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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스페인 삼겹살, 타히티 바닐라…온 세상 맛이 이곳에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심효윤의 냉장고 이야기(4)

미국 인류학자인 랄프 린튼(Ralph Linton)은 평범한 미국인의 삶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침대에서 잠을 깬다. 침대라는 가구는 근동 지역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다. 인도에서 재배되기 시작한 면이나 근동에서 재배되기 시작한 아마(亞麻)로 만든 요를 덮고 잤을 것이다. 인도에서 발명된 옷인 파자마를 벗고, 고대 갈리아족(Gaul)이 발명한 비누로 얼굴을 씻는다.
… 아침을 먹으러 나가기 전에 창문을 내다볼지도 모른다. 창은 이집트에서 발명된 것이다. 밖에 비가 내리면 중앙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발견한 고무로 만든 덧신을 신을 것이고,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발명한 우산을 쓸 것이다.
… 아침 식사는 강철 그릇에 담겨 있는데 강철은 인도 남부 지방에서 처음 만들어진 금속이다. 그가 사용하는 포크는 중세 이탈리아 사람들의 발명품이고 수저는 로마에서 사용하던 것을 변형한 것이다.
이 사람은 이제 겨우 아침 식사를 시작했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그는 온종일 전 세계의 문화를 만난다. 잠자리에 들 무렵 종일 겪은 전 세계의 문명을 결산하면서 히브리족의 신인 하나님에게 인도유럽어로 기도할 것이다. 자신이 완전한 미국인이라는 허구적 사실에 감사하는 기도를 …

인류학개론 시간에 접해본 글이다. 우리는 모두 과거로부터 만들어진 역사의 산물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건 대부분 다른 문명에서 왔다. 같은 맥락에서 이번에는 우리 집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먼저 냉동고 칸을 열었다. 스페인산 냉동 삼겹살, 노르웨이산 순살 고등어, 전북 군산 특산물 박대와 같은 육류·어류 식재료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스페인 요리인 감바스(Gambas al ajillo)를 만들려고 사 놓은 베트남산 칵테일새우도 보이고, 국내 대기업 제품인 냉동 돈까스도 고이 모셔져 있다. 이 돈까스로 말할 것 같으면, 무려 미국과 호주, 캐나다산 밀이 섞인 빵가루에, 말레이시아산 팜유로 만든 마가린과 국내산 돼지고기 뒷다리살, 중국산 두류가공품, 마지막으로 미국산 모차렐라 치즈까지 혼합된 글로벌 합작품이다.

냉장고 속에는 세상 각지에서 온 식품이 담겨있다. 식탁을 보아도 온 세계이고, 지구 한 곳만 아파도 전 세계가 고통받는 세상이다. 세계는 촘촘히 연결되고 더욱 좁아졌다는 걸 체감하고 있다. [사진 pixabay]

냉장고 속에는 세상 각지에서 온 식품이 담겨있다. 식탁을 보아도 온 세계이고, 지구 한 곳만 아파도 전 세계가 고통받는 세상이다. 세계는 촘촘히 연결되고 더욱 좁아졌다는 걸 체감하고 있다. [사진 pixabay]

냉장고 야채칸에는 비교적 국내산 식재료가 많다. 전남 무안의 양파, 충남 태안 다진마늘 등 각종 채소는 대부분 국내산이다. 반면에 과일은 항공 수송으로 들어온 글로벌 푸드가 많다. 그중에서도 필리핀산 바나나와 뉴질랜드산 키위, 미국산 망고는 냉장고가 아닌 다용도실에 보관하고 있다.

아내가 사랑하는 초콜릿도 있다. 서아프리카에서 나는 코코아 콩, 카리브해에서 나는 설탕, 브라질산 커피, 미국산 오렌지, 에스파냐산 아몬드, 터키산 개암, 타히티섬에서 나는 바닐라가 혼합된 초콜릿이다. 크래커와 함께 즐기려고 야심 차게 만든 후무스(hummus, 중동 음식)도 보인다. 미국산 병아리콩을 삶아 인도산 향신료인 큐민가루를 섞어서 만들었다.

음료로는 캐나다산 오트와 렌틸, 국내산 발아현미와 백태, 페루산 퀴노아가 섞여 있는 두유가 있다. 바로 옆에는 오렌지 주스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미국산 오렌지 과즙 25%와 국내 제주도산 감귤과즙 25%가 혼합된 음료다. 미국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의 감귤 재배자 6000여 명으로 구성된 협동조합 브랜드 제품이다. ‘썬키스트’는 현재 45개 이상의 국가에서 600여 개 종류 제품에 쓰인다.

이렇게 냉장고 속에는 세상 각지에서 온 식품이 담겨있다. 말 그대로 온갖 세계를 담은 거대한 냉장고다(Big Fridge Small World). 늘 먹었던 것이 당연한 게 아니었다. 식탁을 보아도 온 세계이고, 지구 한 곳만 아파도 전 세계가 고통받는 세상에 살고 있다. 바이러스가 단 몇 시간 만에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퍼져나가는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 세계는 촘촘히 연결되고 더욱 좁아졌다는 걸 모두가 체감하고 있다. 이제 ‘코끼리’가 아니라 ‘지구’를 냉장고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전 세계의 식재료를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하나의 식품이 완성되기까지는 각종 재료가 광범위하게 섞여 있는 복잡한 구조가 필요하다. [사진 Pxhere]

전 세계의 식재료를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하나의 식품이 완성되기까지는 각종 재료가 광범위하게 섞여 있는 복잡한 구조가 필요하다. [사진 Pxhere]

스페인산 돼지고기, 브라질산 사탕수수로 만든 설탕, 중국산 고춧가루로 조리한 제육볶음과 러시아산 북어로 만든 북엇국으로 한 끼를 먹었다면, 오늘의 식사는 한국식 메뉴일까? 바다 건너온 식재료로 만든 요리가 과연 한국 음식일까? 전 국민이 사랑하는 짜장면을 중화요리라고 본다면, 요즘 세계가 열광하는 짜파구리는 한국 음식인가, 중국 음식인가. 음식의 세계를 접하면 접할수록 우리의 것이 유일하고 필연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국 음식을 해외 식재료로 만들 수 있고, 반대로 외국 요리에 국내산 식재료가 쓰일 수도 있다. 한국산 갯장어가 좋다고 일본에서는 샤브샤브(유바키)를 해 먹으며, 한국산 배가 식감이 아삭하고 과즙이 풍부해서 샐러드 양념에 쓴다거나, 한국산 고춧가루나 고추장, 고소한 참기름을 애용하는 유럽 셰프들도 생겼다. 이 밖에도 톳, 전복, 파프리카 등이 효자 수출품으로 알려져 있고, 웰빙푸드로 이름값을 하는 한국산 김은 이미 유명해진 지 오래다(면세점에서 외국 관광객들이 김을 한가득 실어 담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다).

김 한 장 안 나는 태국에서는 우리의 마른 김을 수입해서 ‘김 스낵’을 만든다. 태국은 더운 날씨 탓에 김이 나지 않는데, 한국산 김에다가 ‘단짠맛’을 내는 각종 조미료를 첨부해서 김 스낵을 만든다.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치르고 있어서, 태국으로 놀러 간 한국 관광객이 도리어 김 스낵을 사 오는 재밌는 현상도 벌어진다.

VR COOKBOOK. [사진 광주대학교 아시아문화원 컨소시엄]

VR COOKBOOK. [사진 광주대학교 아시아문화원 컨소시엄]

전 세계의 식재료를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하나의 식품이 완성되기까지 각종 재료가 광범위하게 섞여 있는 복잡한 구조에서 생산된다. 음식이 상품이 되고 기업이 밥상을 차려주게 되면서, 소비자의 입맛과 기호에 맞춰 음식 문화가 획일화되었다. 소비자의 건강을 고려하기보다 인기 있는 음식이 잘 팔리기 때문이다. 기업은 이윤을 남기는 게 가장 중요하다. 원가 절감을 위해 저렴한 재료를 얻는 과정에서 음식 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

전 지구를 무대로 대량 생산하고, 효율적으로 가공하고, 빠르게 유통하고, 합리적인 가격으로 소비하는 세계 식량 체계(Global Food System)가 갖춰졌지만, 음식이 상품화되면서 역효과도 발생했다. 각종 농산물이 세계 곳곳에서 수송된다는 건 그때마다 화석 연료가 사용된다는 걸 의미한다. 자원 부족도 문제가 되겠지만 이산화탄소의 배출은 지구온난화를 가져온다.

복잡한 생산 구조에서 발생하는 환경오염 문제와 식품안전사고, 식품 생산자로부터 단절된 정보(원산지, 생산 방식, 이산화탄소 배출량, 유전자변형 등)를 소비자 개인이 파악할 수 있을까? 글로벌 기업의 제품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소비자들끼리 어떻게 연대하고 현명하게 활동해야 하는지, 당장 먹고사는 중요한 문제인데 학교에서는 이러한 교육을 하고 있을까? 냉장고 덕분에 전 세계를 얻었지만, 우리의 건강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앨런 맥팔레인(2009), 『손녀딸 릴리에게 주는 편지』, 랜덤하우스, 24~25쪽에서 재인용. 주변 사람들이 인류학에 관해서 물을 때마다 내가 추천해주는 책이다.

아시아문화원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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