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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여자의 프랑스풍 환상특급 “느닷없는 재난, 예외는 없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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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개봉한 '프랑스 여자'(감독 김희정)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이국적인 여자 미라(김호정)와 옛 동료 성우(김영민) 등 주변 인물들의 내면을 탐색하는 영화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지난 4일 개봉한 '프랑스 여자'(감독 김희정)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이국적인 여자 미라(김호정)와 옛 동료 성우(김영민) 등 주변 인물들의 내면을 탐색하는 영화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이 영화 기묘하다. 제목은 ‘프랑스 여자’인데 처음과 끝이 파리의 어느 카페란 것 외엔 별다른 힌트가 없다. 이곳에서 주인공 미라(김호정)는 프랑스인 남편과 이혼 문제로 언쟁을 벌이고 있다. 그 사이 러닝타임 89분을 채우는 것은 미라의 서울 여정. 파리 유학을 떠나기 전 가족처럼 지냈던 20년 전 공연예술아카데미 친구들과 재회하는 과정이다.

이혼 후 마주하는 몽환적인 과거 #타임슬립에다 심령물 요소도 녹여 #"죽음에 대한 사회적 책임의식 담아"

반가운 것도 잠시, 미라는 자주 가위 눌리고 20년 전 젊은 나날로 끌려들어간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타임슬립이면서 주인공의 심리와 환상을 따라 종종 섬뜩한 심령물로 변한다. 뒤틀리고 중첩된 시공간 속에 이 여자가 겪은 건 어디까지 현실일까.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반가워요. 뻔하지 않게, 우리 인생이 그렇듯이 낯설고 불가해하게 그리고 싶었거든요. 40대 여성과 그 또래들이 주인공인 영화가 흔치 않은데 어쩔 수 없이 홀로 서는 상황에서 일상과 판타지를 녹이고 싶었어요.”

지난 4일 영화 개봉날 만났던 김희정 감독의 설명이다. 여러모로 영화 속 미라의 절친한 후배이자 영화감독인 영은(김지영)을 연상시키는 서글서글한 말투로, 하지만 예민한 감수성의 미라 같은 시선으로 말했다. 작품 속 미라가 배우를 꿈꿨던 설정 그대로, 감독은 그를 통해 우아한 맵시의 40대 후반 여성을 그려낸다. 이국적이면서 고독한 여자는 종종 현실의 문을 밀고 나가 몽환적인 과거와 마주친다.

미라(김호정)의 서울 여정을 적극적으로 돕는 후배 영은 역의 김지영.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미라(김호정)의 서울 여정을 적극적으로 돕는 후배 영은 역의 김지영.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지난 4일 개봉한 '프랑스 여자'(감독 김희정)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이국적인 여자 미라(김호정)와 주변 인물들의 내면을 탐색하는 영화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지난 4일 개봉한 '프랑스 여자'(감독 김희정)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이국적인 여자 미라(김호정)와 주변 인물들의 내면을 탐색하는 영화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그 나이대에 '미라' 역을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는 배우는 김호정 배우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오랫동안 연극무대에서 활동해서 작품에 대한 문학적 이해력도 높고. 욕조에 몸이 빨려들어가는 공포스러운 장면도 혼신의 힘을 다했죠.” 프랑스에서 20년 산 듯한 불어 대사는 별도로 연습한 결과라고. 극 중 의상도 대부분 본인 것일 정도로 몰입에 충실했다고 한다.

미라가 과거에 연연할 때 죄책감의 고리가 되는 연극 연출가 성우 역은 ‘부부의 세계’ 이후 대세배우로 떠오른 김영민이 맡았다. “그렇게 안 보이지만 나와 동갑인데(웃음) 친구이기 전에 좋아하는 배우”라면서 “더도 덜도 아니게 역할에 딱 맞게 잘해 주었다”고 만족감을 표했다. 실제로 1999년 연극으로 데뷔해 오랫동안 대학로에서 활동한 김영민의 극단 지휘가 자연스럽다.

영은 역의 김지영까지 배우들의 앙상블이 돋보이는 신이 원테이크로 찍은 5분짜리 주점 술자리 장면. 2년 전 자살한 해란을 떠올리게 하는 연극배우 현아(1인2역 류아벨)가 합석하면서 긴장감이 고조되는데, 예술과 인생, 젊음과 나이듦 등을 둘러싼 ‘향연’급의 토론이 이어진다. 서로 치고 빠지는 대사와 술 따르는 동작까지 물샐틈없는 어우러짐 속에 뒷모습만 보이는 미라의 관찰자적 시선이 묘한 불안감을 드리운다. 알고 보니 연습용 촬영분이었단다. “영화 찍으면서도 서로 자주 어울려서 술자리가 전혀 어색함이 없었어요. 리허설 찍고 본편 찍었는데 오히려 처음 게 나아서 영화엔 그걸 넣었죠.”

성우·영은 등은 20년 전을 연기하는 젊은 배우와 현재 배우를 나눠 캐스팅했지만 미라와 해란은 각각 같은 배우를 썼다. 프랑스 로케이션 2회차를 포함해 총 14회차 촬영에 불과함에도 치밀한 완성도는 베테랑 배우들의 호흡뿐 아니라 준비된 시나리오 덕이다. “필름 한컷도 아껴써야 하는 독립영화 처지라서” 3년을 꼬박 각본 쓰는 데 매달렸다. 2007년 ‘열세살 수아’로 장편 데뷔한 그가 내놓은 네번째 장편 영화다. “2016년 ‘설행 눈길을 걷다’ 개봉 이후 4년만의 신작이라 주변에서 ‘올림픽 치르는 거냐’는 소릴 듣곤 한다”면서 웃었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이국적인 여자 미라(김호정)와 주변 인물들의 내면을 탐색하는 영화 '프랑스 여자'의 김희정 감독.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이국적인 여자 미라(김호정)와 주변 인물들의 내면을 탐색하는 영화 '프랑스 여자'의 김희정 감독.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누구에게나 가장 선명한 순간이 있다”는 포스터 문구처럼, 미라는 불현듯 가장 찬란했던 시절을 돌이켜 본다. 많은 부분 서툴렀고 모호했던 그 시절, 그 얼굴들을 다시 만나면서 자신이 잊거나 놓치고 살았던 조각조각을 길어올린다. 해란의 죽음에 대해 마음 깊이 묻어뒀던 죄책감이 오히려 그를 구원하는 구성에 대해 감독은 “먼저 간 이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의식을 반영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코로나19도 보여주잖아요. 이런 전염병이나 재난은 누구에게 언제라도 닥칠 수 있다는 것을. 버스를 타지 않았다면 그 레스토랑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괜찮았을까. 창작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대해 예민하게 감각해야 할 부분들을, 미라의 내면을 통해 들려주려 했어요.”

영화를 감상하는 포인트 하나. 미라는 종종 화장실 혹은 욕실을 가려다 환영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습기와 고독의 공간이 말해주는, 미라의 현재 위치는 과연 어디일까. 그에게 닥친 ‘재난’이 과연 남편과의 결별 뿐일까. 해롤드 핀터의 연극 '배신', 장 주네 극작가의 '하녀들', 프랑스 영화 '줄 앤 짐' 등 '극 중 극' 요소들이 해석의 결을 풍부하게 한다. '마돈나'의 신수원 감독은 "한 이방인의 꿈 속을 돌아다니다가 영화가 끝날 때쯤 현실로 나오는 듯한 영화였다"는 평을 남겼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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