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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제, 먼저 해본 핀란드가 말해준다 "결과는 충격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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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민컴 페이스북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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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을 둘러싼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운을 떼고,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취지에 공감을 표시했다.

김 위원장은 2016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 대표 시절에도 기본소득을 화두로 꺼냈다. 당시 국내 언론은 기본소득을 "진보진영의 어젠다"라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합리적 보수 이미지를 가진 김 대표가 제안한 것이 의아하다"고 했다.

기본소득, 작은 정부와 시장·행정 효율 추구…보수의 논리

한데 기본소득은 원래 보수의 어젠다다. 작은 정부를 지향하면서 국민을 일터에 나오도록 하는 목표를 지향하고 있어서다.

2017년부터 2년 동안 기본소득을 실험한 핀란드도 보수 정부의 주도하에 실험이 이뤄졌다. 실험 목적으로 "노동시장에 대한 참여를 증가시키고, 사회보장 혜택과 관련된 관료주의를 감소시킬 수 있는지 연구"라고 적시했다.

각종 사회보장 정책을 모두 기본소득으로 통합해 대체하면 행정비용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일정액을 기본소득으로 준다. 대신 다른 사회보장은 없다. 그러니 그 돈이 부족하면 나와서 일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유휴 노동력을 일터로 끌어내면서 복지 정책의 통합을 꾀하는 셈이다. 한마디로 행정과 시장의 효율성을 추구한다. 국가가 거저 주는 돈이 아니라는 의미다.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기본소득 등 현안 관련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뉴스1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기본소득 등 현안 관련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뉴스1

이런 속내를 간파하는 일부 복지단체는 "기본소득은 기본권 보장이 아니다"며 반대 목소리를 낸다. "실업부조나 공공부조를 기본소득으로 대체하려는 것"이어서다. 이렇게 되면 돈 없는 저소득층에게 오히려 불리하다. 2017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선진국을 대상으로 시뮬레이션한 결과도 "저소득층이 타격을 입는다"였다.

각국, 실험 거치며 조심스럽게 접근…검증없는 도입 논의는 한국이 유일

그래서 어느 국가든 기본소득제를 섣불리 하려 않는다. 특정 집단을 선정해 효과를 실험하거나 국민의 뜻을 묻는 투표까지 하며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국가의 재정과 국민 생활, 복지체계, 조세 제도 등 사회 각 부문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만 유독 검증 과정도 없이 '도입'이나 '시행'을 전제로 논란을 벌인다. 일단 실시하고, 추후 문제가 나타나면 수정하는 구태의연한 정치·행정이 기본소득 접근 방식에도 어김없이 적용되고 있는 꼴이다. 기본소득을 두고 이렇게 접근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통계청장을 지낸 유경준 미래통합당 의원은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 기본소득은 한 나라도, 하고 있는 나라도 없다"며 "시도하려는 국가도 국민투표를 하거나 장기간의 사회적 실험이라는 숙고 과정을 거친다"고 말했다.

핀란드 탐페레 시내 호숫가에 자리한 쿠마 레스토랑 사우나에 딸린 간이 수영장에서 여가를 즐기는 핀란드 인. 중앙포토

핀란드 탐페레 시내 호숫가에 자리한 쿠마 레스토랑 사우나에 딸린 간이 수영장에서 여가를 즐기는 핀란드 인. 중앙포토

기본소득이 주목받은 건 꽤 오래전이다. 1970년대 캐나다와 미국 일부 지역에서 실험했었다. 캐나다는 전 국민이 아니라 저소득층에 돈을 주는 실험(민컴 실험)이었다. 미국의 경우 닉슨 대통령 재임 시절 가족부조계획이 의회에서 논의됐다. 그러나 의회는 "시기상조"로 결론 내렸다. 2018년에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시가 빈민 지역 1000가구를 무작위로 선정해 주민 개개인이 아니라 가구당 월 1000유로(약 135만원)를 지급하는 실험(B-MINCOME)을 했다. 고용증가나 창업·구직의욕, 직업훈련 참여 등 고용효과가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1970년대부터 기본소득 실험…국가 전체 실험은 인구 544만명인 핀란드뿐

전국 단위의 실험은 2017년부터 2년 동안 실시한 핀란드가 유일하다. 핀란드의 인구는 554만명에 불과하다. 사회보장 수준도 높다. 이처럼 적은 인구를 가진 복지 국가도 실험부터 했다. 2000명의 실업자를 무작위로 뽑아 매달 560유로(약 75만6000원)를 지급하고, 다른 실업자 집단과 고용효과를 비교했다.

이 실험 결과는 지난해 발표됐다. 이를 두고 "실패"와 "실패는 아니다"는 등 반응이 엇갈린다. 확실한 것은 실험의 목표였던 고용에 미치는 영향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실패로 보는 이유다. 이에 반론을 제기하는 부류는 실험 목표와 상관없는 "행복도가 높아졌다"는 점을 내세운다.

헤이키 히일라모 헬싱키대학 교수. 트위터 캡처

헤이키 히일라모 헬싱키대학 교수. 트위터 캡처

그렇다면 핀란드 현지의 학자는 어떻게 분석하고 있을까. 헤이키 히일라모 헬싱키대 사회정책학부 교수가 실험 결과에 대한 분석 보고서를 냈다. 결론은 "노동시장에 미치는 효과는 무시할 정도고, '주관적 복지(행복도 등)가 나아졌다'는 조사 결과도 신뢰하기 어렵다"였다. 기본소득 실험이 실패했다는 말이다.

히일라모 교수는 "전통적으로 좌파연합이 기본소득을 주장해왔지만 놀랍게도 2017년 실험은 중도 우파인 부르주아 정부에 의해 시행됐다"고 말했다. 그는 "훌륭한 복지국가 시스템을 가진 핀란드가 사회적 보호가 약하거나 전혀 없는 나라에서나 나오는 아이디어를 실험한 것도 특이한 점"이라고 덧붙였다.

"기본소득은 은제 탄환 아니다…고용 효과 무시할 수준" 

히일라모 교수는 기본소득을 실험한 목적을 "사회보장 제도를 재구성하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에게 강력한 노동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라고 했다. 고용 결과가 긍정적 신호를 주는 방향으로 나와야 기본소득이 고용시장에서 당근으로서의 효과가 입증된다는 의미다.

그는 "기본소득은 실업의 은제 탄환이 아니다"고 단언했다. 서구의 전설에선 은제 탄환을 악마를 퇴치하는 무기로 여긴다. 기본소득으로 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뜻이다.

히일라모 교수는 우선 실험의 과정부터 비판했다. 그는 "실험 시작 1년 뒤인 2018년 핀란드 정부는 실업 시스템에 새로운 취업 활성화 제도를 도입했다"며 "이로 인해 실험 과정과 표본이 오염됐다"고 꼬집었다. 새 제도 때문에 기본소득을 받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고용 효과를 제대로 비교분석하기 어렵게 됐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일라모 교수는 "결과는 실망"이라고 했다. 실험을 분석한 결과 기본소득을 받은 사람의 근로일수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많지도 않고, 소득도 높아지지 않았다는 것. 이를 근거로 그는 "젊은이와 장기 실업자에겐 금전적 인센티브보다 기술이나 건강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확인시켜줬다"고 꼬집었다.

실험 결과 기본소득을 받은 사람은 2017년 49.6일 일했고, 안 받은 실업자는 49.3일 일했다. 소득 비중은 각각 43.7%, 42.9%였다. 기본소득 실험을 진두지휘한 올리 캉가스 핀란드 사회보장국장도 "고용 효과는 미미했다"고 인정했다.

"행복도 높아져 실패 아니라고? 실험 과정 오염돼 신뢰성 결여"

다만 일각에선 웰빙 측면에선 기본소득이 효과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삶의 만족도(10점 척도)는 기본소득을 받은 사람이 7.3점이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6.8로 큰 차이가 없었다. 정신적 스트레스는 16.6% 대 25%로 기본소득을 받은 사람이 조금 낮았다. 미래에 대한 자신감도 58.2% 대 46.2%로 기본소득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히일라모 교수는 "신뢰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 이유로 그는 우선 "기초 조사가 없었기 때문에 실험 대상의 주관적인 평가가 기본소득을 받기 시작한 뒤 바뀌었는지를 확인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즉 긍정적인 평가는 기본소득 자체와 관련성이 없다. 오히려 기본소득에 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진 시점에서 '(표본으로)선택된' 집단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주관적 평가에) 관련성을 키웠다"고 덧붙였다.

히일라모 교수는 또 "실험 도중에 장기 실업자에 대해 제재를 가하는 제도를 시행한 것도 웰빙 조사 결과에 대한 신뢰성을 떨어뜨린다"고 말했다. 기본소득을 받지 않는 실업자는 구직이나 직업훈련에 나서지 않으면 새 제도에 따른 제재를 받게 돼 스트레스가 가중됐을 것이라는 의미다.

"기본소득 주장하는 사람에겐 핀란드 실험이 충격"

히일라모 교수는 "응답률이 아주 낮은 것도 신뢰도에 의문을 갖게 하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실험 뒤 기본소득을 받은 사람은 설문 조사에서 31%밖에 응답하지 않았다. 안 받은 사람의 응답률은 고작 20%였다.

캉가스 국장도 OECD에 낸 보고서를 통해 "표본이 너무 적었다. 그나마 표본의 응답률도 낮았다"고 고백했다. 데이터로 확인할 수 있는 고용 수치와 달리 행복감과 같은 주관적 점수에 대한 신뢰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히일라모 교수는 "기본소득이 저소득층에게 자립을 도모할 수 있도록 활성화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겐 핀란드 실험의 결과는 '충격적'일 수 있다"는 말로 분석 보고서를 갈무리했다.

OECD 시뮬레이션에선 기본소득이 저소득층에 더 타격 줘…빈곤율 높아져 소득재분배 효과 역행

OECD가 2017년 영국과 핀란드, 프랑스, 이탈리아 등 4개국을 대상으로 기본소득 시뮬레이션을 한 결과도 히일라모 교수의 분석과 같다. 시뮬레이션 결과 핀란드·영국·프랑스에선 빈곤율이 증가했다. 저소득층이 더 큰 타격을 입는다는 뜻이다. 기본소득이 소득 재분배 효과를 낼 것이라는 일부의 주장과 정반대다. 이탈리아에서는 빈곤율이 낮아졌다. OECD는 그 이유로 "이탈리아의 사회보장제도는 부자에게 더 큰 혜택이 돌아가는 구조로 짜여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OECD "기본소득 주려면 증세 필요…국민 세금 부담 커져"

OECD는 "최저보장 소득 수준만큼 기본소득을 주려면 증세가 필요하다"며 "국민 대다수의 세금 부담이 올라가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세금 비율도 높아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기본소득은 혜택을 보는 사람과 불이익을 입는 사람(저소득층)으로 나누게 되고, 이는 결국 근로의욕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고 예측했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wol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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