산운용(이하 미래에셋)이 중국 다자보험(구 안방보험. 이하 안방)으로부터 미국 내 15개 럭셔리 호텔을 7조원(58억 달러)에 사들이는 계약 체결을 발표했을 때까지는. “글로벌 네트워크와 투자 역량을 바탕으로 한 국내 최대 해외 대체투자”라는 언론의 수식은 이런 성공에 걸맞은 찬사였다. 뉴욕 JW메리어트 에식스 하우스와 샌프란시스코 리츠칼튼 하프문베이 같은 럭셔리 호텔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미래에셋의 글로벌 위상은 껑충 뛰어올랐을 게다.

7조원짜리 국내 최대 호텔 계약 #소유권 분쟁 드러나 계약 파기 #“숨긴 채 계약” vs “사기 피해일 뿐” #오는 8월 1심 결과에 주목

그런데 이로부터 7개월 후인 지난 2020년 4월 양측이 법적 분쟁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미래에셋 측이 호텔 주인이 누구인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계약 파기에 나서자, 안방(安邦) 측이 소유권은 확실히 자신들에게 있다며 계약을 이행하라고 미국 델라웨어 형평 법원에 제기한 소송이었다. 소유권 분쟁을 숨기고 매매 계약을 했으니 신의칙 원칙에 따라 계약 자체가 무효라는 게 미래에셋 측 주장이고, 예상 못 했던 코로나19 사태로 호텔 값어치가 떨어진 데다 자금조달마저 어려워지니 미래에셋이 공연한 트집을 잡는다는 게 안방 측의 소송 제기 사유였다.

미국 내 15개 럭셔리 호텔 매매 둘러싼 법적 분쟁

미국 내 15개 럭셔리 호텔 매매 둘러싼 법적 분쟁

한마디로 중국 안방의 사기(에 가까운 거래)냐, 아니면 미래에셋의 변심이냐로 요약할 수 있다. 호텔 소유권을 명확히 가려 누가 계약을 어겼는지만 밝히면 된다는 얘기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오래도록 중국 정치권력과 금융권력을 장악했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반(反)부패 사냥에 숙청당한 태자당 인맥(장쩌민파)과의 연관을 의심할만한 복잡한 이면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장쩌민파가 숙청 직전 해외로 빼돌린 자산을 다시 확보하려는 일종의 금융 쿠데타가 이번 소송의 배경이라는 루머가 흘러나오는 이유다.

미래에셋은 장쩌민파의 도피 자산인 줄 모르고 덥석 물었다가 낭패를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안방 측 주장대로 사기꾼들의 대담한 사기행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핑계를 대는 것일까. 미래에셋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이미 지불한 7000억원의 계약금을 돌려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셋자산운용과 연대해 미래에셋대우 등 계열사가 출자하기로 한 22억 달러가 묶이는 불상사를 겪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금 압박으로 재무건전성 우려가 불거지는 한편 글로벌 무대에서 신용을 잃을 우려가 있다. 중국 정부의 요구로 급하게 자산 매각을 추진했던 안방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양측이 미국 델라웨어 형평 법원에 제출한 소장과 첨부 서류, 그리고 대리인이 낸 입장문 등을 근거로 진실이 무엇인지,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내막을 좇아봤다.

장쩌민파의 도피 자산?

사건은 미래에셋과 안방이 인수 계약을 체결하기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덩샤오핑의 손녀사위로 2004년 안방보험을 창업한 우샤오후이(吳小暉) 회장은 공격적 투자를 거듭해 사세를 확장하고 막대한 부를 일군 인물이다. 2014년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을 19억5000만 달러(2조3000억원)에 인수하면서 전 세계 부동산업계에 확실한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한국에도 손을 뻗쳐 2015년과 2016년엔 동양생명과 알리안츠생명 한국법인을 샀다. 안방이 이처럼 전 세계 금융회사와 부동산을 통 크게 사들일 때마다 자금 출처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됐고, 그때마다 장쩌민파가 배후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올 것이 왔다. 2016년 막바지 권력 다툼을 벌이던 시진핑 주석이 “금융시장에 ‘악어’가 횡행하고 있다”고 비판하자, 2017년 2월 중국 금융감독당국이 “자본시장 악어를 체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곧바로 우 회장에 대한 수사에 들어갔다.

바로 이 시점에 미래에셋과 안방과의 거래를 뒤흔든 논란의 문건 하나가 등장한다. 2017년 5월 15일, 그러니까 우 회장이 전격적으로 체포되기 한 달 전 중국어로 작성된 DRAA(Delaware Rapid Arbitration Act)라는 화해문서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안방보험이 ‘안방’이라는 상표 사용과 관련한 상표권 분쟁을 해결하는 대가로 미국 월드 어워드 파운데이션(WAF) 등 몇몇 기관에 900억 달러를 지급하기로 하고, 우선 90억 달러(11조원)에 달하는 선지급금 보장을 위해 20개 부동산을 담보로 제공한다는 게 이 문서의 주요 내용이다. 우 회장의 친필 사인, 그리고 그의 창업 파트너이자 태자당 핵심 인물인 천샤오루(陳小魯) 이사의 직인이 함께 찍힌 이 서류 안에는 이번에 미래에셋이 사기로 계약한 15개 호텔을 포함해 20개 호텔이 담보로 명시돼 있다. 안방이 2016년 미국 사모펀드 블랙스톤으로부터 이 호텔을 사들인 건 맞지만 WAF가 담보권 행사에 나선 만큼 실제 소유권은 안방이 아닌 WAF가 갖고 있다는 의미다. 우 회장 측이 체포 직전 이같은 편법으로 재산을 빼돌린 것이라면 미래에셋은 7조원을 지불한 후 지루한 소유권 다툼을 벌여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 회장이 서명한 DRAA 미스터리

우샤오후이 전 회장(左), 박현주 회장(右)

우샤오후이 전 회장(左), 박현주 회장(右)

이 서류와 관련한 쟁점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안방이 이 서류의 존재를 숨긴 채 미래에셋과 계약을 체결했는가 하는 점이다. 둘째, 서류의 위조 여부다. 중국의 의도된 사기냐, 아니면 미래에셋의 변심이냐 여부는 이 서류의 정체성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양측 주장은 첨예하게 엇갈린다. 우선 미래에셋 측은 이 DRAA는 웬만한 법조인에게도 생소한 전문적인 문서 형식으로, 허접한 위조문서라고 치부하기 어려운 정통한 법률 지식이 묻어난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우 회장 재직 당시 직접 서명한 만큼 안방의 공식문서이거나, 설령 위조라 하더라도 최소한 안방과 관련한 핵심 인물이 관여한 문서로 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쉽게 말해 계약 체결 전 매매 당사자(안방)가 아닌 제 3자(WAF)가 이 DRAA를 기반으로 소유권을 주장하는 소송을 제기한 만큼 사려고 했던 호텔들의 소유권이 명확하지 않은 데다 피델리티 인터내셔널 등 미국 내 주요 권원보험사 4곳이 모두 보험 인수를 거절(※한국으로 치면 등기 불가, 미국은 부동산 등기제도가 없어 소유권자를 확인하려면 전문 보험사의 권원보험을 발급받아야 한다)했으니 호텔 인수에 필요한 잔금을 지불할 수 없다는 얘기다.

게다가 안방 측이 계약 전 이런 소송 사실을 미래에셋 측에 알리지 않고 DRAA 문서도 공개하지 않았으니 신의칙 위반으로 계약은 원천 무효라고 주장한다. 미래에셋을 대리하는 로펌 피터앤김과 퀸 엠마뉴엘이 쓴 반소장에는 “안방이 소송을 감추고 계약을 하는 등 기망 행위를 한 데다 권원보험 확보에 실패한 만큼 거래 종결을 위한 의무를 위반했다”고 씌어있다.

판결 따라 한쪽은 큰 타격

안방은 정반대의 주장을 편다. 소유권과 관련한 모든 소송은 안방과 무관한 사기극이고 자신들은 피해자라는 입장이다. 사기꾼들이 계약 체결 한 달 전인 8월 소유권 주장 소송을 제기한 것은 사실이나 소송 자체는 물론 DRAA라는 서류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계약 체결 후 알게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DRAA도 위조 서류로 본다. 안방을 대리하는 깁슨 던&크리처 로펌은 “소유권과 관련한 소송에 등장하는 인물은 범죄 전과가 있는 샌프란시스코의 우버 드라이버로, 안방은 조잡한 사기의 피해자”로 규정한다. 미래에셋을 상대로 제기한 소장에 보면 우 회장 친필 서명에 대한 언급은 없이 2016년 1월에 사임한 천샤오루 직인이 2017년 서류(DRAA)에 날인되어 있는 것 등을 위조 근거로 들고 있다. 이 거래와 관련한 안방 측 한국 관계자는 “캘리포니아 소송과 관련해 이미 안방의 호텔 소유권을 확인하는 판결을 받은 데다 권원보험 확보 문제는 이번 소송의 본질과 무관하다”며 “이 모든 게 매수인(미래에셋)의 변심(buyer’s remorse)”이라고 했다.

모든 게 미스터리다. 내막을 소상히 알고 있을 우 전 회장은 2018년 2월 불법자금 조달과 사기·횡령 등 혐의로 기소돼 징역 18년형 받고 복역 중이다. 2019년 7월 중국 보험관리감독위원회는 중국보험보장기금(CISF)이 지분 대부분(98.2%)을 차지하는 다자 보험 그룹 설립을 승인하고, 안방의 모든 자산을 다자에 넘겼다. 그리고 두 달 뒤인 2019년 9월엔 상하이 중급인민법원이 105억 위안(1조7700억원)에 달하는 우 전 회장의 재산을 몰수하고 불법소득 752억 위안(12조6500억원)을 추징했다. 중국 역사상 최대 벌금이자 묘하게도 WAF가 이번에 안방으로부터 집행하겠다는 소유권과 맞먹는 액수다.

안방이 델라웨어 법원에 제기하고 미래에셋이 맞소송한 재판은 8월 말 열려 이르면 8월 말이나 9월엔 1심 판결이 나올 예정이다. 재판으로 모든 진실이 드러날지는 알 수 없지만 판결에 따라 미래에셋과 안방 중 하나는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