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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다음엔 닭 보내지 마라" 전화 건 아버지의 깊은 뜻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푸르미의 얹혀살기 신기술(22)

“정말 좋은 딸이야. 하하 호호 웃는 얼굴에, 절대‘아니요’가 없다. 늘 ‘네, 네!’ 대답뿐이다.”

아버지가 언니2에 대해 설명하는 말이다. 분명 아버지 의도는 언니에 대한 ‘칭찬’일 텐데, 나에게는 ‘너와는 다르다.’, ‘너는 왜 바로 ‘네!’ 하질 못하니?’ 하는 속마음이 들릴 때가 있다.

언니2는 교회 주일학교에서 ‘천사누나’로 통했을 정도로 착하고 싹싹하다. 아버지 닮아 키 크고 훤칠한데, 엄마 닮아 피부도 백옥 같아서 청소년기에는 스스로 (나를 비롯한 다른 자매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청춘스타 하희라를 닮았다 생각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늘 방글방글 웃으며 ‘Yes!’와 ‘OK!’만 연발하니 어른들도 좋아할밖에.

아버지는 자신을 쏙 빼닮은 둘째 딸을 각별하게 아끼고, 그 사랑을 받은 언니2는 아버지에게 더욱더 잘하고, 그야말로 훈훈한 ‘사랑의 선순환’이다. 시어머니 모시고 자녀 셋을 양육하며 일하는 와중에 틈틈이 집에 들러 반찬도 만들고 청소도 해 놓고 가는 언니2는 나에게도 고마운 ‘우렁각시’다.

언니2가 가져온 방울토마토를 아버지에게 씻어 드렸다. 그 후 한의원에 모시고 갔는데, 침 맞고 나오시자마자 화장실을 급히 찾으셨다. 갑작스레 쏟아진 설사에 당신도 놀라셨는지 원망스러운 눈으로 날 보시며 ’토마토 먹는데 기분이 안 좋더라니...“ 하시는 게 아닌가. [사진 Pixabay]

언니2가 가져온 방울토마토를 아버지에게 씻어 드렸다. 그 후 한의원에 모시고 갔는데, 침 맞고 나오시자마자 화장실을 급히 찾으셨다. 갑작스레 쏟아진 설사에 당신도 놀라셨는지 원망스러운 눈으로 날 보시며 ’토마토 먹는데 기분이 안 좋더라니...“ 하시는 게 아닌가. [사진 Pixabay]

퇴근해 돌아오면 아버지는 “‘오늘도 ‘못 말려’(아빠가 부르는 언니의 애칭)가 다녀갔다”는 말로 언니2의 선행을 나에게 브리핑한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물티슈를 뽑아 들고 눈에 보이는 먼지를 제거하는 것으로 시작, 화장실과 냉장고를 살피고 국 한 가지, 반찬 한 가지라도 더 해 놓고 가려고 바삐 움직이는 언니 모습이 눈앞에 그대로 그려질 정도로 묘사가 섬세하다. 늘 마지막 문장은 “하도 바쁘게 움직이는 통에 나는 정신도 없고 귀찮다”고 결론 내리지만, 기특해하면서 은근히 기다리는 눈치다.

문제는 언니와 나의 살림 방식과 식성이 다르다는 것이다. 언니와 나는 뿌리는 같지만, 집 떠난 지 20년이 넘었다. 우리 집에서 함께 산 기간보다 결혼 후가 더 긴 시간이다. 달고 짠 음식을 좋아하는 아이들을 셋이나 키워서인지, 고혈압·당뇨·고지혈증의 아버지가 드시기에 좀 자극적이다. 아버지는 입에 대지도 않는 돼지고기 반찬을 해 놓고 간 날엔 ‘우리 언니 맞아?’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 가족 식성은 잊고 본인 가족 입맛에 더 익숙한가 싶어 섭섭할 때도 있다.

언니가 오는 날이면 아버지는 내가 준비한 음식은 젖혀두고 언니가 차린 것으로 식사하신다. 혈압과 당 수치를 의식해 자제하고 있는 달콤한 간식도 마음껏 드신다. 아버지를 위해 먹을 것 사오고 밥상을 차리는데 그걸 마다할 수 있겠느냐마는 저녁에 돌아와 그대로 남아 있는 내 음식을 보면 짠해진다. 아버지랑 함께 먹으라고 일부러 남겨둔 것임을 알지만, 괜히 섭섭하다. (이런 것을 요즘 말로 ‘의문의 1패’라고 한다) 그래도 언니가 준비한 음식이 저녁 식탁을 채우는 날은 한결 준비가 편하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언니2가 집에 와서 호박나물과 버섯나물 등 밑반찬 몇 가지를 해 놓고 방울토마토와 참외를 냉장실 서랍에 담아두었기에 아버지에게 방울토마토를 씻어 드렸다. 그 후 한의원에 모시고 갔는데, 침 맞고 나오시자마자 화장실을 급히 찾으셨다. 그러기를 연거푸 두 차례, ‘하마터면 큰 실수할 뻔했다’ 며 크게 당황하셨다. 다행히 오래가진 않았지만, 갑작스레 쏟아진 설사에 당신도 놀라셨는지 원망스러운 눈으로 날 보며 “토마토 먹는데 기분이 안 좋더라니…” 하는 게 아닌가. 혹시나 하고 인터넷을 찾아보니 방울토마토의 성질이 차가워서 몸이 찬 사람이 먹으면 설사를 유발할 수 있다는 내용이 나왔다. 그동안은 그런 일이 없었는데, 요즘 컨디션이 좋지 않으신 탓인가 주의해야겠다 싶었다.

그리고 다음 날 간식으로 참외를 깎아놓고 출근했는데, 낮에 언니2로부터 전화가 왔다. 한의원 모시러 가려고 집에 왔는데 아버지가 설사하신다고. 변에선 참외 씨가 잔뜩 나왔다 했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한 그릇만 준비된 삼계탕을 보시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거셨다. ’다음부터 닭은 절대 보내지 마라. 막내는 입도 안 대는데, 나 혼자 먹으려니 민망하다!“ 그 말씀을 듣는데, 왜 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지, 사람의 마음이란 단순하면서도 참 기기묘묘하다. [사진 Pixabay]

한 그릇만 준비된 삼계탕을 보시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거셨다. ’다음부터 닭은 절대 보내지 마라. 막내는 입도 안 대는데, 나 혼자 먹으려니 민망하다!“ 그 말씀을 듣는데, 왜 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지, 사람의 마음이란 단순하면서도 참 기기묘묘하다. [사진 Pixabay]

급히 퇴근해 집에 오니 아버지는 오한이 있다며 두꺼운 옷을 입고 침대에 누워계셨다. 날 보자마자 “다시는 나한테 참외 먹으라고 하지 마라!”하셨다. 얼른 약을 찾아 드시게 한 뒤 한숨 돌리는데, 슬며시 화가 났다. 나는 언니가 가져다 놓은 것을 드린 것뿐인데, 날 원망하시는 것 같아 억울한 마음도 들고. 다행히 약을 드신 뒤 설사는 잦아들었다. 저녁 식사로 죽을 드시고는 “이제 허리가 좀 펴진다” 며 표정도 밝아졌다. 그런데 “언니가 끓여놓고 간 죽 덕분에 다 나았다고 전화해 줘라” 하는 게 아닌가. 순간 가슴이 탁 막혔다. 토마토도 참외도 아버지에게 드린 건 나니 누굴 탓할 수도 없고, 회복된 게 다행이다 위로하며 쓸쓸히 잠들었다.

다음 날 기력을 좀 회복하라고 삼계탕을 끓였다. 아버지는 닭을 좋아하진 않지만, 여름 삼계탕만은 보약이라 생각하고 드신다. 마침 지난주에 언니가 냉동실에 놓고 간 닭이 한 마리 있어 찹쌀을 넣고 보글보글 끓여 드시기 편하게 살을 발라 드렸다.

“너는 왜 안 먹어?”
한 그릇만 준비된 삼계탕을 보시더니 물으셨다.

“아빠 닮아서 저도 닭 안 좋아해요. 아빠는 기운을 회복하셔야 하니 천천히 다 드세요.” 아무 말 없이 알뜰하게 살을 다 발라드시고, 찹쌀죽과 국물까지 시원하게 드신 아버지는 어딘가로 전화를 거셨다.

“다음부터 닭은 절대 보내지 마라. 막내는 입도 안 대는데, 나 혼자 먹으려니 민망하다!” 통화 내용이 멀리서도 귀에 쏙쏙 꽂혔다. 그 말씀을 듣는데, 왜 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지, 사람의 마음이란 단순하면서도 참 기기묘묘하다.

공무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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