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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라금지법 만들기전에 고발부터한 정부…"北의 가스라이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정부는 10일 북한이 최근 대남 강경 기조를 보이며 남북 통신선을 차단하는 이유로 지목한 2개 탈북자 단체를 고발하고 법인 설립 인가를 취소키로 했다.

'북한 눈치 보기' 비판 별개로 실효성 논란

여상기 통일부 대변인은 “금일(10일) 정부는 자유북한운동연합과 큰샘을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으로 경찰에 고발할 예정”이라며 “이들 법인의 설립 허가 취소 절차에도 착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자유북한운동연합과 큰샘은 탈북자인 박상학과 박정오씨가 각각 대표로 있는 단체로, 지난달 31일 대북전단을 살포했다. 해당 단체의 교류협력법 위반 사실이 확정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내야 한다.

여상기 통일부 대변인이 10일 긴급 현안브리핑에서 "대북 전단 살포를 주도한 탈북민 단체를 고발하고, 법인 설립 허가를 취소하기로 했다"고 발표하고 있다.[뉴스1]

여상기 통일부 대변인이 10일 긴급 현안브리핑에서 "대북 전단 살포를 주도한 탈북민 단체를 고발하고, 법인 설립 허가를 취소하기로 했다"고 발표하고 있다.[뉴스1]

정부는 이날 고발 및 인가 취소 결정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여 대변인은 “정부는 두 단체가 대북 전단 및 페트병 살포 활동을 통해 남북교류협력법의 반출 승인 규정을 위반했다”고 말했다. 또 “남북 정상 간 합의를 정면으로 위반해 남북 간 긴장을 조성하고, 접경지역 주민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위험을 초래하는 등 공익을 침해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1990년 제정된 남북교류협력법(13조 1항)은 북한에 물품을 보내려는 사람은 사전에 통일부 장관의 승인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두 단체가 지난달 31일 전단과 1달러짜리 지폐를 풍선에 담아 살포하는 과정에서 사전 승인을 받지 않았다는 게 통일부 입장이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0일 황해남도 신천박물관 앞에서 진행된 조선사회주의여성동맹(여맹) 간부들과 여맹원들의 대북전단 살포 항의 군중집회를 소개했다. [연합뉴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0일 황해남도 신천박물관 앞에서 진행된 조선사회주의여성동맹(여맹) 간부들과 여맹원들의 대북전단 살포 항의 군중집회를 소개했다. [연합뉴스]

정부 당국자는 “남북 정상은 지난 2018년 4월 열린 판문점 정상회담 당시 대북전단 살포를 포함해 접경지역에서 적대적 활동을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며 “최근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접경지역 국민들이 불안해하고, 안전을 위해 대북전단 살포를 막아 달라는 민원이 이어지고 있어 해당 단체들을 단속키로 했다”라고도 설명했다.

정부의 이같은 조치는 전날(9일) 북한이 대남 사업을 ‘대적(對敵) 사업’으로 전환하고, 실제 군 통신선 등 일체의 통신을 차단한 후 하루 만에 나온 것이다. 올해 초부터 남북관계 개선에 '올인' 입장을 보인 정부가 '북한 눈치 보기'라는 일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급한 불 끄기’에 나선 셈이다. 이번 조치를 계기로 대북 특사 파견 등을 통해 향후 남북관계 개선에 나설 수 있는 여건은 마련된 셈이다.

하지만 이번 조치와 관련, 남북 정상 간 '합의'를 국내법으로 적용 가능하냐와 대북전단이 남북교류협력법상의 반출 승인 대상이냐는 등 법적 논란과는 별개로 전문가들 사이에선 실효성 논란도 나오고 있다. 이번 조치로 북한의 대남 강경 기조가 완화될지 미지수라는 것이다.

'자유북한운동연합' 관계자들이 지난달 31일 새벽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에서 '새 전략핵무기 쏘겠다는 김정은'이라는 제목의 대북전단 50만장과 소책자 500권 등을 담은 풍선을 날리고 있다. [뉴스1]

'자유북한운동연합' 관계자들이 지난달 31일 새벽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에서 '새 전략핵무기 쏘겠다는 김정은'이라는 제목의 대북전단 50만장과 소책자 500권 등을 담은 풍선을 날리고 있다. [뉴스1]

김영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북한은 강도 높은 대북 제재와 코로나 19 확산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며 “이런 내부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북한 지도부가 주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탈북자 전단을 문제 삼은 측면이 있어 정부가 자신들이 요구한 조치를 취하더라도 당분간 현재의 강경 기조를 유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 북한은 2000년 6ㆍ15 공동선언 이후 20년 만에 남측을 ‘적’으로 규정하고,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의 담화 등을 노동신문에 게재해 북한 주민을 대상으로 공론화했다.

북한의 이번 조치가 남한에 대북 제재를 적극적으로 돌파하라는 '압박'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대북전단 살포 단체 고발은 북한 입장으로 봐선 나쁠 것은 없지만, 동문서답일 수도 있다. 김홍균 전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북한의 이번 조치는 한국 정부를 강하게 압박해 남북 및 북·미 관계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진 리 미국 윌슨센터 한국역사·공공정책센터장은 트위터를 통해 "북한은 한국이 관계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6.15 선언이라는 이정표 20주년을 앞두고 한국을 가스라이팅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가스라이팅(gaslighting)은 상대방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히 조작해 스스로 인식이나 판단을 의심하게 해 통제와 지배력을 강화하는 심리 조작의 한 형태다.

서울=정용수 기자, 워싱턴=박현영 특파원 nky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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