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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수싸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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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진석 기자 중앙일보 기획취재담당
박진석 사회에디터

박진석 사회에디터

“주말에 몰래 에버랜드에 다녀왔는데 디즈니랜드보다 좋더라고요. 이렇게 좋은 기업을 수사해야 한다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도 듭디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BW) 저가발행 의혹 사건 수사가 진행 중이던 2003년, 당시 서울지검 간부가 농반진반으로 한마디를 던졌다. 삼성그룹에 대한 상당수 국민의 ‘양가(兩價) 감정’을 대변한 듯한 발언이었다.

삼성은 대한민국 대표 기업이자 세계 굴지의 글로벌 기업이다. 많은 한국인이 ‘삼성 밥’을 먹고 살면서 삼성을 아끼고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적지 않은 논란은 삼성에 대한 애정의 순도(純度)를 낮추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중 핵심인 경영권 승계 관련 논란은 삼성에버랜드 BW 사태부터 국정농단 사건을 거쳐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건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역사를 쌓아오고 있다.

구력이 쌓이다 보니 삼성과 검찰의 수 싸움도 농도가 짙어진 듯하다. 지난 2일의 검찰수사심의위원회 소집 신청은 허를 찌른 묘수였다. 알려진 순서와는 반대지만, 삼성이 영장 청구 움직임을 사전 포착한 뒤 선수를 친 것으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전직 특수통 검사들이 즐비한 삼성 변호인단 면면을 보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수는 일단 먹혀들어간 것 같다. 검찰이 구속 영장 청구로 맞불을 놓았지만 ‘홧김 청구’로 평가 절하된 데 이어 기각되기까지 했다.

겉보기에는 검찰의 완패다. 하지만 영장 청구 자체를 검찰의 고육계(苦肉計)로 볼 여지는 없을까. 사실상 수사를 종료한 검찰로서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속에 목을 맬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영장을 청구하면서 ‘삼성 봐주기’ 논란을 피해갔을 뿐 아니라 가외 소득까지 챙겼다. 영장 판사가 “재판에서 유·무죄 판단을 받아볼 필요가 있다”며 내심 불기소를 희망했던 삼성을 뜨끔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건 일회성 묘수와 궁극적 승착(勝着)은 별개라는 점이다. 진짜 승부는 구속 여부가 아니라 판결에서 갈린다. 그러니 양측은 이제 수 싸움이 아니라 원하는 판결을 끌어내는데 전력을 기울이는 편이 낫지 않을까. 경제 상황과 법적 정의를 동시에 고려한 ‘진짜 묘수’의 도출은, 그 방면에 풍부한 경험을 가진 사법부의 몫으로 돌리는 게 온당할 것 같다.

박진석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